목회현장에서 종종 듣게 되는 유머입니다. 만약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떡합니까! 무슨 이런 유머가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유머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매일 상황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부대키며 살아야 하는 목회 현장에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궁에서 각국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때 서양의 식사 매너에 익숙하지 않는 동양인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많이 초청됐습니다. 지금도 서양식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많이 세팅되고, 컵들도 물컵, 음료수컵 등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제대로 교양 있게 식사하려면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 만찬 자리도 동양에서 온 외교 사절단들에게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식사한다고 옆에 있는 핑거볼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
사람이 행복하고, 원활한 삶을 살아가려면 영혼육이 전반적으로 고루고루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몸의 한 부분이 위궤양이나 관절염, 당뇨병, 비염, 고혈압. 등으로 말미암아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우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마음에 원망이나 불평, 근심, 걱정, 미움 등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면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서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게 지낼 때 사람이 진정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말씀대로 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리라 봅니다. 사람과의 관계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여러 갈등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선하고,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까다롭고,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론 이웃들을 통해서 부당하게
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
네덜란드의 아동 문학가 안나 왈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있다.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의 ‘테스와 보낸 여름’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 깊게 볼 수 있는 것은 샘이란 소년이 죽음과 외로움에 대비해서 훈련하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섬으로 간 샘은 그곳에서 ‘지구에 마지막 남은 공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부터 자기보다 나이 많은 부모와 형이 먼저 죽은 후에 혼자 남아서 외로움을 겪게 될 것을 상상한다. 이것을 미리 극복하려고 일주일 동안의 고독 훈련 계획을 세우고 해변가에서 실행에 옮긴다. 수영을 하거나 게를 친구 삼아 대화를 하며, 섬을 배회하면서 정해 놓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이 영화는 샘이 고독 훈련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더 멋지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겠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만 어린 소년의 고독 문제를 다뤘기에 특이하고 관심을 끌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과 감정을 가졌기에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양한 고독감을 경험하게 된다. 대화할 한 명의 친밀한 친구조차 없거나 반려자를 잃고 난 후의 지독한 외로움과 허전함,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가지는 것,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낙오자
이성(理性)은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알아내는 힘이다. 논리적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힘으로 본능, 충동, 욕망 등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법칙을 만들어 따르도록 의지와 행동을 규정하는 자율적 도덕적 의지의 능력을 이성이라 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반면에 인간은 본능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진위, 선악을 구별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한다. 감성(感性)은 사전적으로는 자극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5관(五官) 눈, 코, 귀, 혀, 피부 다섯 가지 감각 기관(感覺器官)이 타인의 감정 등 외부로부터의 모든 감각적 자극을 받고 그에 반응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성이 논리적이고 지식적이라면 감성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을 광고할 때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디자인이나 색상으로 모성애를 자극한다거나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을 감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하고 상품의 품질이나 경제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이성적인 마케팅이라고 한다. 사람은 이성적이라야 하지만 감성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이성 감성뿐만 아니라 영성(靈 性)도 있다. 영성은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울금은 진도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로, '막힌 기운을 뚫어주는 황금색 음식'이란 뜻이다. 요즈음 매스컴에서도 육고기나 생선 요리뿐만 아니라 뇌건강과 항암효과에서부터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진 울금은 요사이 관심이 되고 있는 면역력 기능을 높여 준다고 알려져 있다. 울금을 자랑하고 광고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진도에서 특산물이라고 재배되는 작물 중에 하나로 울금을 넣어 만든 엿과 젤리를 구입하고 몇 개씩 포장해 나누며 전도하고 있다. 대부분 노년층으로 구성된 마을주민 분들은 집을 방문을 하거나 회관에 찾아가 만난다. 또 들이나 밭에서 계시는 분들을 만나면 사탕이나 과자 하나라도 드리며 말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다. 그래서 진도에 목회하며 생긴 습관 하나가 차 안에나 주머니에 사탕이나 과자들을 꼭 넣어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옛 팽목항인 진도항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픈 추억의 장소이지만 먼 진도까지 찾아오신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장소다. 몇 년째 매주 한 번씩이라도 가면 언제든 새로운 분들을 만날 수 있다. 교회 청년과 전도를 나서며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실 일을 기도하고 기대하는 시간은 새로운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자칭 사도”로 그의 사도직을 조롱했다. 적대자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바울은 당대에 거짓 사도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였다. 바울이 제시한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분하는 대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인가,’ ‘아닌가’ 이다.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파송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강조한다(갈 1:1, 11~12).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복음의 계시와 이방인 선교에 소명을 받고 파송 받았다면,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위임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신약이 기록되던 원시 기독교 시대에 12사도와 바울 사도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있었거나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희사한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사도”라는 명칭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관해 물음에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로 번역한 아포스토로스는 아포(~로 부터)와 동사 스텔로(내가 보낸다)가 결합해 파생한 “~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사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
넷째는 방문상담사 돌봄과 성장을 위한 자문 제공이다. 방문상담은 교회의 목양적 방문이나 사회적 방문의 경우 모두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 및 필요한 지원과 돌봄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사역이자 전문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낯선 곳을 찾아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만 아니라 호의적이지 않은 여러 가족 구성원들이나 관리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무거운 이슈들을 다룬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크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진(burn-out)시키는 힘든 작업이다. 자신들의 상담교육이나 훈련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슈에 직면하거나 상담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경우 상담사로서의 부적절감 등으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 전문 상담사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슈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한계와 전문성에 관한 회의를 경험할 때가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방문상담사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경제적 보상도 충분치 않거나 자원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오래 지속하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들의 이름에 대해서 관여와 배려해주심이 있다. 사가랴의 아들 이름을 천사를 통해서 “요한”으로 미리 알려주셨는가 하면(눅 1:13) “고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의 이름을 더 크고 위대한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도 했다(창17:5).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신 사례들도 있다. 호렙산 근처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간 모세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던 사무엘을 밤중에 각각 부르시고는 사명 이나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셨다(출3:4, 삼상3:10).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불러 주시며, 다윗처럼 존귀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다(대상17:8).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귀중히 여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지위, 업적, 생애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세까지 명예롭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며 불러 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대심방시 교인 자녀들의 이름을 갑자기 잊어버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