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재미있거나 학교가 신나서 학교 가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가야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부가 재미있고 좋아서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학생은 스스로 공부하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되고 목표를 성취할 때마다 성취감을 느끼며 더욱 재미있게 공부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법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선생님의 강압이나 부모님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하는 학생은 같은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에 비해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은 불평하면서 하기 때문에 성과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고 성적이 안 나온다고 야단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생인 주안 주찬 형제가 방송에 나와서 놀라운 암산 실력을 보여 주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 주찬이는 100만 단위의
카너도 멀린스와 같이 “하나님 편과 인간 편”의 전개 구조로 그의 중생관을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중생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중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오직 중생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아울러 카너는 중생을 가져오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반응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제공한 구원의 선물을 인간이 믿음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고, 인간은 그 구원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카너는 중생의 과정에서 인간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카너는 멀린스와 같은 중생관 전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인간 편의 능동성을 그보다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디는 에베소서 2장 8절에 근거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구조를 세운 후, 여기에 요한복음 1장 16절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연결시켰다. 즉 요한복음 1장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측면을 보여준 것이고, 로마서 1장 17절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측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무디는 요한이 구원을 위에서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에 나타난 기독론적 내용을 살펴봤다. 이제는 “사람의 아들” 곧 ‘인자’ 칭호가 사용된 구절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에는 인자 칭호가 13회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사람의 아들은 인성을 부각시킨다. 인자는 영원한 신성의 존재성을 가진 로고스가 신체를 가진 인간의 존재가 되어(1:14) 공생애 삶을 사셨고 하나님의 뜻을 완결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활동을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번부터는 인자가 사용된 말씀들을 통해 요한의 인자 기독론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인자의 첫 번째 사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과정에서 두 번째 제자 집단과의 만남 사건에서 나온다(1:51). 그 사건은 빌립을 만나시고 제자로 초청하신 후에, 빌립이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예수께 데려온 것으로 진행한다. 빌립의 전도를 듣고 자기에게 나온 나다나엘을 가리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
꼰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겪었던 거에 비하면 넌 힘든 것도 아니야.”“내가 해봤는데 그거 안되는 거야. 시간 낭비 하지마.”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텐 힘들었는데 넌 아닐 수 있어.”“나는 실패했지만 넌 성공할 수도 있는 일이지.” 꼰대는 “나도 그랬으니 너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선배는 “나는 그랬으나 너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강주원 저(著)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비로소, 83~8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재’와 ‘꼰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썰렁 개그라도 해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아재’고,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위에서 가르치려 들면 ‘꼰대’입니다. 스페인어 ‘꼰데(conde)’는 ‘백작’이라는 고귀한 의미이지만, 자기 반성이 없이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을 세상은 ‘꼰대’라고 부릅니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삶의 태도의 차이입니다. 늙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젊어도 꼰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세상 풍속을 잘 따라가지 못하지만 느린 몸과 마음으로 늘 반성하며 소통하려는 사람을 아재라고 합니다. 아재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꼰대는 다릅니다. 몸과 마음이 느린 것은 물론이고,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권정자 외 20인 공저(共著)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 1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때문에,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우리들의 할머니 스무 명이, 글과 그림을 배워 전시를 하고 책을 냈습니다. ‘순천의 소녀시대’라고 불리우는 할머니들은 막내가 50대 후반, 맏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데, 살아온 생을 모두 합하면 1600년이 넘습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구, 전쟁 중 피란길에 죽은 동생을 업고 온종일 걸었던 이야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멋있어 보여서 결혼했는데 짜장면 하나 사줄 돈이 없던 가난한 남편 이야기… 영어를 배울 때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헬로, 디져”라고 해 웃음 바다가 되고… 할머니들의 그림일기에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애환이 묻어 있고, 세월이 그리고 웃음과 눈물이 묻어 있습니다. 동네 오빠에게 손목을 잡힌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한동네 사는 친
상담소를 찾은 C씨는 교회 갈 때마다 자신을 싫어하는 듯 보이는 한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고 했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하고는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섞으면서 유독 자신만은 경계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을 말없이 지나쳐가려 하길래 얄미운 마음에 일부러 길을 이리저리 막아 앞서 가지 못하게 했다나… 그 할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괜스레 내 흉을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생겼다. 그 할머니가 신경이 쓰여 교회를 나가는 것이 시큰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교회로 옮겨볼까 생각도 했다. 참다못해 한번은 작정하고 따져 묻기로 했다. 도대체 왜 자기를 싫어하냐고 대놓고 물어보겠다며 씩씩댄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정작 자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을 가리는 것인지조차 확신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열은 받는데 뭐라고 따져야 할까? 얼마 전 ‘언니의 따끈따끈한 독설’이라는 짧은 강의를 유튜브에 연재하는 한 강사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중 한 강의의 주제는 ‘은근히 나를 싫어하는 사람 상대하는 법’이다. 언제나 칭찬받고 싶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은 비단 크리스
일전에 부산 어느 식당에서 H목사님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며 신앙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한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에겐 좀처럼 부작용이 없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병원에서 맞고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아 갑자기 실신하였다고 했다. 그때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차례로 경험했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산에서 변형된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였지만 그 목사님은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 있기를 원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알려주더란다. 그래서 깨어나보니 시간은 20여분 지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둘러서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더라는 것이었다. H목사님의 간증을 듣다보니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한 청년이 문득 기억됐다. 그는 총각으로 중국집 주방장이었다. 식사하러 간 우리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근히 접근해오길래 교회를 개척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알려줬다. 그 청년은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말한대로 자주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에겐 심각한 심장병이 있었다. 지금은 심장과에서 혈관이 막힌 곳을 쉽게 뚫기도 하지만 그 당시엔 힘든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언제든 바다에 나가면 여지없이 이름을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낚시에 고기들이 걸려 나온다. 그럴 때면 “TV에서는 큰 물고기도 많던데 왜 이렇게 작은 것 밖에 없느냐?”는 투정(?)의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리 섬이라도 연안의 갯벌에서 큰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 것이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그 당시 미국에서 10여 년 넘게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의 따님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 생활하는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왜 미국이 좋은가 물은 질문에 첫 번째 대답이 “나라가 커서 좋아요”라는 말이었다. 삼천리 반도라고 하는 대한민국은 미국의 52개 주 가운데 하나와 비슷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대한민국에서 자라 이곳에서 생활하던 것을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큰 나라구나” 하는 것이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리며 “이 땅을 나의 손에 주시옵소서”라고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넓은 미국 땅에 살지만 마음마저 넓게 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으로 자기에게 유익하면 “미국에 사니 미국 사람처럼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한
나는 한국 순교사를 읽은 중 많은 위대하고 성스런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목사가 아닌 김윤섭 전도사의 순교와 초대교회 사도 요한의 신복제자로 폴리갑의 순교직전 대담을 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과 세계선교를 다니며 종말을 맞는 수많은 교회들과 훌륭한 목회자들을 만났지만 으뜸으로 늘 떠오른 두 성자의 최후를 추모해 본다. ‘순교사화집’을 읽고 감명이 깊었던 십자가 신앙의 선진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 전도사는 평안도 선천 태생으로 20세에 예수님을 믿고 평북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박천 덕인교회를 개척하고 의주 월하교회를 부흥시켰다. 또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그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결단과 다니엘 선지자처럼 입지불변(立志不變)의 전도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는 열 번이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저들은 그를 의자에 묶어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고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하여 신사 참배케 하고는 굴복했다고 시인을 강요했고, 갖가지 회유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결국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조건 하에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오자 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8회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
비록 부도덕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천국 갈 수 있으나 율법 폐기를 못 믿는 거룩한(?) 사람은 지옥행을 달린다. 여간 복음에 정통한 용기백배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런 표현을 토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발설자의 용기라 할 것까지 없다. 성경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위의 말을 더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덜 성화(聖化)된 사람이라도 천국 간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육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 집에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 아직도 단단한 밥을 못 먹고 젖만 먹는 어린아이 그리스도인. 이들도 천국은 자신있게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좀 덜 신령한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그런데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선행을 베푸는 자 같아도 율법 앞에서 율법 처리를 100% 정리 못 한 자는 지옥행자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너
포인세티아라는 화초가 있습니다. 이 화초의 꽃은 화려한 붉은색을 띄고 있으며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초입니다. 겨울에 피는 특성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인세티아가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캄캄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추운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불굴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아 감동적입니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깁니다. 심지어 이 화초는 비상구의 아주 희미한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됩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과 추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도 포인세티아와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아름답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줬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줬다고 꼭 팁 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독일의 사상가인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보상을 위해서는 한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천자문에 사자소학과 명심보감까지 배운 나에게 어느날 두각객이란 여승의 말을 들은 어머님의 조언에 따라 절에 대리고 갔다. 거기서 성가여래상과 관음보사상, 북두칠성단에 7번씩 절을 하게 불교신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교회에서 귀신병을 고친 이후에 180도로 달라져 3년 동안 나를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나는 교도소 선교를 하다가 교도소 8개월을 살고 나온 뒤엔 더욱 열심히 갇힌 자의 이웃으로 교도소선교회장까지 하면서 혜경 스님을 만났고 서울교회에 온 뒤 그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었다. 사도 바울의 개심을 연상케 하여 나의 눈물방울을 맺게 했다. 대한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이었던 혜경 스님(본명 : 김성화)이 불교단체의 내분과 정치 문제로 김해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늘상 하던 대로 불경을 읽기 위하여 대출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대출 신청한 불경이 아니라 기드온에서 발행한 조그만 신약성경 한 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스님은 의아해서 신청하지도 않은 기독교 책을 왜 가져왔느냐고 하자 성경을 가져다 준 청년은 “여기에도 진리가 있을 것이니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얼마 전 카카오톡에 연결된 새로운 친구라는 분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한참 후에 연락이 왔다. “누구세요?” 나중 이야기하기를 “카카오톡에 나오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보고 목사님 인줄 몰랐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잘 안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 변방에 사는 노인의 이야기로, 기르던 말이 도망쳐 집을 나가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고 대답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집을 나간 말이 좋은 준마를 하나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며 기뻐했지만 노인은 “그것이 무슨 화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자중했다.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다리가 부러졌고 사람들은 안됐다며 이를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대답했고, 그 말은 얼마 후 나라에 전쟁이 생겨 장정들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열에 아홉은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장애의 이유로 살아남았을 때 이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게는 10여 년을 머나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시간에 현실에 닥친 막막한 어려움이 조금
신조어(新造語) 중에 노노족이란 말이 있다. 영어 ‘No(노)’와 늙을 ‘노(老)’를 합성해서 만든 말로 ‘늙지 않는 노인’ 또는 ‘늙었지만 젊게 사는 노인’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야말로 노노족일 것이다. 갈렙은 85세 노인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것이 있다. 바로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겠다고 구하였다. 헤브론은 어떤 곳인가? 산간 지대였고, 성읍은 크고 견고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했던 거대하고 힘센 거인족 아낙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갈렙은 이 곳을 달라고 하면서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강건하니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1, 12) 했다. 여기서 그 때는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40세 시절이었고, 지금은 85세 노인으로 헤브론을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갈렙은 늙었지만 젊고 위대하게 산 노노족의 한 모델이다. 어떤 조간신문에선 영국 임패리얼 칼리지 연구팀에서 연구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