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왜 그리도 내 앞에서 눈물 보이는 성도가 많은지 모르겠다. 최근 몇 주간, 전화 또는 대면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그 소중한 눈물을 여과 없이 흘려 보이셨다. 이에 그 눈물들의 결을 따라 내 눈물도 함께 흘렸다. 그렇다면 대체 그 의미는 뭘까? 문득 내 지난 과거의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한 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날짜는 6월 6일 현충일. 그날은 고등부 야외예배가 있던 날, 난 총무로서 그 행사의 기획과 진행을 다 도맡았다. 게다가 다음날 7일은 시험까지 있어 5일 밤은 공부하느라 완전히 꼬박 새웠다. 그래서인지 행사를 끝내고 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청학동 집으로 오는 길은 완전히 녹초 그 자체. 그러더니 갑자기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처음엔 대수롭잖게 여겼지만, 곧 쌍코피로까지 심각해지자, 손수건으로 겨우 틀어막으며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난 정류장에 내렸고, 쏜살같이 집을 향해 달렸다. 대문 앞에 도착해서는 초인종을 있는대로 누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놀라 뛰어나온 어머니. 그렇게 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중에 깨어보니 부산 침례병원 응급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져
V. 본문 설명을 위한 기술 알렌 박사는 본문 설명 방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본문 주해만으로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며 자신들의 본문 설명이 약한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본문 주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주해(본문 설명)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연구 후에 습득된 연구 자료를 설득력 있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본문을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효과적인 본문 설명을 위해서 다음의 열 가지 기술(수사적 질문, 정의, 비교·대조, 분석, 시청각 설명, 논증, 재진술, 인용, 스토리텔링, 실물 설명)을 제안한다. 본문의 내용과 청중의 상황 등을 고려해 아래의 기술들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1. 수사적 질문 수사적 기술은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설득하는 기술이다. 수사적 질문은 청중에게 질문함으로써 설교자가 말하려는 부분에 대해 청중이 직접 생각하게 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담화에 초대하도록 한다. 따라서 수사적 질문은 설교자가 본문에서 설명하는 주제에 대하여 청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 2. 정의 정의는 단어 의미의 “한계”를 정
“사흘 굶어 도적질 안할 사람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우선 먹어야 산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먹는다.” 등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 많다. 무얼 먹느냐? 왜 먹나? 언제 먹는가? 얼마나 먹고 어떻게 먹는가? 입으로 먹는 음식에서 인생살이에 먹는다는 뜻은 함축적인 뉘앙스를 의미한다. 탐식 호식 걸식이 있는가 하면 금식 절식 단식 등이 있다. 많이 먹어 배불러 죽는가 하면 못 먹어 배고파 굶어 죽는다. 먹는 음식은 죽고 사는 것과 우선적 관계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원수 마귀의 세 가지 시험 중에 첫 번째가 먹는 시험으로 원초적인 시험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도 인생이 겪는 근본적인 유혹의 시험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서나 수십 년 신앙생활과 특히 지금까지 55년 목회현장에서 겪은 식욕의 시험은 헤아릴 수 없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유혹한 첫 번째 시험은 빵에서 돈과 재물, 물질과 재정의 소유욕 시험으로 연결된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금단의 열매 선악과로 유혹하여 범죄케 한 경험으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에게도 똑같은 먹는 것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이다. 그런데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대체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많은 책을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쓸모 있는 책, 좋은 책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은 ‘많이, 그리고 골고루’ 읽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독(多讀)의 비효율성은 다독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단언할 만큼 많은 책을 읽어본 사람만 주장할 수 있다.” 임사라 저(著) ‘내 아이를 책의 바다로 이끄는 법’(비룡소, 2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에머슨은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쓸모 있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진리는 책에도 적용됩니다.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결국 많은 책을 읽어봐야 압니다. 5세기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협이 쓴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동양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문학이론서입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초년 시절 ‘문심조룡’을 자신의 문학 수원지(水源池)라고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심조룡에는 독서에 대한 좋은 권면이 있습니다.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어느 신앙 월간지에서 헨리 그루버의 ‘세상을 걷는 중보 기도자’라고 하는 글에서 “현 미국을 이끌어 가는 70대, 그들은 성장시기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남겨진 곡식을 거두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한 돈으로 용돈을 벌었던 이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다”며, “그때에는 곳곳마다 부흥회가 열렸고 성령이 부어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안타까운 하소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10여 년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신앙인들로 인해 마음 아파했던 생각이 났다. 그런 와중에도 근근하게 신앙을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는 노년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킨다면 기근의 때의 어려움은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킨다면 재앙이 축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루버는 역전의 하나님을 소개한다. 영적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남발하면서 나라를 비판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로 교회를 손가락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의 꿈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다. 열왕기상 3장 9절에 보면 그때 솔로몬은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구했다. 그의 이런 간구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지혜와 총명뿐만이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고 하셨다. 솔로몬의 간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성경은 여러 면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해준다. 신명기 32장 4절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모세는 노래했다. 시편 33장 5절엔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하시는 것에는, 뜻과 일하심에는, 세계를 판단하고 심판하심에는 반드시 공의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도 공의가 있길 원하시는데 특히 재판관들에게 더욱 그렇다. 레위기 19장 15절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어릴 적부터 재미있게 보아왔던 미국의 인기 있는 가족 시트콤의 주인공이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의 가해자로 떠오르면서 사회 곳곳에서 숨겨져 왔던 성폭력의 실태들이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문단, 연극계, 연예계뿐만이 아니라 교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고발되고 있다. 사회의 저명인사들에게 당했던 성폭력 희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성폭력의 대상이 됐던 아픔을 평생 지우려 애쓰면서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던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차원의 피해를 입을까 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던 그들이 일어나고 있다.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상담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이 있다. 남성들이 겪은 성폭력의 실태도 만만치 않다. 심리검사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들을 찾는 것이 드물 정도로 심각하다. 이 여성들에게 있어 골목에서 튀어나온 바바리맨이나 숨을 못 쉬도록 승객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어디선가 자신을 더듬는 손처럼 자잘한 사건들은 충격적이고 부정적인
해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연차총회 시에 발간되는 의사자료집에는 <총회규약>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셨고 친히 머리가 되시며 그 입법자이다. 2. 교회의 교리와 생활에 대한 유일하고 권위 있는 표준은 성경뿐이다. 3.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서 상징적 기념일뿐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4.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서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다. 5. 교회의 정체는 민주정치로서 행정만 할뿐 입법은 하지 않는다. 6. 교회의 회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7. 교회 회원의 의무는 신앙고백으로 침례를 받고 신약성서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8. 모든 교회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이나 복음전도 사업은 협동한다. 9. 교회와 국가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 10.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또한 최근 3~4년 전까지 침례신학대학교 교직원용 수첩이 발간되었는데, “우리 대학교의 신앙과 주장”이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이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1. 성경 :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령을 받아 모신 우리의 지상과업인 예수님의 지상명령, 최후명령이자 최상의 분부인 유언의 말씀은 가장 긴급한 일이다. 이는 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고 온 세상을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구령!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사56:9~10)라고 질타했다. 교회와 각 개인의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광대의 소리로 들어선 결코 안 된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나 불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을 구원해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1:39) 그리고 안드레는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1:41)하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오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요1:42)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 하여
“책을 읽는다고 하자. 책의 저자(著者)는 독자에게 있어서는 타자(他者)이다. 타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 즉 ‘다름’의 세계이다. 타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아니면 일부 수용하게 된다. 독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길러간다. 독서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 타자와의 그 치열한 생각의 전투를 통해 독자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3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독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줍니다. 독서를 하는 중에 저자(= 타자, 他者)의 주장이 너무나 강력하고 감동적이어서 나에게 전적으로 수용되면 카프카가 말하듯이 책은 ‘도끼’ 가 되고, 니체의 표현에 의하면 ‘망치’가 되어 나를 깨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줍니다. 도끼와 망치 같은 책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듯 독서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쪼개고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해 줍니다.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 상상력을 주고 창의력을 주고, 수많은 대리 경험을 하게 합니다. 세종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2가지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첫째,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가면 사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처럼 걸인으로 살아도 천국에 간다면 그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 벌거벗고 태어나도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노숙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빌 게이츠처럼 수십조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에서도 큰 자가 있고 또한 작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모든 비결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데 있다고 하시니 어린아이에 관한 연구는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아주 먼 옛날,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반에
나와 아내 그리고 둘째 딸, 이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큰 딸과 헤어진 뒤 30분은 족히 그랬던 것 같다. 난 그저 앞만 보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향해 운전만 할 뿐이었고, 아내와 둘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창밖 경치만 구경할 뿐이었다. 물론 이는 지난 두주간의 반가운 가족 해후(邂逅)에 깊은 정이 들어서이다.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저 재밌게만 떠들며 지내다 갑자기 또 가족 중 하나를 타국에 홀로 두고 와야 하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이별의 아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이다. 게다가 갑자기 자기만 남겨둔 채 세 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보내야 하는 처지가 너무 황망하여 참았던 울음보를 그냥 터뜨리고야만 큰 딸의 역력한 허전함도 매몰차게 두고 와야 했음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다. 물론 “뭘 그 정도 이별 가지고 그러시나, 더 큰 이별의 아픔도 있는데….”라 여기실 분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쉽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어느 가족이든 타인이 알 수 없는 그 가족만의 역동과 말 못할 사연이 다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두 가지 생각이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들었다. 첫째, 그럼에
4. 본문의 신학 메시지 설명 신학적 고찰로 얻는 메시지를 통하여 풍성하고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성경 저자는 본문에 신학적 메시지를 담는다. 설교자는 본문에 등장하는 신학적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연구하므로 청중들에게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다. 특히 깊이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는 세 가지 영역(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에서 연구하고 설명할 수 있다. 1) 성경신학 성경신학은 성경자료를 중심으로 본문 안에 있는 신학적 이슈를 연구하는 신학 방법이다. 먼저 주해자는 본문 연구 중 발견된 신학적 이슈를 그 본문이 속한 책의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본다. 가령, 빌립보서 본문을 연구한다면 빌립보서 전체의 신학적 입장과 선택된 본문에서 등장하는 신학적 이슈의 연관성을 살펴본다. 성경신학은 신약신학과 구약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신약신학은 신약의 27권 안에서 강해자가 선택한 신약본문에서 발견된 신학적 이슈에 대하여 비교 및 대조해 메시지를 연구하므로 일치성과 다른 점을 연구하는 신학 방법이다. 또한 구약신학은 구약성경에서 강해자가 39권의 구약성경에서 발견한 신학적 이슈를 다른 본문과 비교 및 대조하여 연관성과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남침례교인들이 신앙고백을 채택했을 때, 그 신앙고백이 인간의 양심을 구속할 수도 있는 신조로 잘못 사용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내용을 그 서문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1925년판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에 표기된 서문이 1963년판과 2000년판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1) 신앙고백은 크든 작든 어떤 침례교 단체 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가운데 확실하게 공유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항목들에 관하여 우리 교단의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인도하기 위해서 작성되었다. 그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 즉 신약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단순한 조건들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첨가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2) 우리는 신앙고백을 우리의 믿음에 관한 완전한 진술로 여기지 않으며, 최종성이나 무오류성을 갖는다고도 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하겠지만, 어느 때라도 지혜롭거나 편리하다고 여겨진다면,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진술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 (3) 크든 작든 어떤 그룹의 침례교인들이라도,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길 때마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욕심에 끌려 미혹”(약1:14)되는 모든 사람임을 감지한 원수 마귀는 예수님께도 도전하여 시험했으나(마4:1~10) 물리쳐 이기셨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4:13) 얼마동안 떠나갔던 원수 사단은 공생애 3년 동안 쉼 없이 유혹하고 시험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역공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구속의 마지막 사역을 말씀하였을 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첫 번 시험은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라는 것이었으나 기록된 말씀(신8:3)으로 물리치자, 악마는 두 번째 시험으로 성전 꼭대기에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