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가 문제시되는 부분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나 있다. 바울이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 바울이 아덴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최초로 쟁론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8) 그러나 바울의 초점은 선교였고, 철학자들의 초점은 학문적 토론에 두었기에 이 둘은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입장을 보였다. 즉 바울과 철학자, 신앙과 이성의 긴장관계는 서로에게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바울의 여정을 드려다 보면 초기 철학이 추구하는 이성의 절대성으로 기독교 신앙이 변질되고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다는 우려로 철학에 대한 경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골로새서에 잘 드러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오십 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노후에 관한 생각이 절로 마음에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이에게 닥치는 자연적인 현상 으로 여겨졌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진 것은 없고, 그렇다고 노후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불안함과 염려가 마음에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늘 그랬듯이 모든 인생의 해답은 성경에 있으니 성경에서 기도하며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애굽 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매일 세끼 똑같은 만나만 먹고, 재래식 화장실과 장막 생활을 한 것을 볼 때 나 또한 그렇게 못 살라는 법이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하니 말씀 안에서 자유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연금 받고 산 것도 아니고 반면에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옥 생활도 하고, 심지어는 고문 등 순교까지 했는데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자며 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이나 잘하자” 라며 예전보다 더욱 신앙의 허리띠를 동여맸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시는 어느 원
다윗의 힘든 도피생활이 이어진다.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빠진 다윗의 긴박감이 잘 드러나는 본문, 가는 데마다 사울이 따라온다. 사울이 미처 오지 못해도 신고자들 때문에 피할 곳이 없다. 물론 비극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추격자 사울에게 잡힐 뻔한 위기가 스릴있게 전개되는 것은 맞지만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빛이 난다. 하나님과 밀월관계였다 23장 1~13절의 내용은 도피생활 중에 있었던 여느 에피소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일라 지역이 블레셋에 의해 공격당하고, 주민들은 타작마당을 습격당해 애써 수고한 농산물을 빼앗긴 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자기 몸 하나 피신하기도 바쁜 때였지만 그일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 블레셋을 공격하려 한다. 당연히 다윗의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3절).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고, 그 전투에서 이겨서 그일라 주민을 구한다. 다윗의 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지랖 때문일까? 아니다. 이게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이다. 다윗은 마치 이미 왕이 된 것 같다. 왕은 백성을 책임지는 자리, 자기가 희생되더라도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인데 다윗은 왕의 품성을 잃은 사울과 달랐다.
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 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 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돌아 다녀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들은
가해자 배우자에 대한 피해자의 항변이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하며 여전히 가해를 하는데 어떻게 이를 참을 수 있단 말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다. 가해자 배우자의 가해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피해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부부가 모두 어린 시절 그들의 부모로부터 피해자였던 사실이다. 한 사람은 가해의 역할을 하고, 한 사람은 그림자로서의 피해자로 만나 새롭게 구성된 원가족을 통해도 계속 역기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로 접근을 하면 안 된다. 적어도 하나님이 부부로 짝지어 주시고, 이미 자녀들이 있을 수도 있기에 서로의 상처를 보고 함께 치유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이혼에 대해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대부분 가해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가해자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크거나 작거나 모두 피해자요, 가해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단순히 역기능이 가족체계에 의하여 대를 이어 대물림이 되는 것에 귀를
요즘 전세계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 때문에 난리다. 미국 에서 목회하는 필자에게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놀랍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에게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 봤냐고 묻는다고 한다. 정말 한국 게임들 중에 구슬치기, 뽑기 등이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실은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까지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넷플릭스에서 계속 몇주째 1위다. 요즘 한국 사람으로 매우 살만한 세상이다. K-콘텐츠가 세상을 휘어잡고 있다. 쇼핑몰에서도 BTS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종종 듣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 그러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던 우리에게 기생충, 미나리 같은 영화의 성공과 오징어게임의 흥행은 놀라운 그 자체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IMF를 겪으면서 콘텐츠의 힘을 깨닫게 됐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IMF와 금모으기 운동을 따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꼭 독립운동하듯 금을 모았던 기억이 필자에게도 있다. 그런 온 국민의 노력이 당시 개봉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 한 편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외국 영화 한 편이 한국에서 벌어간 돈이 온 국민이 헌신했던 금 모으기 운동의 금액과 비슷했던 것이다. 나라의 어려움을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야베스의 기도”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2000년대 초반 애틀랜타의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의 야베스의 기도-내 삶을 채우는 기적의 원리라는 제목의 책이 세계적으로 천 만 부가 넘게 팔리게 되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나오고,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책을 비판하는 글들 또한 많이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기도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돼야 하는데, 야베스의 기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했으며,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불어 넣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윌킨스 목사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현상이나, 이것에 반응해 많은 비평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 것들을 돌아볼 때, 야베스의 기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많은 학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하는 본문의 해석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뿐이고
모든 사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표현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비록 눈이 먼 시각장애인이라도 코끼리를 접한뒤, 기둥 같다느니, 벽 같다느니라고 느낌을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코끼리를 만진 경험이 일치점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코끼리임에는 틀림없다. 모 든 공식에서분모(分母)는 동일하고 단지 분자(分子)가 틀린다고 해도 분모에 변화가 없다. 1/5이나 3/5에 있어서 분모 5가 같으면 분자인 1과 3은 5의 자녀요 형제다. 그런즉 1과 3은 싸울 일이 없다. 성경에 관한 학자들의 설명을 읽어보면 시각장애인 촉상 같은 느낌이 든다. 어떤 학자는 구원의 교리를 강조하고 또 어떤 학자는 성경론을 강조한다. 또 어떤 학자는 종말론을 강조한다. 자기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 제각기 있다. 그런데 똑같은 주제를 놓고 설명이 분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강좌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는 찰스 핫지, 존스토트, 그리고 칼 바르트와 의견을 달리한다고 솔직히 언술하고 있다. 학자간의 의견 차이는 학문의 성격상 가능하다. 문제는 내 것은 맞고 네 것은 틀렸다고 말할 때 시각장애인들의 코끼리 접촉에서 벌어지는 의견의 차이다. 나는 여전히 로이드 존스를
다윗의 망명,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지만 반란을 우려한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다. 유대나 베들레헴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기에 결국 다윗은 살기 위해 놉 땅으로, 블레셋 땅 가드로, 아둘람 굴로, 모압으로, 헤렛으로, 엔디게 동굴로, 바란 광야로 돌며 무려 15년 동안 긴 도피 생활을 한다. 사울 왕이 죽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낼 수 있었는데 감사한 것은 그 도피생활을 하나님이 줄곧 도우셨다는 것이다. 놉,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다윗이 급히 달아났던 곳은 놉이었다. 당시 사울 왕국의 수도 기브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다윗은 엘리 가문을 잇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다윗 일행은 먹을 것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에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렸다가 내온 진설병밖에 없다고 한다. 성소의 상 위에 차려 놓는 열두 덩이의 떡,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물이라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다(레24:9). 그런데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소년들의 곤궁한 처지를 보며 이 원칙을 무시하고 소년들이 성적인
다른 교단의 교회가 우리 예배당에서 5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건물을 짓고 옮겨 왔다. 좀 심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여기며 마찰이나 분쟁은 피했다. 그런데 그 예배당 마당엔 낮이면 아이들이 몇 명씩 수시로 방문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해온 우리로서는 큰 관심거리였다. 전에 우리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가졌다. 어느 아파트 놀이터에서 4학년 여자애 2명에게 초청장을 주면서 경북 청도에 있는 새마을 운동 발상지를 구경시켜준다는 얘기까지 했다. 거기엔 P대통령이 장관들과 함께 탔던 열차가 있는데 누구든지 타볼 수 있다고 했더니 느닷없이 격렬하게 대꾸했다. “P대통령 나쁜 사람이잖아요. 독재자이고 친일파이지요. 우린 거기 가지 않을래요.”하고는 다른 곳으로 훌쩍 가버렸다. 예전에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면 수십 명씩 참석하던 아이들과는 너무나 달랐고, 지금의 아이들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웃 교회에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방문케 하는 비책이 뭔지 몹시 궁금했다. 그것은 교회당 마당 한 쪽 구석에 줄로 매어놓고 키우는 ‘시베리안 허스키’
결혼은 평생의 약속이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19:6). 하지만 구약(신24:1~4)은 이혼에 관한 말씀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발생 되는 일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지 못하여 인생이 저지르기 쉬운 죄에 대하여 그 부족한 부분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명기 24:1~4의 말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아내(여자)의 부정에 대한 말씀은 있는데 동등한 관계로써의 남편(남자)이 부정을 행하는 경우에 대해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의 부정에 대하여 아내의 고통은 묵과하라는 것이냐고 하면 거기에 대한 말씀이 없기에 일단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좋겠다. 그러나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다는 것이고, 남편이 머리고 아내가 몸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이혼과 재혼이 허용되는지에 관한 논란은 주로 마태복음 5장 32절과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씀에 대한 다수의 성경 학자들의 해석은 ‘약혼’ 기간의 ‘음행’을 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복음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사회의 문화의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인 간의 합리적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의 길–에 대한 반동이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를 부정하며 해체 주의, 탈구조·탈중심주의, 다의성·상대성, 탈인간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주어지는 중생의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기에, 이 시대의 정신과 삶을 주도해야 하며, 미래교회와 신학을 책임져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 과학적 검증을 받지 않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초월 성과 성경의 절대 권위를 선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영성의 회복을 강조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의 전통과 유산을 공유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올바른 복음주의 신학과 운동을 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는 신학자, 목회자의 거듭남과 영적 갱신이 우선돼야 한다. 공공성과 신학적 책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공적 진리의 타당성을 보여 줘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문제이며, 공적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공여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만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상징적 언어 또는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가 “나는 문이다”(요10:9)라고 선언할 때, 영생과 구원의 문이 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선언하실 때문이라는 물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본질이 변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문의 밑에, 함께, 또는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체험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선언에도 문은 문으로 남아 있지만 단지 그리스도가 문맥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처럼 예수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매개체를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 작용한다. 동일하게 주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의 기념설에 의하면,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징체의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은 과거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념
불교의 교리 중에는 살생을 금하고 있다. 살생은 사람의 생명을 죽여서는 물론 안 되고 또 모든 것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심지어 오락형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들은 차라리 동물을 죽여서 얻게 되는 고기 먹기를 금하고 채식을 주로 한다. 그러나 식물에도 생명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순된 교리 아닌가? 물론 무의미하게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이런 종교의 교리에 한계가 있다. 성경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없고 살인하지 말라는 있으니 이것이 타 종교와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일 것이다. 여하튼 불교지도자들인 중들은 고기 먹기를 금한다. 그런데 혹 어떤 중이 생선회를 즐겨 먹는다 해도 남이 보는 데서 바다낚시를 하지는 않는다. 나는 중이 사냥하거나 낚시질하는 것을 평생에 한 번도 본 바가 없다. 생선회는 먹어도 낚시질을 하지 않는 중의 양심과 태도에서 나는 이런 교훈을 취한다. 속담에 눈치 빠른 사람은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살생을 금지하는 절간에도 새우젓 숨겨두고 먹는 모양이다. 그들 나름대로 덕을 세우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것을 성경은 덕을 세우라고 했다. 소위 건덕(建德)이니 “모든 것이 내게 가하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그물망은 날로 더 촘촘해지는데 든든하면 건강하게 살지만 끊어지면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본문에는 든든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어왕다’(어차피 왕이될 다윗)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엉킨 그물망 다윗은 단 한 번도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출마한 적도 없다. 졸지에 기름 부음을 받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이라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도 영웅 되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심부름 갔다가 열받아 나섰는데 얼떨결에 영웅이 된 것,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국민들은 영웅 대접하는데 사울 왕은 자기를 대적자로 여긴다. 사울 왕과의 그물망이 걷잡을 수 없이 엉킨다. 여인들이 부른 노래 때문에 큰일했다고, 잘했다고 칭찬하던 사울 왕이 돌변한다.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불같은 질투심으로 그날부터 아예 죽이려 한다. 벽에 박아 버리겠다고 창을 던진다(18:11). 18장 10절에 보니 ‘그 이튿날’이라 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어제 그렇게 좋아하던 왕이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