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5월에 상가 2층(30평)에서 개척했습니다. 교회는 언덕 비탈길 밑에 있었고 저희 사택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예배를 갈 때면 언덕 위에서 교회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단잠을 자고 있을 수많은 세대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다 우리 아버지 땅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때가 되면 교회를 주실 거야.’ 하며 교회에 가곤 했습니다.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는 것이 꿈이듯이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살던 저로서도 교회 건물을 가진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1998년 IMF 때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실업자들은 속출하고, 부동산들은 거의 매매되지 않았으며 많은 매물들이 헐값으로 나왔습니다. 이때, 교회 건물이 하나가 나왔습니다. 대지, 건물 전체가 690평으로 좌석은 500석의 규모였습니다. 그 교회는 확장 이전 관계로 기존에 있던 건물을 팔아 새 성전 건축에 사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줄다리기 흥정 끝에 5억에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 런데 계약금 5000만 원 중 3500만 원밖에 없었고, 결국 하루 만에 성도들이 물심양면으로 돈을 모아 다음날 계약금 5000만 원
“목사님, 요즘 캠퍼스에서 2030세대에게 가장 유행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캠퍼스에서 매주 성경공부 미팅을 지난 1년 동안 해 섬겨온 한 형제가 물어왔다. ‘트렌드 코리아’가 발표한 최근 리포트에 따르면, “욜로(YOLO)”(2017)와 “소학행”(2018)이라는 화두가 요즘 2030세대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약자인데, “너의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리석게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저당 잡히는 선택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시대 범람하는 욜로족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국가의 미래에 대한 일체의 이타적 꿈이나 비전을 접고 산다. 오직 개인적 차원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 다만 오늘을 즐기라)하라는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 2018년 유행 화두인 “소확행”(小確幸)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의 약자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 한스 섬의 오후’(1985)에 나온 말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득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을 의
“침례교회는 실천신학이 강하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론신학이 약하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는 말일까? 신학적 논쟁보다는 실제 상황과 현장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역량이 뛰어나다는 의미일까? 과연 침례교회는 실천적인가? 실천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침례교회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큰 틀에서 기독교 신앙은 실천적 특성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신앙과 실천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고,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실천은 타당성과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을 부여받지 못하며, 실천 없는 신앙은 관념적이고 무기력하며 그 진정성에 손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지난 33년 동안 침례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실천신학을 연구하며 학생들에게 강의를 통해 그리고 교회사역을 통해 봉사해 왔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침례교회를 실천신학적으로 평가해보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전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실천신학의 의미와 사명에 대해 개괄하고 나서 그에 비추어 본 한국침례교의 실천신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이어 몇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신문 연재이기 때문에 각주가 생략된 점 독자 제위께 이해를 구한다
1950년도를 전후해서 시골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상거래보다 더 신명나는 구경거리는 품바들의 공연(?)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며칠 동안 씻지 못한 얼굴들, 일 년 지나도 이발 못 해 부득불 장발된 두발 등 그들의 몰골은 그대로 꾸미지 않은 거지였다. 한 가족 4~5명으로 된 품바그룹도 있고 영 딴판 남남이 짝을 이룬 품바그룹도 있다. 이들이 국밥집이나 과자 파는 상점 앞에 나타나서 각설이 타령을 한다. 이상한 몸짓도 하고 요상한 소리도 한다. 짐짓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생김새가 꾸밈없듯이 그들의 그런 공연도 꾸밈이 없다. 단지 그들의 소원은 과자 몇 개를 얻는 것이나 잔돈 한 푼 얻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계가 걸린 거리의 공연이었다. 그 주변에 장꾼들이 모여들고 인심 좋은 상점 주인은 넉넉하게 동냥을 하는데, 이때 품바들은 어김없이 앙코르 공연을 한다. 의리가 있고 명예에 사는 그들인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모습을 십대 소년시절에 매장마다 보고 살았다. 그런데 엊그저께 TV를 틀고 나니까 신세대 품바그룹이 공연을 하는 것을 시청했다. 말하자면 50년대에 있었던 품바들을 모방(模倣)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 출연한 그 청년들을 TV가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불룩한 큰 자루를 들고 내 앞에 와서 내용물을 쏟아 붓고 사라졌다. 여러 가지 종이돈이 쌓였는데 그중에 외국돈으로 보이는 은행에서 바로 나온 뭉칫돈이 있어 하나씩 집어 상의 안쪽 주머니 좌우에 둘씩 넣으니 양복 두 가슴이 불룩하게 튀어나와서 나머지 흩어진 돈들은 그냥 두고 평생 처음으로 현금 뭉치로 주머니를 채운 기분에 좋아 눈을 뜨니 창살이 환히 밝아온 이른 아침이었다. 특히 목회 초년시절에 교인들이 꿈꾸고 와서 해몽을 가끔 요청할 때 꿈 해몽에 대한 얘기를 부친께도 어려서부터 들었고 특히 대학교 시절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해몽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서 해몽을 설명해 주기도 했었다. 전번 대통령 선거날 아침 꿈을 꾸고 잠을 깨니 새벽 4시였다. 먼저 끝이 좋으려면 돈조심하라고 충고했던 대통령 후보가 파란 옷을 입고 내 앞까지 왔다가 뒤돌아보더니 정면으로 사라져서 아마도 일바지를 입었으니 부지런히 일 할거라 생각했으나 그 후 다시 생각하니 푸른 옷은 죄수복이란? 이거 안됐구나 생각이 나서 가까운 친구들 10여명에겐 이번 당선자도 부모따라 갈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었으니! 돈다발 꿈을 생각하니 이것이 실몽인가? 허몽인가?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며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신에게 너는 무엇을 위해 사니? 라고 질문해 보고 그 질문에 답을 해 보자. 나는 무엇을 위해 산다고 대답 할 것 같은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 할지 모른다. 회사를 위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남을 위해 일하는 의사 변호사 교사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부와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돼야 한다고 말씀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좋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생각도 가치관도 삶의 목적도 일반인들과 다르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는 목적이 하나님영광이 되어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런즉 너희가 먹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있는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인 존재성과 그의 공생애 사역의 결과를 요약적으로 기술했다. 요한은 특히 이 부분에서 로고스의 성육신이라는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묘사한다. 로고스(말씀)가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신비함을 나타낸다. 이 구절의 말씀을 토대로 요한이 제시하는 성육신의 신학과 독생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요한의 교훈을 알아본다. 요한은 로고스 찬양시의 절정에 해당하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말씀이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역사적 삶의 현장에 들어오신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성육신과 관련해 이
“책들이 책상 위에 있다.”(The Books are on the desk)는 위 짧은 문장에 만일 ‘on’이란 간단한 전치사 하나를 빼버리면 문장은 이상하게 변한다. 가령 “The books are ( ) the desk”이면 “책들은 책상이다.”가 되어버린다. ‘책들≠책상’이 ‘책들=책상’이 된다. 왜 이렇게 엉뚱한 문장이 되었는가? 책들이 책이지 왜 책상이 되는가? 이런 터무니없는 변화는 ‘on’이란 전치사 하나가 빠져버린 때문이다. 이 짧은 영문에 ‘on’이란 전치사는 문장의 의미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그까짓 전치사 ‘on’ 하나 떼어버리자고 하면 그땐 문장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사람들이 율법의 한 획 정도야 지키지 아니해도 율법체계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10가지 율법 중에 9가지 율법을 잘 지켰으니 한 가지 율법은 지키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곧 한 가지 율법은 범해도 나머지 9가지 율법은 지켰으니 율법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마치 ‘on’이란 전치사 하나 빼버리기로 문장 의미가 달라지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그게 하나 빠지면 그 문장은 완전히 죽어버린다. “네 부
토요일만 되면 우리가 살던 울릉도는 주사골 동리에 올라와 노란종이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들 3,4학년이 같이 모여 놀이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노란 종이를 나눠주고 떠났다. 친구들은 예수쟁이가 우리 동네까지 와서 선전종이를 뿌린다고 욕하고 받은 종이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또 코를 풀거나 그것을 모아서 뺀또(종이치기)를 만들기도 했다. 언젠가 배석문 담임선생이 “요사이 서양종교인 야소교가 설치니 조심하고 멀리하라”고 하셨기에, 친구들과 불교신자인 나도 5학년인 한상태를 따라서 “예수를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큰 소리로 복창하며 예수쟁이를 따라가며 놀려댔으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지나갔다. 한번은 공짜로 이발해주는 곳에 가자고 해서 옆 동네인 중간 모시게까지 따라 갔더니 그 노란종이 나눠주는 그 사람이 아닌가! 나는 뒷줄로 섰다가 도망칠까 했더니 친구들의 눈짓 만류로 길가에 고개 숙인 채 이발을 하고 부끄러워 인사도 못하고 도망쳐 왔는데, 나중에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나가면서 더욱 그 노란종이를 나눠주던 이웃교회 집사에게 미안했고 지금까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어려서는 부친이 믿는 유교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지난 2017년 12월 침신대학보에 “다양한 창조론”이란 글을 보고 놀라움과 함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학과 3학년이라고 소개한 글의 저자는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는 창조론은 진리이고,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신학교 강의 중에 교양필수인 ‘자연과학이해’를 통해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다”며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성경창조이론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을 나열하며 왜 신학교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성서와 과학과의 관계에 다양한 창조과학에 대한 해석”이 있으니 “"공평하게, 각자 신앙에 따라 다양한 창조이론을 탐구하며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고 성경의 창조론을 믿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획일적인 것을 주장하지 말고 다양함을 인정하자는 다원주의로 불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가득한 것이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모든 과목의 근본적 교과서는 성경이다. 성경을 제외하고 어떤 학문이나 과목이 있을 수는 없다. 물론 비교종교나 수많은 이론을 통해 토론하고 고심하고 고뇌해야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성경이 돼야 한다. 얼마 전 대형교회에서 목회하시는 한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신조어(新造語)나 약어(略語)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이런 단어들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뜻을 알기 어렵지만 서로들 소통하며 사용하고 있다. 이미 교회에서 사용했었던 단어들을 몇 개 다시 꺼내어본다. 말포자 : 말씀 읽기를 포기한 사람 진포자 : 진리를 포기한 사람 인포자 : 인생을 포기한 사람 천포자 : 천국 가기를 포기한 사람 ‘말포자’는 진포자가 되기 쉽고 진포자는 인생을 포기한 자이거나 천국을 포기한 자가 되기 쉽다는 의미에서 한 때 사용했던 약어들이다. ‘행포자’란 단어도 있는데 국어사전에선 난폭한 행위를 하는 자를 가리키지만 교인들 중에선 하나님 말씀 행하기를 포기한 자란 약어로도 쓴다.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는데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행포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육신이 되어 오셨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또,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제자들이 잡수실 것을 갖다드렸더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
영어에서 “cutting off your nose to spite your face”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얼굴에 앙심을 품어서, 혹은 괴롭히려고, 자신의 코를 벤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스스로만 괴롭히고 만다는 뜻의 숙어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얼굴이 맘에 안 들어 코를 베어내려 할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무심코 수없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늘 부부싸움을 하는 부모님이 미워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이 못마땅해서 계속 술로 푼다면 이 또한 자신만 상처 내는 행위이다.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아예 예배를 안 드릴 수도 있다. 결국에는 누군가 때문에 ‘시험 들어서’ 혹은 ‘삐쳐서’ 주님께 마땅히 드릴 찬양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할 둘도 없이 귀한 기회를 포기한다.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이다. 우리는 때로 정말 참기 어려운 감정에 휘말린다. 너무 화가 나거나 상처를 받아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살다 보니 열받을 일이 많다. 분명히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온 사
생명(生命)은 살아있어서 사명을 지녔다는 의미다. 생(生)은 명(命)을 가지고 있다. 생이 명을 잃으면 그땐 생도 잃는다. 명이 있는 한 생은 유지하게 된다. 생은 사(死)의 반대 개념으로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다. 밝고 명랑하고 화창한 게 生命 곧 살아있음이요 살아있음엔 의미가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 3월 거리를 걷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작은 돌로 포장된 거리의 그 틈 사이로 겨울 찬 공기를 맞으면서 이름 모를 잡초가 고개를 들고 있지 않나. 독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귀국해서 한국 구리시의 인도도 그러했다. 生이 있으며 어찌하든 움직인다. 상승한다. 퍼진다. 미초의 생명 지키기도 성스럽다 할 것 같다. “행복 생활의 지침”이란 잡지에서 서울 의대 채종일 명예교수가 발표한 ‘기생충들의 흥미로운 생활상’이란 글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은 바 있다. “회충이 가족계획을 한다”는 설명이었다. 회충은 자기가 붙어살아야 할 주인이 필요하다. 자기가 기거해야 할 숙주(宿主)가 있어야 한다. 그 숙주가 없으면 회충은 붙어 살 공간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놈의 회충의 번식이 기하급수적으로 속도를 내게 되면 회충이 포화상태로 사람을 정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일 설교 준비와 침례교전국사모회의 설교준비도 마치고 모처럼 뒷산을 올랐다. 작년에도 한번 만나 인사한 공 목사님과 한 시간 넘게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통합측 교단의 목사로 은퇴하고 2년 후에 마지막 때의 사명으로 이스라엘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동안 여유있는 직장에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공부도 새롭게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젊어서 목회할 때 두 번의 입신의 체험을 했는데, 그 놀라운 경험은 완전한 변화의 계기가 됐으며 찬란한 천상세계와 지옥의 참경험은 정반대의 경험으로 주님 앞에 신실하고 충성스런 목회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나의 십자가의 은총과 서울교회 목회 중 참담했던 유치원 화재로 욥이 겪은 원수 악마의 혹독한 시련과 같은 환란을 극복한 “주님의 합력선”의 역사를 듣고 공감하면서 그도 아래와 같이 간증했다. 그가 2000여명의 교회에서 목회할 때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역했는데 장로 피택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다. 그 장로 후보자는 많은 친족이 있었고 교회와 다른 장로들에게도 영향력 있는 자로 결국 장로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된 상태였다. 그가 장로 장립을 허락하면서 대신 목사인 그가
최근 섬기던 한 형제에게 직장과 학교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 형제는 약학과 졸업 후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박사학위과정을 병행하던 학생이었다. 그는 작년 이맘 때 심각한 분위기로 내게 상담을 요청해 왔다. 그동안 직장과 박사과정에서 하는 연구가 연결되어 있어서 좋았고,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진척된 상황인데 고민거리가 생겼다고 했다. 제약회사는 외부 거래처와 어떤 계약을 맺으면서 가끔씩 비즈니스를 할 때가 있는데, 그 실무를 맡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그대로 임무를 수행하면 직장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자기 박사과정도 문제없이 곧 마무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심에 가책이 일어나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결혼 주례를 섰고, 성경공부도 여러 과정을 함께 한 형제이었지만, 이미 아내와 자녀가 있는 형제에게 나는 곧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다만 상담 중 문득 떠올린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함께 읽으며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몇 일후 연락이 왔다. “목사님, 제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회사는 나중에 또 새로 다닐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