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줬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줬다고 꼭 팁 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독일의 사상가인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보상을 위해서는 한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천자문에 사자소학과 명심보감까지 배운 나에게 어느날 두각객이란 여승의 말을 들은 어머님의 조언에 따라 절에 대리고 갔다. 거기서 성가여래상과 관음보사상, 북두칠성단에 7번씩 절을 하게 불교신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교회에서 귀신병을 고친 이후에 180도로 달라져 3년 동안 나를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나는 교도소 선교를 하다가 교도소 8개월을 살고 나온 뒤엔 더욱 열심히 갇힌 자의 이웃으로 교도소선교회장까지 하면서 혜경 스님을 만났고 서울교회에 온 뒤 그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었다. 사도 바울의 개심을 연상케 하여 나의 눈물방울을 맺게 했다. 대한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이었던 혜경 스님(본명 : 김성화)이 불교단체의 내분과 정치 문제로 김해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늘상 하던 대로 불경을 읽기 위하여 대출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대출 신청한 불경이 아니라 기드온에서 발행한 조그만 신약성경 한 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스님은 의아해서 신청하지도 않은 기독교 책을 왜 가져왔느냐고 하자 성경을 가져다 준 청년은 “여기에도 진리가 있을 것이니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얼마 전 카카오톡에 연결된 새로운 친구라는 분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한참 후에 연락이 왔다. “누구세요?” 나중 이야기하기를 “카카오톡에 나오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보고 목사님 인줄 몰랐다”는 말에 웃음을 지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잘 안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옹지마” 변방에 사는 노인의 이야기로, 기르던 말이 도망쳐 집을 나가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고 대답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집을 나간 말이 좋은 준마를 하나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며 기뻐했지만 노인은 “그것이 무슨 화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자중했다.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다리가 부러졌고 사람들은 안됐다며 이를 위로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대답했고, 그 말은 얼마 후 나라에 전쟁이 생겨 장정들이 모두 싸움터로 나가 열에 아홉은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장애의 이유로 살아남았을 때 이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게는 10여 년을 머나먼 곳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시간에 현실에 닥친 막막한 어려움이 조금
신조어(新造語) 중에 노노족이란 말이 있다. 영어 ‘No(노)’와 늙을 ‘노(老)’를 합성해서 만든 말로 ‘늙지 않는 노인’ 또는 ‘늙었지만 젊게 사는 노인’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야말로 노노족일 것이다. 갈렙은 85세 노인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요청한 것이 있다. 바로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헤브론 지역을 정복하겠다고 구하였다. 헤브론은 어떤 곳인가? 산간 지대였고, 성읍은 크고 견고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했던 거대하고 힘센 거인족 아낙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갈렙은 이 곳을 달라고 하면서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강건하니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1, 12) 했다. 여기서 그 때는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40세 시절이었고, 지금은 85세 노인으로 헤브론을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갈렙은 늙었지만 젊고 위대하게 산 노노족의 한 모델이다. 어떤 조간신문에선 영국 임패리얼 칼리지 연구팀에서 연구한 내용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거룩한 삶은 말씀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만으로도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은 말씀과 기도가 서로 병행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이 뒷받침될 때 비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반드시 살아야 하는구나!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 나는구나!”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저의 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기도하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았기에 기도의 시간 또한 저절로 길어지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즉,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혈을 다하며 사투를 벌인 기도가 있었기에 십자가의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기존에 함께 계시던 성령님만으로는 안 됐던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지
카너는 양자를 칭의와 동의어이자 중생과도 동의어라고 말했다. 이 점은 양자를 중생과 함께 본 멀린스의 견해보다 더 구체적인 접근이다. 양자가 칭의와 동의어라는 말은 칭의와 같이 양자를 법률적인 용어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칭의는 죄인의 형벌에 대한 법률적인 제거라면, 양자는 하나님의 아들 관계에 서 있는 새로운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자가 법률적인 용어로써 아들 관계의 측면에 속한다면, 중생은 경험적이고 생물학적인 용어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카너는 바울이 법률적인 용어에 속하는 칭의와 양자를 법률존중주의적인 거래(a legalistic transaction)로 증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률존중주의적인 거래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분리시키는 조치라는 뜻이다. 이는 카너가 중생과 양자의 관계를 단순히 법률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적 측면에서 설명하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무디는 양자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직신학자들은 중생과 칭의와 양자 그리고 성화의 관계를 이렇게 다양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Ⅳ.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은 다른 구원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일하다’ 혹은 ‘독생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특히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서 이 특별한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다(3:16, 18).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면서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의 두 가지 성격 곧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설명한다. 요한복음 3:16~21의 표현이 삼인칭 강화의 형태로 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에 있어서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낸다. 먼저 요한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독생하다’는 형용사는 로고스 찬미가에서 화육하신 로고스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 사용됐다(1:14, 18). ‘독생자’는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무당’ 류의 예술가들에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는 식의 종신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시인인 순간만 시인이다.” 이성복 저(著)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문학동네, 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인 황동규는 2007년 7월 ‘월간조선’ 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이 ‘꽃의 고요’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에 나올 시집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쓴 시는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쓸 시가 문제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의 저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과거 그가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안주와 나태를 경계하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진정한 여행’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
낮은 골짜기에는 이슬이 많이 내리지만 높은 산꼭대기에는 바람이 심해서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은혜도 겸손한 심령에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자리는 높아지기를 힘쓸지라도 자세는 낮아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아프리카로 의료선교를 갔던 리빙스턴의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토인들은 참을성이 많아서 큰 수술을 할 때 아파하지 않고 태연하게 옆 사람과 애기한다. 그들은 어른은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여긴다. 아픔은 잘 먹고 잘 입는 사람이 더 못 참는 것 같다. 그처럼 참을성이 많고 눈물을 안 흘리는데 나(선교사)는 신기한 일을 목격했다. 내가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엉엉 울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눈물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겠습니까? 겸손한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상의 무기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데도 겸손이 필요하지만 복을 유지 하는데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복을 받아도 계속 겸손하면 복이 계속되지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비영어권 102개국 4만 명에게 70단어를 제시하고 정감이 가는 단어를 고르게 했더니 1위가 어머니(mother), 2위는 열정(passion), 3위는 미소(smile)였다. 그 밖에 사랑(love), 영원(eternity), 환상(fantasy), 목적(destiny), 자유(freedom, liberty), 고요(tranquility) 등의 단어가 꼽혔다고 한다. 여기에 제시된 단어들 중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단어들은 추상명사다.” 최복현 저(著) ‘여유’(프리스마, 13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가슴 깊이 아름답고 여기는 것들은 추상 명사가 많습니다. 아름다움은 말로 다 담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언어로 명제화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전제에서 그는 언어를 최대한 명확하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가능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꼈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철학자들의 책을 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가장 탐독한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9~20) 어리석은 부자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속해있음을 몰랐다. “모든 영혼이 다 네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라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하루살이 인생이 좋다. 어제는 지나갔으니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내일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오늘 뿐이다. 사람은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돌아가야 한다. 지난 주
1979년 함라교회를 시작으로 원당교회, 세종선한목자교회(전 연기교회)에서 40여년 동안의 목회사역을 마치니 지나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0여년간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아름답게 열매를 맺은 사역도 있지만 아쉬운 삶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름답게 열매 맺은 공동목회 사역 사역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10여년 전부터 공동목회를 꿈꾸었다. 후임목사 선정을 두고 담임목사와 성도 간에 분란을 겪고 있는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보살핌과 섬김보다 통치와 군림이 우선하고 상호 배려와 공경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던 기존의 교회 환경을 관계중심인 가정교회체제로 바꾸고자 공동목회를 계획했다. 검증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이요, 별 탈 없이 해오던 목회에 괜한 생채기를 낼 뿐이라는 주변의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성도들을 설득하며 시작했다. 몇 후임자를 초빙해서 공동목회 취지와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을 제시했지만, 공동목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떠났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후임 목사님과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은 동양의 오륜에 나타나는 말이다. 부부간에는 구별이 있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사람됨과 함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부부무별(夫婦無別)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끝까지 부부유별의 사상을 지켜야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어떻게 부부유별이 된단 말인가. 우선 신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구별된다. 성전환이란 요상한 수술도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신체구조가 달라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지 남자가 낳은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부부유별을 버리고 부부무별이 된 오늘이기에 남자가 남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고 또 여자가 여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니 이것을 동성연애라 하던가? 피조물도 자웅유별(雌雄有別)이다. 암컷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수컷끼리 또 부끄러운 일을 안 한다. 거미 곤충만 보더라도 암컷은 몸집이 크고 수컷은 몸집이 작은데 이놈들은 암수가 알아서 짝놀음하고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나중에 암컷이 무수한 알을 배출한다고 한다. 사람이 거미 앞에 부끄럽게 된 세상이다. 성경도 일찍 경고한 바 있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아이고! 화산댁, 아들 낳아 반갑네요!” 두각댁이라는 이웃 할머니는 새끼줄에 고추가 달린 금기를 보고도 무례하게 들어와 어머니께 축하인사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종교가 달랐다. 부친의 증조부께서도 유도(유교)를 신봉했고, 그 후손도 계속 유학을 배우고 살아오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속종교와 불교를 믿어 왔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객귀’를 물리친다고 마당에 십자가 표시를 긋고 칼을 한복판에 꽂아두기도 하셨으며, 부엌 부뚜막 위에 찬물과 표주박에 쌀을 넣어놓고 조상신을 섬기셨다. 동생들을 낳으셨을 때는 ‘삼신’에게 정수를 떠 식사판 위에 놓고 빌기도 하셨다. 물건을 옮길 때도 조심하고 이사를 할 때도 ‘손 없는 날’ 과 방향을 택하셨다. 그 외에도 어떤 일을 할 때에 귀신이 무서워서 점을 치기도 하시고, 집에 늘 드나드는 여승 양남댁에게 묻기도 하셨다. 그날 두각댁이 왔다간 후 아이는 젖도 먹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잠도 안 자고 계속 울기만 했다. 소위 불신자와 무당의 말로 “부정을
살다 보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왜 이 일이 나에게만 생기는 거야?” 생각될 때가 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걸음마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다. 진도는 대한민국의 땅끝마을이라는 곳보다 더 땅 끝에 위치해 있다. 막혀 있던 동내 분들과도 소통을 하기 시작하고 귀농자로서의 생활도 적응해 가려고 할 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이년 반 전 전임자가 주님께 가시면서 아들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예배당을 갑자기 부동산에 매매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30여 년을 동내 교회로 자리하고 있던 예배당이 없어져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전임자가 병환으로 폐허가 된 듯했던 예배당에 이제 몇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게 되고 동내의 교회로서 살아나려는 찰나에, 근처 바닷가의 개발 계획으로 도로 계획이 생긴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금액을 못 주면 부동산에 내 놓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몇 교인들이지만 함께 작정하고 기도하며 부르짖게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반문이 생겨났다. 그때 그렇게도 보았던 말씀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기도의 열쇠로 주신 예레미야 33장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