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남편들의 탈선외도에 대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현상이 있다고 어떤 성(性)전문 강사가 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강사는 탈선자의 개인적인 이유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남성의 탈선외도에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그 강사의 요지를 대강 기억하기로는 남편 탈선의 이유로는 첫째로 남편의 외도가 본처에게 주는 상처의 끔찍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과 둘째로 본처만 알지 못하면 남편의 외도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묘한 문화 환경과 셋째로 본처로부터 떠밀림을 당하는 듯 남편의 인기가 없어지는 듯 느껴지는 남편의 감정과 넷째로 본처와의 침대 생활(Bed life)이 통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그럴 듯한 외도의 이유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보는 남편의 외도는 그 이유를 인간의 타락성 분위기에서 찾는다(롬1:24~27). 세상 사람들은 결혼의 영적인 의미를 알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접하지 아니한 그들이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영적 의미를 알겠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신부교회의 원초적 상징이다. 그리고 남편 간의 성교(Sexual action)는 두 인격결합의 최고 표현이며
“인사 서로 나눕시다. 나 황경찬 목사요.” “예, 저는 한명국 목사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목회하시오? 아침식사 나누면서 얘기나 합시다.” “저는 서울침례교회라고 충무로에 있습니다.” “나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서 목회를 하고 은퇴를 했지요. 나는 성결교단으로 치부동성결교회였지요.” “들어오실 때에 보니 포니차를 잘 운전하시던데 혹시 목사님은 여기 제주도에 사신가요?” “그래요. 은퇴하고 나니 누가 오라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한 때 총회장을 할 때는 초청도 많았는데…목사는 목장이 있어야지. 평생 양아치로 살았고 양젖을 먹고 살았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니 견딜 수가 없어. 작년에 나이 80에 이곳 멀리 제주도에 와서 개척했는데 2년이 지나니 지하교회이지만 40명의 교인으로 늘어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목사님 대단하시고 존경합니다. 어느 누가 80세에 개척교회 꿈도 꾸겠어요. 죽도록 충성해야지요. 오늘 저는 80세에 부름받은 모세처럼 목사님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제2의 소명으로 목사님을 따를 용기가 생기네요.” 때는 1987년 목회현장의 긴장도 풀고 또 추수감사절에 있는 제2회 “예수잔치” 준비기도를 위해 멀리 제주도 기도원에서 만났던 황경찬 목사님은 1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나 한 사람보다는 옆에 누군가를 붙여서 함께 일하신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모세에게는 아론을, 다니엘에게는 세 친구들을, 베드로에게는 요한과 야고보가, 그리고 바울에게는 실라, 바나바 외에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함께 하여 더 아름답고 큰 일을 이뤘음을 볼 수 있다. 목회를 하면서도 좋은 멘토와 친구를 만나고, 좋은 교우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역을 하며 함께 하나님을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옆 가까이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동역자도 어느 땐 한 몸처럼 가깝다가도 조그만한 일로도 원수가 되기도 한다. 또 여러 가지 일로 떨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 함께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목회를 하며 부족한 것이 투성이인 모습으로 사역을 혼자는 다 할 수 없음에, “동역자를 붙여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마음속에 소리가 들렸다. “네 옆에 있지 않느냐?” 눈을 들어 몇 몇의 얼굴과 이름들을 떠올렸다. 딱히 확신이 안 생겼다. 지나고 나면 그래도 돕는 자라고 생각했던
부산 보수동 어느 헌책방에는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글귀가 벽에 붙어있다. 주인에게 어떤 책이 더욱 그렇느냐고 물어봤더니 당연히 성경이라고 대답을 해줬다. 전에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성경의 위대함을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전광 목사라는 이가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를 두고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존 워너메이커는 일생동안 성경을 사랑했으며, 체신부 장관이 되어 인터뷰할 때에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린이 사역에 헌신하고 봉사했었고, 크리스천 기업가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YMCA건물을 지어주는 일을 했었는데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전했다. 나를 예수님과 교회로 인도해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대학 시절에 연설문에 잠시 관심을 가진 때가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모은 책을 발견하고 관심 있게 읽게 됐다. 그의 ‘사랑’이란 제목의 연설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전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요1:3) 그분을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들이
공부가 재미있거나 학교가 신나서 학교 가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가야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부가 재미있고 좋아서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학생은 스스로 공부하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되고 목표를 성취할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며 더욱 재미있게 공부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법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선생님의 강압이나 부모님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하는 학생은 같은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에 비해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은 불평하면서 하기 때문에 성과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고 성적이 안 나온다고 야단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생인 주안 주찬 형제가 방송에 나와서 놀라운 암산 실력을 보여 주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 주찬이는 100만 단위의
카너도 멀린스와 같이 “하나님 편과 인간 편”의 전개 구조로 그의 중생관을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중생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중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오직 중생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아울러 카너는 중생을 가져오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제공한 구원의 선물을 인간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카너는 중생의 과정에서 인간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카너는 멀린스와 같은 중생관 전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인간 편의 능동성을 그보다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디는 에베소서 2장 8절에 근거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구조를 세운 후, 여기에 요한복음 1장 16절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연결시켰다. 즉 요한복음 1장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측면을 보여준 것이고, 로마서 1장 17절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측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무디는 요한이 구원을 위에서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에 나타난 기독론적 내용을 살펴봤다. 이제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 칭호가 사용된 구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는 인자 칭호가 13회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부각시킨다. 인자는 영원한 신성의 존재성을 가진 로고스가 신체를 가진 인간의 존재가 되어(1:14) 공생애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완결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활동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인자가 사용된 말씀들을 통해 요한의 인자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인자의 첫 번째 사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과정에서 두 번째 제자 집단과의 만남 사건에서 나온다(1:51). 그 사건은 빌립을 만나시고 제자로 초청하신 후에,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예수께 데려온 것으로 진행한다. 빌립의 전도를 듣고 자기에게 나온 나다나엘을 가리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
꼰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겪었던 거에 비하면 넌 힘든 것도 아니야.”“내가 해봤는데 그거 안되는 거야. 시간 낭비 하지마.”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텐 힘들었는데 넌 아닐 수 있어.”“나는 실패했지만 넌 성공할 수도 있는 일이지.” 꼰대는 “나도 그랬으니 너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선배는 “나는 그랬으나 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강주원 저(著)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비로소, 83~8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재’와 ‘꼰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썰렁 개그라도 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재’고,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꼰대’입니다. 스페인어 ‘꼰데(conde)’는 ‘백작’이라는 고귀한 의미이지만, 자기 반성이 없이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삶의 태도의 차이입니다. 늙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젊어도 꼰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 풍속을 잘 따라가지 못하지만 느린 몸과 마음으로 늘 반성하며 소통하려는 사람을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꼰대는 다릅니다. 몸과 마음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권정자 외 20인 공저(共著)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 1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때문에,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우리들의 할머니 스무 명이, 글과 그림을 배워 전시를 하고 책을 냈습니다. ‘순천의 소녀시대’라고 불리우는 할머니들은 막내가 50대 후반, 맏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데, 살아온 생을 모두 합하면 1600년이 넘습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전쟁 중 피란길에 죽은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었던 이야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멋있어 보여서 결혼했는데 짜장면 하나 사줄 돈이 없던 가난한 남편 이야기… 영어를 배울 때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헬로, 디져”라고 해 웃음 바다가 되고…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애환이 묻어 있고, 세월이 그리고 웃음과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동네 오빠에게 손목을 잡힌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한동네 사는 친
상담소를 찾은 C씨는 교회 갈 때마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보이는 한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고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하고는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섞으면서 유독 자신만은 경계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을 말없이 지나쳐가려 하길래 얄미운 마음에 일부러 길을 이리저리 막아 앞서 가지 못하게 했다나… 그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괜스레 내 흉을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겼다. 그 할머니가 신경이 쓰여 교회를 나가는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볼까 생각도 했다. 참다못해 한번은 작정하고 따져 묻기로 했다. 도대체 왜 자기를 싫어하냐고 대놓고 물어보겠다며 씩씩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정작 자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는 것인지조차 확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열은 받는데 뭐라고 따져야 할까? 얼마 전 ‘언니의 따끈따끈한 독설’이라는 짧은 강의를 유튜브에 연재하는 한 강사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중 한 강의의 주제는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 상대하는 법’이다. 언제나 칭찬받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은 비단 크리스
일전에 부산 어느 식당에서 H목사님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며 신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한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에겐 좀처럼 부작용이 없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병원에서 맞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아 갑자기 실신하였다고 했다. 그때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차례로 경험했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산에서 변형된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지만 그 목사님은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 있기를 원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알려주더란다. 그래서 깨어나보니 시간은 20여분 지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둘러서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더라는 것이었다. H목사님의 간증을 듣다보니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한 청년이 문득 기억됐다. 그는 총각으로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식사하러 간 우리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근히 접근해오길래 교회를 개척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알려줬다. 그 청년은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말한대로 자주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겐 심각한 심장병이 있었다. 지금은 심장과에서 혈관이 막힌 곳을 쉽게 뚫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힘든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언제든 바다에 나가면 여지없이 이름을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낚시에 고기들이 걸려 나온다. 그럴 때면 “TV에서는 큰 물고기도 많던데 왜 이렇게 작은 것 밖에 없느냐?”는 투정(?)의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리 섬이라도 연안의 갯벌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그 당시 미국에서 10여 년 넘게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따님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 생활하는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왜 미국이 좋은가 물은 질문에 첫 번째 대답이 “나라가 커서 좋아요”라는 말이었다. 삼천리 반도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52개 주 가운데 하나와 비슷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대한민국에서 자라 이곳에서 생활하던 것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큰 나라구나” 하는 것이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리며 “이 땅을 나의 손에 주시옵소서”라고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넓은 미국 땅에 살지만 마음마저 넓게 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면 “미국에 사니 미국 사람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한
나는 한국 순교사를 읽은 중 많은 위대하고 성스런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목사가 아닌 김윤섭 전도사의 순교와 초대교회 사도 요한의 신복제자로 폴리갑의 순교직전 대담을 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과 세계선교를 다니며 종말을 맞는 수많은 교회들과 훌륭한 목회자들을 만났지만 으뜸으로 늘 떠오른 두 성자의 최후를 추모해 본다. ‘순교사화집’을 읽고 감명이 깊었던 십자가 신앙의 선진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 전도사는 평안도 선천 태생으로 20세에 예수님을 믿고 평북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박천 덕인교회를 개척하고 의주 월하교회를 부흥시켰다. 또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그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결단과 다니엘 선지자처럼 입지불변(立志不變)의 전도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는 열 번이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저들은 그를 의자에 묶어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고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하여 신사 참배케 하고는 굴복했다고 시인을 강요했고, 갖가지 회유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결국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조건 하에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오자 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8회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
비록 부도덕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천국 갈 수 있으나 율법 폐기를 못 믿는 거룩한(?) 사람은 지옥행을 달린다. 여간 복음에 정통한 용기백배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런 표현을 토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발설자의 용기라 할 것까지 없다. 성경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위의 말을 더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덜 성화(聖化)된 사람이라도 천국 간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육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 집에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 아직도 단단한 밥을 못 먹고 젖만 먹는 어린아이 그리스도인. 이들도 천국은 자신있게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좀 덜 신령한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그런데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선행을 베푸는 자 같아도 율법 앞에서 율법 처리를 100% 정리 못 한 자는 지옥행자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너
포인세티아라는 화초가 있습니다. 이 화초의 꽃은 화려한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초입니다. 겨울에 피는 특성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인세티아가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캄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추운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불굴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아 감동적입니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깁니다. 심지어 이 화초는 비상구의 아주 희미한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됩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과 추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도 포인세티아와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아름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