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백동마을에 밝혀졌던 십자가의 불빛이 몇 달 전부터 꺼졌다. 마을에 들어오면 논밭으로 가득한 시골에 깜깜한 암흑의 모습을 보며 “주여 십자가의 불빛이 다시 밝혀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백동교회 예배를 드렸던 건물에 열쇠가 채워지고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십자가의 불빛마저 밝힐 수 없는 됐다. 그러나 매일 저녁 기도를 멈출 수 없어 넓은 공간이 있는 집에서 마가 다락방의 모습으로 기도하며, 교인들에 의해 옆 땅에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도 세워보지만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를 구하고 있다. 진도에는 어느 정도 규모만 되면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다. 비록 제칠일안식일 교단이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도 있지만 그 후에 세워진 개신교회들이 마을 교회로 자리하고 있다. 어느 마을에서는 자기 마을만 교회가 없다며 교회를 세우게 됐다고도 한다. 백동마을은 진도로 들어와 세월호 사건 때 알려진 팽목항이라고 하는 진도항을 가기 5분 전쯤에 위치한 곳이다. 어느 땐 밤늦게도 차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밤새도록 십자가의 불을 밝혀 두었었다. 혹이라도 낙심한 영혼이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마음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음 날 새벽에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습니다. 처음 경험했던 바로 전날보다는 덜 놀랬지만 그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제보다 20분이 더 이른 1시 20분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저의 몸 상태를 잘 아는 저로서는 이런 일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 위에 예수와 함께 서 있었던 놀라운 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 불속에 던져짐을 당했는데도 타지 않고 불속에서 거닐던 이해하기 힘든 그 몸, 세상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날도 이성을 가다듬고 알람이 울리기까지 30분이 더 남아서 그냥 잠을 자는 쪽으로 결정하고 잤습니다. 그리고 1시 5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났을 때는 30분 전의 몸과 완전히 다른 평상시 몸 상태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기도하러 본당으로 올라가서 기도 전에 나름대로 혼자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일이 연이어 이틀 동안 일어나는 일이 우연한 일치고는 너무나 이상한 것 같아 만약 내일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시계를 먼저 보지 말고 옷을 다 입고 기도
필자는 침례교회가 독자적 교단으로 존재하게 된 원인이자 침례교 정체성의 근간인 신약성경적 교회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신약성경적 교회관 중 신자의 침례, 중생자 회원, 엄격한 치리 전통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상징주의 성례신학, 회중주의, 개교회주의 등을 살펴볼 것이다. 1. 상징으로서의 성례 침례교회는 교회의식(성례)으로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 의식만 인정한다. 그리고 침례와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며, 따라서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상징적 의식으로 믿는다. 침례교회는 대표적인 반(反)가톨릭주의 교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가톨릭 성례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 혹은 구원의 방도라는 다른 개신교단들의 사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교회는 구원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얻게 되므로, 성례는 구원과 관련이 없는 상징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믿는다. 침례교회는 침례는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하며,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주의 만찬은 또한 그리스도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하여 알아봤다. 인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의 경륜 속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독생자이시다. 인자는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장대에 매단 것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인자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병이어 표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반가운 인사말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이 그를 찾아온 목적 곧 그들의
이해인이란 시인이 ‘고운 말 쓰기’를 위해 이런 제목으로 5행시를 썼다. 고 – 운 말을 써야 고상한 사람이 되지요 운 – 치 있는 우리말을 꾸준히 써가노라면 말 – 의 향기가 널리 퍼져 세상은 꽃밭 되지요. 쓰 – 지 말죠. 속어, 비어, 극단적 부정적인 말 기 – 품 있는 사랑의 말 다 함께 갈고 닦아요! 우리 사회의 언어가 점점 추악해지고 파괴적인 것으로 오염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순화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이들이 있어 다행스럽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인처럼 고운 말, 건전한 말, 아름다운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주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어여뻐하시는 입은 어떤 것일까? 아가 4장 3절에는 솔로몬 왕이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보고 “네 입은 어여쁘고”라고 칭송했다. ‘입’이란 입술에서 목구멍까지 이르는 부분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한다. 입은 음식물 섭취를 위한 신체 기관이면서 소리를 내어 뭔가를 표현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입이 어여쁘다고 한 것은 젊고 아름다운 입일뿐더러 하는 말 또한 어여뻤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솔로몬은 술람미의 입술을 ‘홍색실 같다’고 했다. 그녀의 입술 역시 젊고 붉어서 혈색이 좋았음을 나타냈으며,
2012년 10월 3일, 저희 아들이 결혼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평상시에 사람들을 통해서 말로만 듣던 며느리를 저희 가정에 실제로 맞이하게 됐습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이 그냥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제 눈에 며느리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기도 하고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마주 본다는 자체만으로도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여전도회 주최로 교회 앞 놀이터에서 바자회를 하게 됐습니다. 저희 며느리도 무리들 속에 함께 섞여서 옷가지들을 훑어보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평상시에 제 아내가 쇼핑을 가면 저도 때때로 같이 다니며 물건 고르는 것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날도 제 아내에게 했던 대로 며느리와 함께 물건들을 보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며느리가 고른 옷들을 모두 제 돈으로 지불해 줬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느껴지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선뜻 낼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혀 아까운 마음이 안 들고, 심지어는 사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제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며느리
“서양화에서 달을 그린다고 하면 붓으로 달의 모양을 확연하게 표현하겠지만, 동양화에서는 붓으로 직접 그리지 않는다. 달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그림으로써 거기 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달이 있는 자리만 보여줄 뿐! 주변의 구름만 부지런히 그려내면 어느 순간,거기 달이 떠 있다. 이런 기법을 동양화에서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고 한다.” 김미라 저(著) ‘김미라의 감성사전’(책 읽는 수요일, 3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달을 그릴 때만이 아니라, 구름이나 안개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붓으로 구름이나 안개를 직접 그리기보다는 산과 산, 산과 나무 사이에 여백을 둠으로써, 그것이 곧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도록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자랑을 해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옆 그림 즉 그가 살아왔던 삶,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보면 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문열의 ‘시인’은 우리가 잘 아는 설화 김삿갓 김병연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애타는 바람을 뒤로 한 채 시인이 되어 일탈의 세계로 들어선 김삿갓을 둘째 아들 익균이 찾아 나섭니다. 이미 두 번이나 아버지를 놓친지라 단단히 벼르고, 드디어 아버지를
우연인지 행정상 편의 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는 안내전화와 번호가 114이지만 미국에서는 411번이고, 긴급전화가 한국에서는 119번이지만 미국에서는 911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어떤 국제통신의 약속일수 있다고 접어 둡시다. 또 한국에서는 초생달이 니은(ㄴ)자 방향으로 휘어져 뜨는 것을 볼 수 있고 교과서에서 그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초생달은 그 반대인 기역(ㄱ)자 방향으로 휘어져 뜰뿐만 아니라 교과서에도 그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달을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을 알면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사물의 양면을 보는 지혜를 갖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개의 남의 말이란 사건 단면만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폐나 동전의 양면이나 뒷면 하나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면을 보고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사람 나름대로의 처지와 입장이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나무라기 전에 그를 먼저 이해하는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잠깐! 정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합시다! 황희 정승이 농부에게 “검은 소와 누런
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여름에는 무성하고 그리고, 그러고나서 가을이 오면 다시 더욱 더 맑은 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나뭇잎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저 발가벗은 ‘힘’을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The Oak)’입니다. 테니슨은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 이른 82세에 인생을 오크(The Oak)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오크가 마침내 나뭇잎들이 다 떨어진 뒤에도 ‘나력(naked strength)’을 가진다고 예찬합니다. 나력은 본래적인 힘입니다.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은 뒤에도 남아 있는 힘을 나력이라고 합니다. 마치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가가 옷을 벗은 뒤에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나력을 가진 것입니다. 세상은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그 사람에게 모여 드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 사람이 돈과 권력을 다 놓고 난 뒤에도 힘이 있는가. 그를 존중하고 좋아하는가. 김은주 저(著) ‘1cm art’(허밍버드, 99쪽)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나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고개를 숙인다면 그것은 진짜 예의이다. 그가 나를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미소를 거두지
얼마 전 뉴스와 신문에서 빚 독촉을 받아 온 형이 흉기로 동생의 목과 등을 수차례 찔러 죽인 사건에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비극으로 끝이 난 형제 갈등의 시작은 우애가 돈독한 형의 사랑으로 시작됐다. 형이 로또에 당첨이 되어 8억 원을 손에 쥐게 되자, 아끼던 동생에게 집을 사주고 다른 형제들에게 당첨금의 일부를 나눠줬다. 형은 남은 당첨금으로 식당을 열었는데 경영이 악화로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준 동생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4천 600만원을 빌렸다. 처음에 동생은 그런 형의 처지를 이해했지만 빚 독촉이 계속되자 형과 동생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사건 당일에도 술을 마신 형이 전화로 동생과 말다툼하던 중 형이 그만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와 흉기를 꺼내 마구 휘둘러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have?)’에서 인간의 삶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구분하여 존재를 버린 지나친 소유욕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있었던 히브리 백성들은 소유양식으로 살았다면 그들은 거친 광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