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강원도 산불이 나서 산과 동리를 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기도했다. 산과 집은 불타도 나무는 심으면 되고 집은 새로 잘 지으면 되지만 불 속에 사람을 태우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하나였고 10여명이 다쳤다는 TV뉴스에 나는 또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가끔 듣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며 머리끝이 쭈뼛 상기될 때가 서울교회 유치원 화재사건 이후엔 가끔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16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교회 교육관 1층 유치원에서 화재가 나서 삽시간에 2층, 3층을 불길로 덮었다. 소방서의 화재진압 후에 현장과 병원에서 죽은 아이는 6명이었으나 화상 당한 아이는 7명으로 그 후 만 4년간 당한 금식과 기도의 눈물에 수습까지의 수난과 고통
“기독교 미술의 부흥을 위해서는 믿음을 가진 천재들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재능 없는 신자보다는 신앙 없는 천재가 더 이 일에 적합할 것이다.” 이상범 저(著) ‘신앙없는 천재 재능없는 신자’(대한기독교서회, 2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빅토르 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이 지난 4월 15일 발생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제 이 성당의 복원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큰 관심사입니다. 이런 사건이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동남부에 위치한 아시시 성당은 2차 세계 대전으로 파손돼 새롭게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책임을 맡은 쿠투리에 신부는 거장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성당 지도자 일부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초청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에서부터 심지어는 무신론자도 끼어 있으니 어떻게 성당 건축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쿠투리에 신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천재들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재능없는
할아버지와 소년이 말 한 마리를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가신 날 밤, 말이 병이 들어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소년은 말의 열을 내려 주려고 밤을 세워가며 물을 먹이면서 애를 썼지만 말은 싸늘하게 죽어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얘야, 말은 열이 날 때 절대 물을 먹여서는 안된다. 넌 네 방식대로 말을 사랑한거야 말을 사랑하려면 네 방식이 아닌 말의 방식이어야 하는 거란다” 소년은 밤을 세워가며 최선을 다하여 말을 돌봤지만은 오히려 말에게 해가 되는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내 방식대로, 내 잣대로 판단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가? 하나님과 소통을 원하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나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 놓으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에 부흥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격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12:24)
사람들은 빨리만 가면 1등인 줄 알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가서 보면 그게 아닌 경우가 있다. 시골 학교에서 가을 운동회를 할 때 동네 아주머니들 달리기 경주를 시키면 꼭 질러가는 사람이 있다. 못 따라 갈 것 같으니까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 질러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데 먼저 왔다고 1등 상을 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빨리 가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 바르게 가야 한다. 어떻게 하든지 일등만 하면 되고, 돈만 많이 모으면 되며, 성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가든지 서울만 가면된다는 생각,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바르지 않은 과정은 언젠가는 탈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일등을 하고, 돈을 많이 모으고, 성공해도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신생기업이 권력과 결탁하여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사업을 확장하며 급성장하였다가 비리가 드러나 검찰 조사를 받고 오너가 구속되거나 세무조사를 받고 기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어떤 사람이 정치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그의 복음서 저술 목적에 관한 진술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을 두 번 제시한다. 첫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많은 표적들”을 지적하면서 시작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사용했다(요12;37~43). 두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다른 표적들”을 언급하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믿는 것과 관계시킨다. 두 진술들은 이미 언급된 것들을 요약하고 다음에 언급될 것들을 소개한다. 이 구절들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의 결과들 곧 박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신앙공동체의 미래를 내다 본다. 요한은 먼저 예수가 행한 표적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표적’으로 지칭한다. 요한이 표적 자료를 의지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 구절들이 그 자료의 결론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른 표적들”이라는 어구를 통하여 요한이 공관복음서 전승들과
2) 신약의 성 이해 신약에 나타난 성 윤리의 가장 뚜렷한 점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며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성 문제에 관해서 직접 언급한 일은 없지만 이혼 문제와 관련해서 이 점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가나 잔치에서 포도주 기적을 베푸셨다는 이야기는 그가 결혼을 축하할만한 경사로 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가 보여 주신 성 윤리는 순결이다. 그는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고(요8:1~11), 성이 선하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12). 그러나 여성에게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에 간음한 것(마5:28)이라고 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성적 순결성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을 육체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전6:9~10). 또한 성을 창조 본래의 선한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외설행위 등에 대해 죄악시하고 경고했다.(롬1:24, 고후12:21, 갈5:19, 골3:5). 한편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며 가능한 한 결혼하지 않고 천국 사업을 완성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고전7:24~6). 그러나 바울은 절제할 수 없는 자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5~6)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히11:6), 세상을 이기는 이김도(요일5:4) 그리고 예수를 믿어 죄 사함 받은 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법 또한 믿음으로 살아야 함(히10:38)을 하나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믿음을 예수님께선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해 말씀하셨기에 겨자씨에 대한 연구는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막4:31)이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했던 주된 내용은 “생명” 때문입니다. 즉, 믿음 안에는 생명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일전에 저는 옥수수, 완두콩, 애호박, 오이, 상추, 고추, 깨, 당근 등 여러 종류의 씨를 화분과 밭에 심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대추 토마토(토마토 모양이 대추처럼 생겼음) 씨앗을 처음 봤을 땐 너무나도 작고, 빈약한 나머지 제 마음에 이런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가야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너편에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심이 생겨 우리아 대장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으니 모세의 십계명의 5,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인륜의 첫 두 계명
요사이 유행가 중 “저 강은 알고 있다.”라는 노래가 있다. 어쩌면 그 가사가 80대 시니어들의 10대 이야기를 말 해 주는 것 같았다. “비오는 낙동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흘려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른다. 한 많은 한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밤안개 깊어가고 인적 노을 사라지면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오늘도 달래보는 상처뿐인 이 가슴 피 맺힌 그 사연을 설움 사연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나의 10대 시절은 내가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 1937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것은 조국을 마다 해서가 아니라 아버님이 노무자로 그 곳에 가셨기 때문에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나는 해방 직전 어머니랑 누님 그리고 동생이랑 귀국했고 아버님은 그 곳에 계시다가 해방 후 귀국하셨다. 강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8월 15일 조국은 해방됐고, 6학년에 한국전쟁이 터졌으며, 중학교 3학년은 전쟁 중 선배 형님들의 피 값으로 살아남았고, 휴전직후 군 입대 해보니 무슨 군대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아서 동상이 걸리고 굶주린 배를 안고 군 생활을 보냈다.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은 핏물 강이 됐다. 대구 직전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를 사랑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사람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때로 가시를 주셔서 잠든 영혼을 깨워 주셨고 한숨과 눈물도 주셨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수와 실패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무엇이 생겨서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은 것이 감사가 아닌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편리한 세상에 태어난 것과 세어봐도 세어봐도 감사 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남과 비교하며 살지 말고 질투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 말게하시고, 돈을 목적 삼지 않게 하시고 으뜸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사랑의 속삭임을 입술에 주고, 감사의 노래를 내 심장에 주소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신 종려주일에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아가 영광 돌리며,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앞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 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과거에 퓰리처상을 받았더라도, 그의 가치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기사가 말합니다. 물레방아는 과거의 물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물로 돌아갑니다. 시인 황동규는 2007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들이 ‘꽃의 고요’가 최고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라고 했어요. 다음에 나올 시집이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쓴 시는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 쓸 시가 문제지”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피터 드러커도 자신의 최고의 저서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요, 앞으로 쓸 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대 좋은 시인 이성복 교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인을 포함한 여러 ‘무당’류의 예술가들에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는 식의 종신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시
초등학교 4학년 때 외사촌이 넘겨준 예수의 만화책에서 “예수는 병자치유, 귀신축사, 죽은 자를 살렸고, 물로 포도주, 떡 몇 개로 4000명, 5000명을 먹였고, 바다 위로 걸었고, 말씀 한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했고, 심지어 바다 속의 물고기 입속에 동전이 들어 있는 것까지 아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는 모습이 너무 애처러워 만화책 마지막 부활의 사실은 아예 믿지도 않고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 핑계로 교회에 안 나간 나는 한국전란 중 1951년 8월 3일에 교회에 나간 것은 아버지가 나의 입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결과 17개 초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시험에 울릉중학교에 2등으로 입학해 B반 학급의 급장이 된 것이 네가 잘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도 응답이라고 호되게 꾸짖는 바람에 마지못해 저동교회에 나간 이후 대구 영남고등학교 졸업 이후까지도 부활을 안 믿었는데, 한남대학교에 입학하자 설교대회에서 우재돈 선배가 1등하고 이사야 53장으로 예수의 십자가 주제로 눈물고인 설교로 나는 2등을 하면서 부활 신앙이 그때서야 생겼다. 우리 인생은 고독을 먹고, 실패를 마시며, 슬픔과 두려움 속에 살기에 우리의 삶이 서럽
그 사람의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에 조문객이 모였다. 땅에서는 “이래 살다 갈 것”하고 하늘에서는 “그래 살다 올 것”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린다. 땅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유감스러웠다는 것을 한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이래 살다 갈 것”하는 유감스러운 마지막 작별인사는 어이된 셈인가? 어째서 이래 살다간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한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에 시달리다가 떠나가는 고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는 것이다. 바가지 고생만 하다가 가누나. 둘째로 이래 살다 갈 것 쯧쯧하는 이유는 만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생전에 남에게 좀 베풀고 갈 것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인색했더냐는 것이다. 호주머니 풀지 않고 있다가 어디 가서 풀려나. 셋째로 자기에게도 좀 여유 있게 베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너무도 자기에게 인색했던 그의 삶이 가련하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 한번 못하고 입맛 따라 밥 한 그릇 사먹기를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유감천만스러운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그의 무신론적 생활이다. 그토록 영원 구원 전도를 했건만 고개 짓더니만 그냥 가는구나. 차차 믿는다고 미루더니만 영원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으로 살 수 없고 한번 죄인이 영원한 죄인으로 살다가 죽는 것도 아닙니다. 의인도 돌아서서 가증스런 일을 범할 수 있고 죄인도 돌이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죄인도 좌절해서는 안되고 어떤 의인도 선줄로 알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신앙을 자랑하지 말고 오늘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악을 향한 분노는 지독한 사랑에 대한 배신에서 나온 것이지 차갑고 냉정한 법 집행이 아닙니다. 이 마음을 우리도 품는다면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도 주님을 떠나면 죽음에 이르렀고, 죄인도 돌이키면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행한대로 갚은 것을 불공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된 자기 백성들에게 조상을 탓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한사람도 죄 때문에 죽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악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심판도 경고도 모두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호소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의 힘입니다. 물이 마침내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1°C 의 뜨거움입니다. ‘천 일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마지막 하루의 간절함입니다.” 정균승 저(著) ‘내가 나로 살아갈 이유’(티핑포인트, 12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물은 99도까지도 꿈적하지 않다가 100도가 돼서야 끓기 시작합니다. 엔진은 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키기 전에는 1인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물질의 상태를 바꾸는 온도. 물 100도, 증기 212도. 이를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 합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푸라기 하나로 코끼리를 쓰러 뜨리는 법”이란 유머가 있습니다. 코끼리를 쓰러뜨리겠다면서 지푸라기 하나를 코끼리 등에 올린다면, 코끼리는 기가 막혀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쌓아 가다 보면 코끼리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 지푸라기 하나를 더 얹어서 임계점에 다다르면 코끼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점들이 모여 임계점을 지나면 선을 이루고, 선들이 임계점을 지나면 면을 이룹니다. 그 면이 어느 날 임계점을 통과하면 입체 예술품이 됩니다.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