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것입니다. 가끔은 스스로 대견스럽게 느껴지게 하기도 하고, 자신감을 갖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실은 신앙생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은혜로 복음과 성경의 진리 말씀이 믿어지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고 감격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전적 은혜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공짜로(?) 믿음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말씀도 좀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도 정한 시간 드리고, 믿음의 지체들과 적절한 교제의 대가를 치러야 은혜의 삶이 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도 하나씩 깨달아 가고, 무턱대고 믿어 넘기던(?) 진리의 말씀이 이해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이런 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지만, 지식은 그 구원받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강사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대뜸 “감기에는 어떤 약을 먹어야 하나요?”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중들은 나름 먹어본 감기약 이름들을 앞다투어 불러댔습니다.
본문은 좀 이상한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원망하니”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장과 원망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장, 열정, 낙관 이런 말은 같은 의미지만 불평, 원망은 반대 의미입니다. 하지만 교회사 가운데 가장 모범적으로 성장했던 교회에 원망과 불평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는지 그 원인을 찾아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아낸 예루살렘교회를 우리도 모범삼아야 하겠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역사에서 “밀월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1~11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그리고 6장에서 예루살렘교회는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이제 헬라파 유대인들까지 교회 안에 상당히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들 외에도 일곱 명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세우게 되는 데 유대교회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미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미망인들을 돌보는 것은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친인척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는 이런 미망인들을 돌보는 공
2. 문학적 배경 분석 (Literary Context Analysis) 성경은 문학적 문맥을 가지고 있다.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저자가 본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안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문맥 연구이다. 설교할 본문을 중심으로 문장과 문단과 장과 책 전체로 확장되는 동심원을 그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심원의 확장을 통하여 본문의 문학적 문맥을 분석할 수 있다. 이때 두 가지 문맥을 고려하여야 한다. 거시적 문맥(larger context)과 지엽적 문맥(smaller context)이다. 거시적 문맥은 넒은 관점을 요구한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책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본문의 의미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책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때 전체 성경본문을 충실하게 정리한 아웃라인을 참조할 수 있다. 지엽적 문맥은 본문 가까운 곳의 세밀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선택된 본문의 앞뒤로 나누어진 문단을 확인하고 각 문단이 어떠한 관계로 나누어지고 연결되는가를 파악한다. 본문에 문맥을 파악하므로 본문의 의미를 점검하는 분석방법이다. 3. 본문의 핵심 단어 분석 (T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혜와 계시의 성령 4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알아보고 있다. 그 중에서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에 관해 지난 3회에 걸쳐 게재했다. 지난 호에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다뤘다. 이번 호에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심으로 알게 되는 것으로서 두 번째 내용인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엡 1:18하)에 관해 다루고자 한다. 이 둘째 내용에서 핵심적인 용어는 ‘기업’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원래 “상속(유업·유산)으로 받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기업’이란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상속, 유업, 혹은 유산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래서 ‘기업’이란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유산·유업)으로 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는 ‘기업’ 외에 ‘상속자’라는 단어도 있다. ‘상속자’는 “유산·유업·기업을 상속으로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 동사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도 음행, 술취함, 방탕
흔히들 말하기를 종이 울려야 종이고 노래는 불러야 노래하듯 사랑은 표현해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유교적인 영향으로 속으로 정이 있으되 밖으론 표현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가르쳤고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습니다. 그게 옳은 것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거나 익숙하지 못하고 쑥스러워합니다. 마치 입으로 표현하면 경박하거나 진실되지 못한 사람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에 매여 살 수만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표현할 줄 모른다면 과연 사랑하는게 맞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물론 표현에 정답은 없습니다. 사랑은 수학이 아닙니다. 더욱이 복잡한 연립방정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된 사랑은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인데 무슨 법칙을 대입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만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조건이나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조건이 사라지면 사랑
목회자는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다섯 시에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교회 규모에 따라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열시에 목회자 회의, 심방전도 나가고, 방문자 영접하고, 상담하고, 설교 준비하다가 늦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과에서 해방된다. 일과를 마쳤다고는 해도 신자의 요청이 있으면 밤중에라도 뛰어나가야 한다. 직장인들 역시 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정한 시간에 퇴근한다. 특히, 기관의 장은 그 기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책임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 보다 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한다. 어떤 교육기관에서, 한 괴한이 여자화장실에 침입해서 혼자 들어간 여학생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비명 소리에 놀라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몇 선생이 봉기해서, 교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할 의사가 없는가, 유관 직원을 징계하라, 후속 대책은 무엇인가 하며 장기간 거세게 항변했다. 학교의 장은 변명하지 않고 사과하고 보직자와 학생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어 후속조치를 마련했다. 근래 회자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하면, 대통령이 평소에 출퇴근 시간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저(私邸)를 근무지로 착각하는 것 같다. 사택(私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 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고서는 선과 악의 기준이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불신자들 안에서도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저들은 안식일의 개념도 없고, 물론 십일조도 하나님께 안 드릴뿐만 아니라 식사할 때나 무엇을 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경우도 없습니다. 제사문제도 그렇고 저들에겐 돈이 인생의 주인이며 모두가 무익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욕망과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것입니다. 작년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도 폭염이 심했고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저희
누가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 주신 말씀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입을 맞추니”(15:20).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한 목적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5장은 특별히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줍니다(요1:18) 우리가 본문을 읽는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얼마나 보족한지 느끼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진 문제의 진실은 자연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 그분의 심장을 알지 못하며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욥23:3)는 욥의 절규처럼 하면 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욥의 간절함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 자기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한 개념을
세 번째는 ‘본문 안(in the text)’에서 이다. 본문의 의미를 찾는 데 있어서 성경을 처음 기록한 성경저자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의미론(semantics)과 구문론(syntax)에 의하여 본문에서 원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성경의 저자는 의도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였다(눅 1:1~4; 요 20:30~31; 요일 5:13).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에서 성경저자가 의도한 목적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기초한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원칙은 자신의 전제들이 성경이 원래 말하려는 것과 조화를 이뤄 성경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저자를 통해 의도된 의미와 목적이 본문의 의미와 목적을 정하는데 우선권을 가진다. 따라서 본문을 기록한 원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해석의 주된 원칙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는 설교가 얼마나 성경적인 가를 알기 위한 기준은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했는가 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저자를 통하여 기록한 성경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가를 파악하고 또한 현대 설교에 충실히 반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본문은 원저자의 의도된 의미뿐
사무엘상 8장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양 갈래 길에서 중대한 기로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내용입니다. 사무엘이 늙어서 두 아들에게 사사 직분을 맡겼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사무엘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대가성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던 것입니다(8:3). 그러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중대한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처럼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서 자기들을 다스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한 기준은 다른 나라들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어리석고도 무지한 기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바꿀만한 엄청난 결정인데 집단으로 몰려가 사무엘에게 간청한 이들의 요구를 사무엘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민에 빠진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8:21). 그들이 왕을 요구하며 제시한 기준이 5절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것입니다(20절). 그들이 제시한 기준이 고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이 충격적
일본이 대동아 전쟁 중에 한국과 동남아의 소녀들을 강제 동원해서 군의 성노예로 이용한 소위 군 위안부 강제동원문제는 위안부생존자들의 증언과 방대한 기록물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신조(安培晋三) 수상은 지속적으로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서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대신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대신은 이를 인정하고 사과했으며(1994년, 1996년), 소다 가스히로(想田和弘) 같은 이는 생전에 자신의 트위터에 2,000번 이상 위안부 고발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 간에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2015년 12월 18일에 “군 위안부 문제 관련 한?일 합의사항” 5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합의는 위안부 생존자들과의 의견교환이나 합의 내용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나온 것이어서 국민을 당황스럽게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항은,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며 아베 총리는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현한다. 3-4항은,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보상을 완료한 후에는 피차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5항은, 소녀상 문제는 한국 정부가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
나라 곳곳이 대설로 난리다. 하얀 눈이 내린 겨울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서민들에게는 삶에 어설픈 날씨로 속히 따스한 봄이 오기를 기다려진다. 온도계의 눈금보다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추위가 더 느껴지는 때다. 최남단이라 할 수 있는 진도에도 눈이 내렸다. 새벽 기도를 위해 문을 나서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이 검은 색 차를 덮고 있는 눈을 보고 멈췄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눈을 사진에 담고 매일 일상처럼 하는 화덕에 나무를 넣고 불을 붙였다. 차가운 겨울에 거실에 있는 나무 화덕 난로가 뜨거운 불을 보이고, 고구마가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난로 위에 주전자를 놓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으니 집에 온 딸이 “산장 온 기분이네.” 말한다. 미국에서도 주택에 살면서 벽난로를 사용했지만, 한국에 와서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욱이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 아닌가? 난로 앞에서 차가움을 몰아낸 화덕 난로의 따스함을 느끼며 잠시 신문을 보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하나도 헛되지 않음이 없음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 아침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려는 의도가 있으신 듯 큰 광풍이 부는 바다위로 제자들을 몰고 가신
선교여행 차 20시간을 비행기로 날아 도착한 아프리카의 최빈국 ‘말라위’(Malawi)는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이 더 열악했다. 흡사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역 같은 말라위 제2의 블랜타이어(Blantyre)국제공항부터가 그랬고, 녹슬어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는 수하물 카트부터가 그랬다. 그리고 만났던 모든 사람들 역시 어쩜 그렇게들 새까맣던지, 옷차림은 어쩜 그리 다 남루하던지, 애들은 더 심해서 성한 옷이란 없고, 여인들 또한 아기를 등에 업고서도 물동이를 이거나 나무를 나르는 등의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들이 포착되었다. 길과 집과 상점들 역시도 초라함의 극치였다. ‘아직도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있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이렇게 사정이 여의치 않다보니 우리 선교팀들의 각오도 다부져야 했다. 며칠 베이스캠프로 사용한 숙소야 그런대로 괜찮았다만,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역했던 두 곳(Shire / Kasinje)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건 물론이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주변엔 상점도 없어 돈이 있은들 뭘 살 수도 없었고, 먹고 자고 씻고 싸고 하는 것 또한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식도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라고 정성껏 준비는 했다지만
고린도전서 15장은 초대교인들이 생전에 주님 재림을 기대했지만 주변에 성도들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서 과연 재림하실까? 죽은 사람은 부활할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답변으로 우리는 분명히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 날은 스릴이 넘치고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을 약속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장에 와서는 갑자기 우리가 살아가면서 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과 그 해결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함부로 자동차를 몰아서 안 되며, 그들이 자라서 운전법을 배우고 난 후 차를 운전해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귀중한 가치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돈의 중요성과 하나님께 드리는 규칙과 원리의 가르침입니다. 첫째, 드림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제시돼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드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특별한 이유는, 초대교회, 특히 예루살렘교회가 재정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입니다. 예루살렘성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
스미스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다. “해석의 과정을 통해 바른 의미를 얻고, 분문처럼 설교의 구조를 정하며, 본문의 의미나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전달하고, 본문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본문의 고유한 의사소통 방법을 통하여 얻은 효과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또한 설교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한다. 2.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해석 원칙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준비는 본문연구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전체 설교준비 중에 기초 과정이고 설교자의 삶에서도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 충성스러운 학생은 성경해석이 정확해지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모든 설교는 본문의 정직한 주해로부터 나오므로 지속적으로 본문에 가까이 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감동된 말씀의 뜻(요 14:25-26; 벧후 1:21)을 해석하고 분별하는 데 도움을 주신다(요 16:13-15; 고전 2:6-16; 엡 1:18; 골 1:9; 벧후 1:21; 요일 2:20, 27). 하지만, 성경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를 무시하고 성경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영해(spiritu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