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하루같이 살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가을을 맞는 10월의 첫날이라. 3:30분에 일어나니 2020년의 새해를 맞기 전, 남은 4개월을 잘 설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수님보다 50여년을 더 살아왔는데 무엇을 했는가? 송구스럽기 늘 짝이 없었지만 나의 여생이 짧아지니 천국소망을 바라는 좋은 새날이구나! “내일 일을너희가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안개니라”(약 4:14) 아브라함의 175세, 모세의 120세, 여호수아의 110년, 장수(60), 희수(70), 산수(80)을 지나 졸수(90)을 향해 사도요한같이 천수 곧 100세수를 누린다해도 17년 밖에 내겐 남지 않았으니 짧아진 여생을 어떻게 더욱더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며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이하) 명령하신 말씀 따라 선한 청지기의 새로운 결단과 도전을 위해 매진할 것을 각오해 본다. 요단강 건너 천국입성시에 나의 주 예수님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나 자신만의 준비되어 충성된 삶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는 교회의 어린 양무리들, 대부분 중국에서 한국
또한 한 환자는 원장에게 자신의 빈한함을 호소했고, 원장은 또 한 번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립니다. “직원들이 퇴근 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 두겠소.” 어떤 가난한 여인에게는 아예 탈출을 사주하기도 합니다.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짤막하게 기도를 드린 뒤, 장기려는 눈을 빛내며 말했던 것입니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을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도와야겠다는 책임감을 잃어버린 날이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한 것이고,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에 침투한 맘몬신을 일생 내내 혐오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예배당이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으로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비둘기파는 자들을 징치한 예수님처럼, 그는 이 말로 우리들 마음속에 활개치는 탐욕의 멱살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배부른 제사장들, 종교 귀족들, 개 교회에서 로마황제처럼 군림하는
“자포자기”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자기가 할일은 포기하고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기분 내는 것” 그것이 자포자기입니다. 인도의 민담입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배 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어서 강을 건너고,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그는 초능력자일까요? 아니면 질서 파괴자일까요? 아니 그보다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영광 받으실 때는, 강을 걸어서 건너고, 하늘을 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며 살았을 때입니다. 아무리 신발이 예뻐도 발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신앙의 선조들과 음성으로 말씀하셨는가?” 높고 높으신 신이요,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비천한 인간들과 대화하셨는가? 구약성경에서 아담, 노아,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 제사장, 다윗 같은 왕들과도 제사나 기도에 음성으로 응답하셨는가? 신앙의 연조가 들수록 이상하고 의아하게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에게도 중요한 시점에 말씀을 주셨다. 1974년 말 긴급조치 하에 8개월 옥고에서 나오니 도저히 지역사회에선 평판이 나빠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라는 말씀으로 기도에 응답해 줬다. 1975년 8월 한 달간 기도와 금식기도를 하고 시내를 뒤지며 새로운 목회지를 찾다가 가까운 안락동으로 정하고 전세금을 신문지에 싸들고 버스를 타고 이사벨여고를 지나서 동래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들리던 도로 위의 차와 버스속의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너무 조용하고 두려운 정막 가운데 “너는 내려서 사직동을 둘러보고 결정하라!”는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이 음성은 매우 똑똑하면서도 부드럽게 울렸으며,
요사이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그 몸 움직임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잃게 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소아마비 장애인의 몸놀림 같은 것을 보노라면 동정심마저 든다. 그리고 천부의 자기 목소리로 소리를 낼 것이지 온갖 변성(變聲)이란 변성은 다 내어서 어쩌면 광인(狂人)의 길거리 외침 같게도 들린다. 귀가 따갑다. 그런데 대중가요 가수 신모 군의 노래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내게 준다. 신모 가수는 요사이 젊은이 무리에 속하지만 다른 젊은이 가수와는 창법이나 그 창 태도가 전혀 다르다. 내가 신모 가수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데에는 그럴만한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노래 부를 때 조금의 미동(微動)도 없다. 조그마한 미풍(微風)도 없는 양 결코 그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부동자세로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그의 의상의 한 폭도 꼼짝하지 않고 몸에 딱 달라붙어 있다. 그의 몸과 옷은 일체가 되어 있다. 흥분하는 격한 모습도 없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항상 그런 자세로 임했다. 어쩌면 저렇게 순박할까? 손발을 허공에 대고 한 번 흔들어 볼만도 한 데 끄떡없다. 그는 그런 유혹도 받
동방의 나라 조선에서 평생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의사였습니다. 일제치하 1928년 17세에 경성의전(서울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고, 1932년도에 수석으로 졸업한 뒤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적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장기려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제안받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의사 얼굴 한 번 못보고 죽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셨고 병든 자들을 기도로 고치셨는데 그는 의술로써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써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습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 받던 시절, 김일성 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
“사전오기의 신화, 홍수환 선수가 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링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저는 인생이 링보다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링에서는 두들겨 맞아 그로기 상태가 되면 말려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에서는 맞고 떨어지면 아예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최윤규 저(著)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책이 있는 마을,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싸움의 3대 요소’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펀치력, 맷집, 그리고 말리는 사람입니다. 머리카락도 가른다는 취모검(吹毛劍), 마이클 타이슨 같은 펀치력이 있어야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런데 맷집이 없으면 허사입니다. 실력이 좋아 열 대를 때린다 해도 한 대는 맞게 됩니다. 한 대 맞고 넘어지면 열 대 때린 것도 소용없습니다. 바다에 파도가 항상 있듯이, 인생에는 바람이 항상 붑니다. 따라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잡초가 강한 것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되 뿌리를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맷집입니다. 거인이나 대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좋은 의미의 둔감력(鈍感力)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눈, 그 독한 입들을 견뎌내는 둔감력이 있어
어느 한 교인이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개새끼”라로 했다며 이집 저집에 다니며 성토를 했다. 듣는 사람마다 “목사님이 욕을 해서는 안 되지! 하나님 말씀만 전해야지!”라고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전후 실체는 이랬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한 예화의 서두에 “옆집 개가 새끼를 일곱 마리를 낳았는데 개새끼들이 너무나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했다. 이해력이 부족해서 온 사소한 말로 시작되었지만 한 목회자를 욕쟁이 목사로 만들었다. 잘못 듣고 잘못 말을 전하는 작은 실수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실수! 그러나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그의 책 ‘정신분석학 입문’에서 “성적 리비도”나 “꿈”에 대한 주제보다도 먼저 맨 첫 장에서 ‘인지왜곡’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즉 비정상적인 사람은 잘못 듣고, 잘못 말한다는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왜곡된 말을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인지왜곡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가위질해 버리고, 듣고 싶은 말만 잘라 모으는 고도의 편집기술을 통해 ‘거짓을 진리로, 진실을 거짓으로’ 둔갑시켜 듣는 이들의 마음을 현혹시킨다
Ⅴ. 중생 교리의 실제적 적용 남침례교 조직신학자들이 중생 교리를 전개하면서 주로 사용한 성구는 요한복음 3장 3~8절과 디도서 3장 5~8절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 3~8절은 중생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된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8절과 디도서 3장 5~8절 말씀은 침례중생설로 왜곡되거나 중생자 교회회원권을 지지하는 말씀으로 활용됐다. 1. 중생과 하나님의 나라(요 3:3~8) 대그와 보이스 그리고 무디는 요한복음 3장 3~8절에 나타나 있는 중생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멀린스는 중생과 하나님의 나라 관계를 아주 간략하게 묘사했고, 카너는 이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했다. 멀린스는 요한복음 3장을 중생에 관한 고전적인 말씀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3장 3~5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가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건을 다루지만, 요한복음은 그 사건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었다(요 5:24~29; 11:25~26). 멀린스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중생과 관련시켜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16:26).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사랑하시어 3년간 복음전도와 구령사역 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적으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놀라운 기적의 열매를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드디어 형무소 간수들이 “이 놈의 영감탱이 입 못 닥쳐!”라고 소리 질렀다. 그토록 완력을 가하는데도 아랑곳없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다가 개처럼 끌려 형무소 사무실로 나갔다. 일본의 검사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다가가 “영감님!”하고 불렀다. “예!” “예수 천당을 그만하라는데 왜 계속해서 혼구멍이 납네까?” 이때 최권능 목사의 눈빛이 번쩍이며 검사를 보면서 “검사 양반, 내래 온 전신에 예수신이 꽉 차 있어서 어찌할 수 없습네다. 소리치지 않으면 안됩네다!”라고 말했다. 검사는 혀를 끌끌 차며‘이 영감을 저렇게 예수에게 미치게 하는 그 엄청난 힘은 무엇일까?’하고 중얼거렸다. 최봉석(일명 최권능) 목사님은 평양 강동현 최준서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노방전도자
누에 농사는 딱 한 달 농사다. 누에알에서 부화되어 뽕잎을 먹을 만큼 먹은 누에들은 더 이상 뽕잎 먹기를 거부하고 섶에 오른다. 섶에 오르는 누에들은 유리 속을 들여다보듯이 투명한 몸뚱이를 지닌다. 그 몸속에는 온통 명주 실크로 충만되어 있다. 섶에 오른 누에들은 제각기 자기 자리를 잡은 뒤 그 입으로 무한히 길고 긴 실크를 뽑아내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마침내 고치 집을 짓고 자기는 그 속에서 번데기로 남는다. 이렇게 하는 작업이 딱 한 달이라서 농부들에게는 단시간에 손질을 올리는 고마운 누에 농사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어놓은 누에집 고치가 매달린 것을 보노라면 흐뭇하고 아름답기도 한대, 그 밑에는 비극적인 지옥세계가 있다. 남이 뽕잎 먹을 때 자기들은 무슨 짓을 했던가. 동료들은 섶에 올라가 집을 짓건만 다른 누에들은 섶에 오르지도 못하고 그 섶 아래서 흐물거리고 있다. 그것들에게는 더 이상 뽕잎 제공도 없다. 때는 이미 늦으리. 애원해도 뽕잎 배급은 없다. 배도 고프고 힘도 없는 누에 잔존들. 몸 색깔은 누렇게 부패하고 있고 썩는 냄새까지 풍기면서 땅바닥에서 허물거린다. 뽕잎 주던 아낙네는 이 누에들을 빗자루로 슬슬 쓸어 담는다. 그리고 “구
우연한 기회에 남편들의 탈선외도에 대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현상이 있다고 어떤 성(性)전문 강사가 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강사는 탈선자의 개인적인 이유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남성의 탈선외도에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그 강사의 요지를 대강 기억하기로는 남편 탈선의 이유로는 첫째로 남편의 외도가 본처에게 주는 상처의 끔찍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과 둘째로 본처만 알지 못하면 남편의 외도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묘한 문화 환경과 셋째로 본처로부터 떠밀림을 당하는 듯 남편의 인기가 없어지는 듯 느껴지는 남편의 감정과 넷째로 본처와의 침대 생활(Bed life)이 통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그럴 듯한 외도의 이유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보는 남편의 외도는 그 이유를 인간의 타락성 분위기에서 찾는다(롬1:24~27). 세상 사람들은 결혼의 영적인 의미를 알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접하지 아니한 그들이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영적 의미를 알겠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신부교회의 원초적 상징이다. 그리고 남편 간의 성교(Sexual action)는 두 인격결합의 최고 표현이며
“인사 서로 나눕시다. 나 황경찬 목사요.” “예, 저는 한명국 목사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목회하시오? 아침식사 나누면서 얘기나 합시다.” “저는 서울침례교회라고 충무로에 있습니다.” “나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서 목회를 하고 은퇴를 했지요. 나는 성결교단으로 치부동성결교회였지요.” “들어오실 때에 보니 포니차를 잘 운전하시던데 혹시 목사님은 여기 제주도에 사신가요?” “그래요. 은퇴하고 나니 누가 오라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한 때 총회장을 할 때는 초청도 많았는데…목사는 목장이 있어야지. 평생 양아치로 살았고 양젖을 먹고 살았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니 견딜 수가 없어. 작년에 나이 80에 이곳 멀리 제주도에 와서 개척했는데 2년이 지나니 지하교회이지만 40명의 교인으로 늘어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목사님 대단하시고 존경합니다. 어느 누가 80세에 개척교회 꿈도 꾸겠어요. 죽도록 충성해야지요. 오늘 저는 80세에 부름받은 모세처럼 목사님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제2의 소명으로 목사님을 따를 용기가 생기네요.” 때는 1987년 목회현장의 긴장도 풀고 또 추수감사절에 있는 제2회 “예수잔치” 준비기도를 위해 멀리 제주도 기도원에서 만났던 황경찬 목사님은 1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나 한 사람보다는 옆에 누군가를 붙여서 함께 일하신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모세에게는 아론을, 다니엘에게는 세 친구들을, 베드로에게는 요한과 야고보가, 그리고 바울에게는 실라, 바나바 외에 여러 사람이 함께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함께 하여 더 아름답고 큰 일을 이뤘음을 볼 수 있다. 목회를 하면서도 좋은 멘토와 친구를 만나고, 좋은 교우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역을 하며 함께 하나님을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옆 가까이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동역자도 어느 땐 한 몸처럼 가깝다가도 조그만한 일로도 원수가 되기도 한다. 또 여러 가지 일로 떨어져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 함께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목회를 하며 부족한 것이 투성이인 모습으로 사역을 혼자는 다 할 수 없음에, “동역자를 붙여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날 마음속에 소리가 들렸다. “네 옆에 있지 않느냐?” 눈을 들어 몇 몇의 얼굴과 이름들을 떠올렸다. 딱히 확신이 안 생겼다. 지나고 나면 그래도 돕는 자라고 생각했던
부산 보수동 어느 헌책방에는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글귀가 벽에 붙어있다. 주인에게 어떤 책이 더욱 그렇느냐고 물어봤더니 당연히 성경이라고 대답을 해줬다. 전에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성경의 위대함을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전광 목사라는 이가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를 두고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존 워너메이커는 일생동안 성경을 사랑했으며, 체신부 장관이 되어 인터뷰할 때에 “장관은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가 본업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린이 사역에 헌신하고 봉사했었고, 크리스천 기업가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 YMCA건물을 지어주는 일을 했었는데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 전했다. 나를 예수님과 교회로 인도해준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대학 시절에 연설문에 잠시 관심을 가진 때가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모은 책을 발견하고 관심 있게 읽게 됐다. 그의 ‘사랑’이란 제목의 연설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전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요1:3) 그분을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