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맥락 성서 각권마다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은 몇 가지의 요소 즉, 저자와 수신자에게 주어진 시간과 문화로서 당시 그들이 직면한 지리적, 종교적, 정치적 구성 요소이다. 이러한 설정 안에서 저자는 그의 메시지를 예언적 신탁, 서신, 나레이티브(인물 혹은 사건 중심의), 그리고 그외 다양한 문학형식을 빌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이러한 장르의 이해는 성서해석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가령,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또는 포로 이후에 속하는 학개의 배경을 전제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침례요한과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당시 사회의 농도 짙은 사회분위기였던 메시아 대망의 열기라든가, 고린도교회와 빌립보교회가 피차 어떻게 차이가 있었는가의 전제적 지식은 성서해석에서 지대한 차이를 가져온다. 2) 문학적 맥락 낱말의 의미는 반드시 그 단어가 자리를 정한 그 구절(verses)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사진다. 문학적 맥락으로 말하면, 성서 본문의 의미 파악은 반드시 선행구절과 후속구절이 그 해당본문의 의미를 결정한다. 문학적 맥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저자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이
이집트왕 바로는 이상한 꿈을 연거푸 두 번이나 꾸었습니다(창41:1~7). 그러나 이집트의 박사들과 술객들 누구도 그의 꿈을 속시원히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명쾌하게 해몽했습니다(창41:24~25). 하나님께서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하신 것은 속히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뜻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봅니다(창41:32). 앞의 꿈은 암소를 등장시켰고 뒤의 꿈은 이삭을 소재로 했는데, 일곱 마리의 좋은 소와 충실한 일곱 이삭은 7년 간의 풍년을 상징하고 파리한 나쁜 암소와 세약하고 마른 이삭은 7년 흉년의 때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세에 흉년과 기근의 시대가 옵니다(마24:7). 그런데 말세의 시대는 식량만 흉년들고 기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 흉년과 말씀의 기근 시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암8:11~12). 이러한 원인과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입니다. 식량의 기근과 흉년도 무서운 것이지만 영적 흉년과 말씀의 기근은 더 두렵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배고픔은 우리를 마르게 하지만 영적 기갈은 영생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래 역사적으로 수많은 책이 국내외에서 금지도서로 지정되었다. 국내 금지도서의 내력을 찾아보았다. 1) 조선 초기에는 왕조체제를 위협하는 내용과 유교 외의 가르침을 담은 서책이 금서가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정(鄭)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암시한 ‘정감록’과 천주교 서적 ‘성찰긔략’, 동학사상을 소개한 ‘용담유사’, 김시습의 ‘금오신화’ 및 도교사상 관련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2) 해방 이후의 대표적 금서로는 이태준의 ‘쏘련기행’, 신채호의 ‘을지문덕전’, 현채(번역)의 ‘월남망국사’(1960) 등이다. 월북문인 정지용, 백석, 이태준, 임화 등의 작품은 6·25를 전후해서 모두 금서 판정을 받았으나 그들이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88년 삼일절을 기해 모두 해제 되었다. 3) 군사정부는 국내외의 명망 있는 학자와 문화예술인 종교인 및 재야인사들의 작품을 대량 금지도서로 만들었다. 비록 금지도서 목록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완상의 ‘민중사회론’을 비롯해서 사회과학에 대한 도서 대부분이 금서 취급 받았다.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금서는 맨부커 상, 콩쿠르 상, 횔덜린
벌써 26년째, 안수(1990.5.26.) 받고 목사된 세월만큼이나 설교자로도 살아야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부족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한 것 몇 가지가 있어 고백한다. 첫째, 설교자인 나를 위해 하나님은 늘 말씀해주시는 분이셨다는 점이다. 물론 그 분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말씀을 쏟아내는 분이시고,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말씀을 하고 계신 분이지만, 그와 더불어 그 분의 입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심이 설교자인 나로서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입을 굳게 다무시고 아무런 말씀도 안 해주신다면 우둔한 내가 어찌 그 뜻을 알며 어디서 참 지혜를 구할 수 있으리.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난관 또한 어찌 극복해낼 수 있으리. 다 그 때 그 때마다 적절히 말씀해주신 덕분이다. 모세를 생각해본다. 한두 명도 아닌 200만 넘는 백성을, 나흘도 아닌 40년간이나, 신작로도 아닌 광야 길을 걸어,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코앞에 둔 땅까지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결코 모세 그의 능력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신령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들이 만난 하나님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들은 스스로들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형상을 말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계시해 주실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어느 여름 폭풍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하나님은 바퀴위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타고 계신 거룩한 바퀴는 하나님의 규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좌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천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은 보좌가 있는 바퀴위에 계십니다. 바퀴가 의미는 땅과 하늘, 그리고 우주 전체에 가장 높이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에스겔은 15절 말씀에서 “내가 … 보니”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30년의 포로생활 가운데서 단 차례도 자기를 계시(
토마스 롱(Thomas G. Long)의 말과 같이, 설교자는 장르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만일 하나의 본문이 각 문학 장르를 통한 수사적 역량을 충분히 드러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신실한 설교자는 본문 안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동일한 문학 장르 형식을 따라 설교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본문이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야기로 전해야 할 것이고 본문이 시문학에 속한다면 그의 설교는 시적으로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너무 어렵고 힘이 들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주어진 설교적 과제는 본문의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본문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문학형식이 현대 설교자에게 설교 구성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기에 어떤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성서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와 다른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청중에게 메시지를 들고 나아가는 설교자는 그 틀에 묶여버리는 것보다 본문을 위한 가장 좋은
현대인이 잃어버린것 중의 하나가 “감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사랑이라면 가장 따뜻한 말은 감사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받으면 그와 내가 하나가 되고 막혔던 담이 무너지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이 한 마디를 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감사하면 모든 관계가 원만해지며 건강해지는데로 말입니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감사 불감증”의 시대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참된 감사가 사라진 것을 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파선하고 감사가 증발하며 사랑이 식어가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상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감사가 바닥이 나고 도무지 어떤 것에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감사 상실증의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쉽게 봅니다. 한 시대나 사회와 가정의 건강의 척도는 얼마나 감사하느냐는 “감사지수”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
195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우리의 사랑을 받던 수많은 노래가 금지곡이라는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건국 이래 최초의 금지곡은 조명암이 가사를 쓰고 남인수가 노래한 기로의 황혼으로서 작사자의 월북으로 1951년 3월 1일자로 금지곡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윤복진의 찔레꽃이 같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5·16군사혁명 후에 발족한 방송윤리위원회는 표절, 왜색, 저질 등의 이유로 1986년까지 국내외 음악 2,139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들 금지곡 중에는 퇴출 되어 마땅한 노래도 있었지만 타당한 이유 없이 금지된 노래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부분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 등 27개 곡은 대부분 왜색 노래라는 이유로, 그리고 김도향의 벽오동 심은 뜻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 금년 5·18기념일을 앞두고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황석영이 백기완의 옥중 중편 시 묏비나리에서 몇 행을 발췌해서 개사(改詞)한 것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제목은 알다시피 강산, 즉 “조국을 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난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있어서 부활과 승귀의 국면을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올리어지심을 통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존재 곧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을뿐더러 견줄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셨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순종하고 경의를 표하는 권위의 존재가 되셨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권능과 생명을 가지신 ‘주’님의 존재가 되셨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의 완성과 완결을 위해 활동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현재적 활동을 성령의 활동과 연결하여 제시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먼저 존재의 측면에서 그리고 역할의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살펴본다.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기독교 신관의 핵심 요소인 삼위일체 신관에 기초한 국면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을 묘사할 때 ‘영’(pneu/ma)이라는 단어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또한 여러 경우들에서 그 성령이 나오고 있는 근원의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 찬양과 기쁨, 격려와 위로 그리고 감사와 환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망과 낙심, 낙담과 억압, 그리고 고통과 사별 수많은 상황들이 그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시편 19편 1~6절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이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그래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보지 못한다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53:1) 그렇습니다. 오로지 어리석은 바보들의 눈에만 저 아름다운 우주의 신비로움이 어떤 폭발에 의해서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1~6절의 말씀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창조되었고 존재하며 그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자기를 계시(啓示)하심을 보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대 반전의 말씀을 보이십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