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유산(遺産)은 정체성과 자존심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어떠한 미래를 그려나갈 것인지 제시하는 청사진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문명은 문자를 만들고 그들이 걸어온 길을 기록해 왔다. 이런 기록을 남기는 일, 역사를 남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보존해 나갔던 국가나 민족들은 오늘날에도 문화 강대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역사를 무시하고 기록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직접 불살라버린 민족이나 나라는 현시대 그 존재를 찾아보기 힘들거나,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금세 무너져 내려가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문화대혁명으로 오랜 시간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깡그리 불살라버렸던 중국의 현재 모습을 보면, 기록을 남기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이제는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지만 이렇다 할 내세울 것이 없어 남의 나라 문화를 항상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기는 모습은 “소국이라 부르기에는 땅이 넓고 대국이라기엔 속이 좁아서 중국이라 부른다”는 한 네티즌의 댓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 침례교는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며 후세에 전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열
김영관 목사(金榮官, 1896-1986) 김영관은 1896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4남(영국, 영진, 영익, 영관) 1녀(명선) 중 4째로 출생하였다. 본래 그의 가정은 진천 김씨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으로,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첫째 영국과 둘째 영진이 1907년 간도에서 활동하던 김재형과 김경춘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두 형제는 부친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견뎠고, 마침내 가족 모두를 복음화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뤘다. 형들에 의해 복음을 전해 들은 김영관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고, 형들의 신앙을 본받아 날로 믿음이 성장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목숨 걸고 기독교 신앙을 믿고, 전해야 했던 시기였기에 온갖 고난과 환란 속에서 4형제는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의 간도 선교가 시작된 이래 1912년에 이르러 김영관은 형인 김영진과 함께 안규찰 종찰의 지도로 중국의 임강현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감당했고, 이듬해인 1913년에는 윤종두, 윤종진, 이만기, 홍순필 등과 함께 임강현에서 압록강 너머 대안 지역인 평안북도의 자성, 후창으로 넘어가 사역했다. 이때 중국어에 능통한 방사현과
이삭에게는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현이 다른 나라로 갈 중간 정착지였다. 잠시 나가사키에서 거주하던 이삭은 갑자기 개신교회의 주일예배를 가고 싶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인도에 있을 때 유대인이었지만, 개신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개신교의 교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그때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나가사키에 소재한 개신교회 주일예배를 가려고 한 것이다. 1895년 4월 7일 주일 아침, 이삭은 개신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에서 이삭은 그의 일생을 바꾸는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됐다. 바로 알버터스 피터스 선교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알버터스 피터스 선교사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는 예배 후 이삭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해 배우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이삭은 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교리를 배우면서 이삭은 다른 나라로 가려는 일정을 늦추고, 나가사키에서 일자리까지 구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세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약 9개월이 지난 1896년 1월, 이삭은 피터스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게 됐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침례를 준 피터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이삭
114차 총회의 회기가 시작되면서 주목했던 행사는 바로 지난 2월 20일에 열린 전국지방회 워크숍이었다. 과거 교단발전협의회에서 보다 확대된 형태로 진행한 이번 워크숍은 지방회를 대표하는 회장과 부회장, 총무가 참석해 114차 총회 회기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1월 임시총회를 통해 구성된 새 집행부는 총회 사업과 예산 등을 확인하고 각 기관을 순방해 기관 보고를 들은 뒤, 이를 지방회 워크숍을 통해 공유한 자리였다. 그동안의 교단 주요 사업은 정기총회를 통해 보고를 받거나 인준을 통해 진행했던 사업이지만 침례교단만의 정체성을 세우고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이번 워크숍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각 기관 보고 내용 중 기관의 재산 현황 공개와 114차 회기 중점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각 기관의 재산은 그동안 정기총회 의사자료집을 통해서만 대의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자료였다. 1년에 한 번 이뤄지는 정기총회에서 1000페이지가 넘는 의사자료집의 기관 보고 내용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관에 후원하고 있는 교회들도 기관의 후원 현황이나 재정 현황에는 그렇게 관심을
아래 내용은 1990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양찬호 목사(아름다운)가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함께 했던 김호철 목사(현 세도제일)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양찬호 목사는 당시 장은교회를 출석하며 주일학교 교사였던 김호철 목사의 인품과 사역을 존경했다고 한다.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더운 여름 날씨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몸은 건강하시겠지요! 저 또한 선생님께서 염려하시는 덕분에 몸 건강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7월 12일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교사 강습회는 7월 13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됩니다. 7월 14일은 오후 2시부터 시작됩니다. 대전침례교회가 17일부터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바람에 또 연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학교입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시험 또한 끝나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기말고사는 7월 5~6일, 이틀동안 보았어요. 홀가분한 기분 외에 걱정감도 있어요. 이번 여름방학을 잘 보내라 하는데 집안일도 있고 교회의 많은 행사도 있는 바람에 공부가 잘 안될 것 같습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 그리고 8월 6~9일 3박 4일동안 중고등부수련회도 있어요. 재미있을 것 같도 같고 기대도 됩니다. 장소는 학성침
지난 2월 13일 2024학년도 한국침례신학대학교(총장 피영민) 학위수여식이 있었다. 190명의 학사와 175명의 석사, 박사 6명, 목회연구원 7명, 평생교육원 29명 등이 새로운 침례교의 가족이 된 것이다. 그동안 학업에 정진하며 예비 사역자의 길을 준비한 이들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준 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이들을 우리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역자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에 따라 순종하며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먼저 그 길을 걷고 있는 목회자들이 이들의 길을 열어 함께 할 것이다.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사명의 길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목회 현장의 현실이 피부로 와 닿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사역이 나를 향한 부르심인지를 고민하며 이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 목회 현장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교회의 침체 속에서 교회는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적잖은 부담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경제 침체와 물가 상승 등의 외적인 요인으로 수도권 지역의 사역자들이 사역하며 생활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외에도 여러 교회들
전치규 목사(全穉圭, 1888~1944) 전치규는 1888년 1월 5일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리에서 신동으로 불렸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고을에서 한학자로 활동하며 존경을 받았다. 20세(1907년) 때 영동구역 울진에서 활동하던 손필환 교사(전도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했고(이때 전치주, 남규연 등 8명이 함께 개종), 이후 울진지역에 행곡과 척동에 교회가 세워져 부흥함에 따라 울진구역이 설정됐다. 학문이 뛰어났던 전치규는 개종 직후 펜윅의 비서로 발탁돼 원산총부로 갔다. 그는 총부의 사무를 보는 한편 펜윅 밑에서 6년간 성경을 공부했으며, 조력자로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펜윅이 한글로 번역을 하면 어휘를 다듬고 바로잡는 일은 그가 담당했는데, 먹을 갈아서 일일이 붓으로 썼고, 한 번 쓴 것을 다시 교정을 보고 나면 또 고친 부분이 많아 다시 써야 하는 등 5~6번 기록하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신약성경 전체를 쓰는데 며칠이 걸렸는데, 이로 인해 밤을 새는 건 다반사였으며, 그의 손이 부르틀 정도로 붓으로 기록했다. 이런 정성을 통해 나온 성경이 바로 원산 번역 ‘신약성경’으로, 그는 이를 다 손으로
나라가 위기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일본의 강제 침탈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며 교회와 나라, 민족을 위한 기도가 시작됐다. 다시 나라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교회였다. 나라가 독립을 이루고 첫 제헌국회가 시작된 날에 제헌국회에서 가장 먼저 이뤄진 것은 나라를 위한 기도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시기에도 삶의 터전을 잃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 부르짖어 이 나라가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했다. 불과 수년 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멈추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기에도 교회는 묵묵히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갔다. 최근 대통령의 탄핵과 끝나지 않는 세계 분쟁의 여파는 우리의 모든 삶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경제는 한파처럼 꽁꽁 얼어 붙었다. 부동산 경기를 비롯해 모든 경제활동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는 점점 더 극단으로 향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건전하고 건강한 정치 형태는 사라진지 오래가 됐다. 무엇을 위해 보수와 진보가 갈등을 선택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굽히지 않는 시대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이다. 교회도 이
자유! 성 어거스틴은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자유와 자연인에게의 자유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자연인에게 자유라는 의미는 내가 하고 싶고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실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단편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자유까지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자유가 대표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자유라 함은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자유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내 것을(내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실존주의적 자유이다. 고린도후서 5:13~14에 따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였으니 기록된 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1)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
아래 내용은 1990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양찬호 목사(아름다운)가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함께 했던 김호철 목사(현 세도제일)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양찬호 목사는 당시 장은교회를 출석하며 주일학교 교사였던 김호철 목사의 인품과 사역을 존경했다고 한다. 선생님께! 이제는 무더운 여름이 기승을 부리고 모기와 파리도 제 때를 만난 듯 귀찮게 구는군요. 몇 달 동안 편지 한 번 드리지 못한 것 정말 죄송합니다. 두 번씩이나 선생님의 얼굴을 뵈었을 때, 어찌나 부끄럽고 어찌나 죄송스럽던지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얼굴을 들고 뵙게 될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선생님 몸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학원에 다니는 것을 생각하니 게을렀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생전 접해보지 못했던 영어를 공부하시려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전 벌써부터 영어를 포기할 직전이예요. 그러나 선생님이 하시는 것처럼 다시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주일학교는 잘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주일에는 32명(교사 포함 36명)이나 출석했어요. 목사님과 상의해서 달란트도 다시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기쁜 것은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늘었어요. 홍경숙이 지난 주일 9
1990년 중반기에 북한은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과 더불어 큰 홍수의 영향으로 식량난이 심각해졌고 중국은 장쩌민 개혁개방의 지도력으로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북한의 전역에서는 질병과 식량난으로 주거지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의 길림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조선족 친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일부 사람들은 탈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됐다. 때맞춰 한국의 방송 채널들은 탈북자들의 실상과 북한의 식량난에 대해 방영함으로 식량난의 심각성을 알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요청했으며, 한국의 기독교 단체에서는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지원을 모색했다. 더불어 탈북자들을 통한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통일의 꿈이 싹트는 통일 선교의 시대를 열게 됐다. 식량난이 선교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이다. 통일선교는 무명의 작은 손길에서 시작됐다. 당시 중국 연길에는 북한 선교와 탈북민을 돕기 위하여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사역하고 있었다. 김진홍 목사의 두레교회에서도 연길 두레마을 개척하는 상황에서 개척팀장으로 수고하는 이병승 목사를
지난 몇 회에 걸쳐 일제강점기 한국침례교의 항일운동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진술했다. 이제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수난당한 교단 대표 32인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 순서는 예심에 회부된 9명을 먼저 언급하고, 비록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으나 감옥에서 동일한 고초를 겪은 23명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이종근 목사(李鍾根, 1891-1945) 이종근은 1891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는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 가문이었고, 부친은 지역의 유명한 한학자요 선비였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유년 시절은 북만주의 소란대미에서 보냈다. 그는 의지가 굳건하여 무엇이든지 결심하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으로 인해 마을 어른들과 친구들로부터 “의지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908년(17세) 함경북도 경흥과 간도를 순회하던 펜윅이 간도에서 이종근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이내 개종을 했다(이때 최성업, 이종만, 장진규 등도 함께 개종). 펜윅의 간도 순회 이후 1909년부터 간도지역 전도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이후 부흥하기 시작해 제4차 대화회(총회) 때에 간도구역이 설정됐다. 그는 입교 초기부터 교회 생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우리나라는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고 있다. 사태 초반 많은 국민들이 뜬금없는 비상계엄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물론 당시에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고유의 통치행위라며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긴 했지만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교회 또한 그랬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난 2024년 12월 12일 전국 담임목사 120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탄핵에 67%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비록 같은 시기 한국갤럽이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보다는 찬성 비율이 낮긴 했지만 3분의 2명이 탄핵을 찬성하며 대통령의 친위쿠데타(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집권한 정치 지도자가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스스로 벌이는 쿠데타)를 비판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대통령이 이번 비상계엄을 일으킨 이유가 부정선거 음모론에 심취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이다. 그동안 부정선거 음모론을 끊임없이 밀어 부쳤던 세력은 이 기회를 틈타 강력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계엄군이 선거관리위원회에서 99명의 중국인들 붙잡아 주일미군에게 인계했다는 가짜뉴스까지 퍼지며 점점 반응이
우리교단에서 목회자를 돕는 기관을 찾는다면 전국남선교연합회(전남연)와 전국여성선교연합회(전여회)이다. 이 두 기관은 침례교회 성도들의 연합이며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역을 전개하며 성도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며 교회와 목회자를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침례교회의 역사 가운데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 섬김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있는 일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 두 기관은 침례교단의 중추였고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정치와 경제, 사회 전분야가 위기 가운데 있는 현실에서 침례교회의 구성원들의 역할도 중요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개교회주의라는 미명 아래 교회 중심의 사역에 머물며 협력과 협동의 정신을 구현하지 못한 일들을 우리는 시간을 지나면서 경험해 왔다. 특히 전남연은 일부 회원 중심의 사역으로 협력의 길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우선이며 교회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기관 사역을 전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과거를 철저히 돌아보고 비전을 품으며 그 비전을 실천해 옮길 수 있는 역량 있는 일꾼들로 새롭게 세워져야 할 때이다. 지난 2024년 설립 70주년을 맞이했던 전여회는 향후 선교적 비전을 추구하며 이에 대한 다양한 과제들을 설정하고 이를
제8 피고인 신성균(平山聖均)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운 후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타이쇼(大正) 5년(1916년)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됐고, 동 12년(1923년) 교사가 됐고, 다음 해(1924년) 목사로 선임되어서 현재에 이른 자이다. 쇼와(昭和)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昭和) 17년(1942년) 9월 상순 경까지 소속되어 있던 경상북도 영일군 송남면 광천리 광천교회에서 매 일요일 예배의 때 신자 이OO 외 약 30명에게 전기와 같이 설교를 했다. 제9 피고인 박성도(竹山成道)는 경성 기호중학교를 중퇴한 후 서당 교사,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메이지(明治) 44년(1911년)경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되어 타이쇼(大正) 13년(1924년) 감로가 됐고, 쇼와(昭和) 14년(1939년) 4월 목사에 선임됐다. 이후에 함경북도 함흥 종성에서 구역을 담당하고 현재에 이른 자이다. 쇼와(昭和)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昭和) 17년(1942년) 9월 상순경까지의 기간 중 관할하는 구역인 나진교회 등에서 매월 1회 평균 예배 시 신자 김태복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