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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선교: 가정교회가 힘이다!4-1

어떤 영향을 끼쳤나?

 

 

기독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313년까지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이겨냈다.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의 대박해를 비롯해 2세기와 3세기에 각각 있었던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정교회의 정신 때문이었다.

아무리 외적인 장애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내적인 연합과 희생정신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를 꺾지 못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했던 가정교회가 3세기에 걸쳐 헬라권 전 지역으로 흩어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정신은 당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끼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회적인 측면으로 한 몸의 삶이다.

초대교회의 가정교회가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헬라권 지역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정신이다. 이는 현존하는 국적과 신분과 성별 차이를 철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 당시 신분 이동이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같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정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미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던 식탁교제(table-fellowship)를 선택했다. 이 식탁교제에는 애찬식과 주의 만찬식이 포함된다. 유대인은 할례 받은 민족으로 다른 민족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탁교제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전도할 때 자신의 전통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10:13~16). 고린도교회 역시 분쟁이 일어난 것은 먹는 것 때문이었다(고전 11:17~21).

식탁교제 문제로 교회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더 이상 차별이 없고 한 몸을 이룬다고 하였다(고전 12:13). 이 증거로 떡을 함께 떼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한 몸의 정신을 실천하는 장이었다.

더욱이 여성이 남성과 차별 없이 주 안에서 하나라는 정신도 일깨워 주었다. 갈라디아서 328절처럼 여성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 침례를 받으면 누구든지 남성과 동등하다는 정신이 펴져나갔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 자유로운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자신들이 이방인으로 종으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또한 헬라인 남성들조차도 자신들이 동물이나 여성이나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였다. 이런 사회적 풍토 속에서 침례의 의미는 대단하였다.

누구든지 침례 예식에 동참함으로 예전의 사회적 신분과 직위, 특권은 다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어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즉 침례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고후 5:17; 3:9~11). 이런 감격을 가정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헬라인이나 종이나 여성들이 누렸고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이들은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이다.

 

두 번째 리더십적인 측면으로 섬김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었다(22:26~27). 이것은 세상의 성공적 리더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님을 통해 이를 경험한 제자들은 초대교회 때 가정교회를 하면서 그대로 실천하였다.

바울을 통해 예수를 영접한 집주인들(루디아, 야손, 글로에 스데바나 등)의 섬김은 말 그대로 좋은 롤모델이었다. 이들은 예배처소를 위하여 장소를 제공하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며, 약한 자들(과부, 가난한자, 고아들)을 보호하며, 성도들을 섬기는데 헌신적이었다.

집주인들의 진솔하고 허물없는 형제애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구든지 예수 믿게 되면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더욱이 앞서있는 집주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다른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장면도 목격하였고 자신들도 훗날 그러한 삶을 살길 원했다. 말 그대로 가정교회는 가족이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힘이요 영적 무기였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복음은 헬라권 전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안희열 교수 / 침신대 신학과(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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