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절망을 이야기한다. 예배당 건물과 시설은 수십 전 전에 비하여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교인들의 성경 지식과 교양은 이 땅에 복음이 첫발을 내딛은 백 수십 년 만에 가장 충만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세상 속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위축되고 고립되어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더 걱정한단다. 캠퍼스의 선교기관들은 과거에 비해 조직이 크게 방대해지고 전문화됐다. 그러나 최근 조사는 지난 십년 간 캠퍼스 기독교 동아리의 소속 학생 인원이 정확하게 반 토막이 된 것을 확인시켜 준다. 현장의 장기 사역자들일수록 동일한 수고를 해도 열매가 예전 같지 않음에 당황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능란하다. 현장 주변에는 냉혹한 현실을 설득력 있고 조리 있게 분석해주는 전문가들이 넘쳐난다. 다수의 종교사회학자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해 암울한 전망과 예리한 분석으로 시한부 사망 선고를 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그렇다면 이 시대 한국 교회의 절망은 필연인가? 이 시대 우리 현장 사역의 초점이 숫자 놀음에서 머무는 한 이러한 절망은 마땅하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대 한복판에서도
교회 내 노인인구 증가와는 달리 주일학교 학생 수의 감소추세는 이전과는 다른 목회환경의 변화를 예고한다. 장기적으로 교회의 평균연령이 늘어날 것이며 노인인구 증가에 따라 그들이 교회 내의 주력세대가 되어 영향력과 요구가 증대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비해 노인들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노령화에 따르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마련해 목회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나가야 한다. 2. 고령화로 인한 한국교회의 문제 1) 노인들의 욕구와 필요에 대한 문제 노인들은 사회적 역할변화와 신체적 퇴화현상을 경험하며 욕구의 감소 내지는 결핍으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육체적으로는 신체감각과 기능저하로 인해 적응능력이 감소하고 사회적으로는 퇴직에 따른 경제적 수입감소와 기존에 사회에서 감당하던 역할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본적 필요나 욕구의 결핍으로 인해 삶의 질이 감소하며 심리적인 불안이나 절망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문제를 방치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켜 노인 개인뿐만
목회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영적 목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회의 본질이 교육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이고, 보호하며, 치료하는 것이 목양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먹이는 것이요, 말씀을 가르쳐서 성도들을 잘못된 사상과 행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말씀을 가르쳐서 영혼의 약한 것과 병든 것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했듯이, 목회자는 가르치기를 잘해야(딤전 3:2)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도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목회를 위한 중요한 근거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은 성도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제자를 삼으라”는 것으로, 역시 교육적인 명령이다. 그래서 ‘교육적 지상명령’(The Great Teaching Commission)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목양’하셨고 성경은 전형적인 그분의 모습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목회자가 목회라는 것을 교육적인 사역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평신도신학 발전에 크게 공헌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중략)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칼릴 지브란의 ‘사랑을 지켜가는 아름다운 간격’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 5절의 말씀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마구 말하지 않고 마구 행동하지 않는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엉성해 보이는 구멍 숭숭한 돌담들이 있습니다. 이 돌담은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로 구멍의 간격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사랑한다고 하여 뛰어든다면, 달이 지구가 좋다고 달려와 안긴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별빛이 고운 것은 그 빛이 아주 멀리서,아주 오래 전에 출발해 지금의 우리 눈에 닿았
어떤 목사가 예배당을 팔아버렸답니다. 이 소식을 듣던 또 어떤 목사는 무표정했답니다. 그도 예배당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예배당을 팔아버리는 목사가 꽤 많나 봅니다. 발설자가 말했습니다. “권 목사가 예배당을 팔아버렸다면 그땐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았답니다. 식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버지, 참 잘 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기분이 좋았습니다. 소천일이 가까워오고 있네요. 무척 조심스럽네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하나님, 목사가 교회를 팔아버리지는 않았겠지요.” 일부 목사가 예배당 팔아버렸다는 사건은 성도는 물론 세상 이방인까지도 알고 있는 처지인데 목사 입에서 그 사실을 도무지 발설 한 번 하지 않는다는 것도 양심을 들여다보이는 일 같아서 여기 용감한 건지 바보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이제 목사도 알고 있다고 발설해야 되겠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던 때에 당부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9) 사람을 낚으라는 것이 예수님의 소명 이유였다. 예수님은 사람의 호주머니를 훑으라고
맴맴맴! 해마다 여름철이 올 때마다 아름다운 매매소리의 합창이 옛날 시골의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작대기로 나뭇가지를 쳐서 또는 친구들의 어깨 위에 서서 나무에 붙은 매미를 한 깡통씩 잡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 작은 매미가 어떻게 저렇게 고운 소리를 내어 울려 퍼질까? 저 아무렇게나 소리지르는 듯한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았다. 저 소리를 몇 일간 내기 위해 몇 년을 어두운 땅 속에서 지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우리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여러 가지 식물의 조직 속이나 나뭇가지에 산란된 매미의 알은 2~6주간에 부화되어 깨어 나온 매미의 애벌레(유충)는 땅 속으로 들어가 침과 같이 생긴 뾰족한 주둥이로 나무뿌리를 찔러 그 속의 수액(樹液)을 빨아 먹으면서 몇 해를 자란다. 다 자란 ‘굼벵이’ 성충은 초여름부터 나타나는데, 맑은 날을 골라 대체로 저녁 해질 무렵 땅 위로 기어 나와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등에 몸을 고정시킨 매미로 탈피를 한다. 애벌레가 땅속에서 보내는 기간은 종별로 달라서 2~7년을 땅 속에서 보내는 것부터 2~7년에서 13~17년을 보내는 것 등 다양하다. 이 현상은 천적을 따돌리기 위해 채택된 하나의 생존
얼마 전 있었던 우리 교회 전교인체육대회. 그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계주 경기였는데, 담임목사도 무조건 뛰어야 한다 해서 무심코 뛰었다가 아주 혼쭐만 났던 이야기를 잠깐 하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날 오후, 아직 밝은 대낮에 별을 다 봤다. 하늘의 별이 아닌 내 눈앞의 별.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참 유난히도 야속하게 그 별은 반짝반짝 빛났다. 게다가 하얀 분이라도 바른 듯 얼굴마저 하얘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한동안 말할 힘마저도 없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숨만 가쁘게 몰아쉬었다. 담임목사가 흰 팬티 걸쳐 입고 온 성도들 앞에서 내달리는 수모(?)는 차라리 괜찮다. 나로 인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니까. 그 창피 줄여주려 일부러 더 큰 함성으로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함성과 함께 박수로 응원해주신 성도들이 있으니 그거야 괜찮다. 문제는 그 200미터가 내겐 죽을 것 같은 고통이어서 그렇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다 반 바퀴씩만 뛰게 하더니 마지막 주자인 내게만 한 바퀴를 뛰게 하다니, 아무튼 이 주최 측 농간(?)에 담임목사만 혼났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함께 뛴 다른 목사도 체력의 한계로 스텝이 꼬여 그만 마지막 순
이 연구의 목적은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주목하며 노인인구 증가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통해 목회적 대처 방안을 연구함으로 다가올 미래목회를 준비하는데 있다. 이 논문이 품고 있는 핵심 질문은 한국교회가 고령화의 시대적 흐름에 대비해 목회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를 위해 논문 서두에는 교회에서 고령화로 인해 야기되고 있는 문제점을 제기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며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거칠 것이다. 다음에는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인식과 가치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을 통해 노인목회의 중요성과 필요에 대한 인식과 효과적인 목회방안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논문의 결론에서는 고령화 시대를 대비한 교회의 긍정적적이고 효과적인 목회 방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한국교회 현장에 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목회적 방안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현실 UN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로 14% 이상이면 고령사회(aged society)로 20% 이상 시에는 초고령 사회(post-ag
“교회는 가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제도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평신도신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송인규는 ‘신분’과 ‘직분’이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은 평등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이 둘은 서로 다른 범주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사도나 장로 등의 ‘일꾼’으로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행 15:23; 엡 3:7~8). 이것을 어떤 신학자들은 역할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다뤘다. 예컨대, 스캇은 ‘차별’ 없는 하나님의 ‘한 백성’ 안에 ‘구별’은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의 ‘기능’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3. 사역 주체로서의 평신도 평신도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평신도로 하여금 본연의 위치를 찾고 자신의 책임을 잘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신도 신학자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 논하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즉 평신도가 교회의 사명 성취를 위한 사역의 주체라는 것이고, 그 사역은 ‘세
부산의 박 목사님의 부친이 소천했기에 여러 목회자 부부가 장례 예식장으로 조문을 갔다. 위로 예배를 드린 후에 박 목사님이 집안 소개를 하는 순서에서 참여했던 모두가 박수를 쳐줬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해주는 경우는 많지만 이런 행위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했었다. 우리가 왜 박수쳤는가를 다시금 생각해본다면 첫째,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78명이었는데 모두 예수님을 믿고 주일이면 교회에 출석한다고 했다. 어떤 여 집사님은 자기 혼자만 예수님을 믿고 성인된 자녀들이 6명 되지만 1명도 예수님 믿지 않는다고 통곡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오늘날 이런 가정들이 얼마나 많을까? 박 목사님의 부친의 경우엔 자녀들, 며느리들,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주일 예배를 드리는 가족들이라고 하니 박수 쳐 줄 일이었다. 둘째는 박 목사님의 형제가 5명인데 그 중에 맏형은 장로교회에서 목회했고, 그와 동생은 침례교단에서 목회했다. 다른 2형제는 장로와 안수집사로 각각 섬기는 교회는 달랐지만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다. 또 그의 조카 중
얼마 전 근처 교회에서 권사 임직을 하며 순서를 맡게 됐다. 다시 권사에 대해서, 나아가 교회 직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권사(勸師, exhorter)란 “교회에서 전도와 봉사 그리고 권면의 사역을 감당하는 직책의 사람”이다. 권사 임직을 생각하니 오래 전 들었던 말이 떠 올라 눈물을 훔쳤다. 어느 교회에 연세도 있으시고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께서 계셨다.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칭찬 듣는 권사님이셨다. 어느 토요일, 권사님이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여자 하나가 부엌에서 나오는데 무엇인가 숨기듯 감추며 인사도 못하고 황급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기도를 마치고 집에 갔다. 그런데 주일 준비하러 왔던 사람들이 주일에 쓰려고 사다 놓은 고기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다 기도하고 간 권사님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권사님에게 찾아가서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도하러 교회에 갈 때 황급히 나오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말을 하려다가 만약 말을 하면 그 여자를 찾아갈 것이고 교회에 소문이 나면 교회에 못 다닐 거란 생각에 “내가 그랬노라고 고기를 보니 먹고 싶어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
한 유명한 목사님께서 교회로 집회를 오셨을 때 이리저리 여행이 많아 시차 때문에 피곤하시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면 밤낮이 바뀌는 시차 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주 꼬박 고생한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시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무 때나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신단다. 아침까지 억지로 자야겠다는 생각이 없으시니, 잠이 안 오는 밤이나 새벽이 고역스럽지 않으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문득 갱년기를 그다지 힘들지 않게 잘 지나가셨다는 한 집사님 생각도 난다. 그분에게도 갱년기의 흔한 증상인 불면증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자다 깨지면 그냥 일어나서 이 일 저 일 보다가 잠이 오면 자고, 안 오면 그냥 일어나 일을 가신단다. 그럼 다음 날은 어찌 되었건 푹 주무신다나…. 이 정도로 긍정적이면 불면증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어찌 됐건 다음 날은 잘 테니까. 그러다 또 잠이 안 오면 다른 일 하면 되니까…. 사람들이 상담을 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증상을 없애는 데에 있다. 다들 골칫거리를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하다. 화가 치미는 현상을 없애고, 불면증을 없애고, 우울감과 불안감을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중략).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으므로 삼등이나 그 이하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중략). 등’은 순위나 등급 또는 경쟁을 나타내고, ‘류’는 위치나 부류의 질적 가치를 나타낸다(중략). 결국 삼류란 질의 문제로 ‘질이 형편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공산품일 경우 품질의 문제이고, 인간일 경우 인격과 인품의 문제이고, 국가일 경우 국격의 문제다.” 정호승 저(著) ‘정호승의 새벽편지’(해냄, 120-12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일등이 꼭 일류는 아닙니다. 일등이지만 삼류 같은 사람이 있고, 삼등이라도 일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삼등 완행열차에 일류 낭만을 실을 수 있고, 일등 고속전철에 삼류 추태를 실을 수도 있습니다. 삼등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삼등을 축복하십니다. 꼴찌에게도 박수와 갈채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삼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꼭 일등 같아 보이지만 삼류 인생을 산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늘 상석에 앉으며 일등이 되려 했고, 일등처럼 보였지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빌2:16) 전도사 시절 미국에서 살 때 부모님이 집을 한 채 사주신 적이있습니다. 그곳에서 파를 심어 키워 먹을 생각으로 모종을 20개 정도 구입해서 마당 한구석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이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지 도저히 삽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 또다시 물을 부어놓고 2~30분쯤 기다렸다가 5cm정도 파고하는 식으로 반복하면서 파들어 가 끝내는 모종을 다 심었습니다. 그 후 저는 매일 새벽 예배를 마치고 올 때마다 그곳에 들러서 물을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이 녀석들이 땅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나올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사먹고 말지”하는 마음으로 포기한 뒤로는 관심조차 마음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무심코 그 주위를 거닐던 저는 대변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들의 생명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삽질조차하기 어렵던 그 돌덩어리 같던 땅들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
4. 우리나라의 평신도신학 현황 WCC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평신도신학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개신교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평신도 훈련으로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던 옥한흠 목사는 1980년대 초부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역을 담은 “평신도를 깨운다”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 평신도에 관한 한국교계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1986년에는 총신대학부설 한국교회문제연구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1992년에는 옥한흠 외 7인에 의한 소책자 “평신도”가 출간됐으며, 1997년에는 심일섭의 “평신도신학과 한국교회의 미래”가 나왔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토착화 운동을 평신도신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듬해에 출간된 김점옥의 “평신도 사역자를 키우라”는 주로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리더의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평신도 분야의 발전 과정은 느리게 진행됐고, 체계적인 신학의 정립보다는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한 평신도 훈련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은 당시 평신도교회 운동을 실천하던 최승호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