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행이 좌절됐던 토마스 선교사의 눈앞에 나타난 ‘제너럴셔먼호’는 기회였다. 제너럴셔먼호는 민간상선이었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아편전쟁 등의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민간상선인 제너럴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미개국(未開國)으로 여기며, 조선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이었다. 그는 배에 보급품을 채우고, 선원을 모집하기 위해 중국에 기항했다. 그러나 기항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용선계약이었다. 용선계약은 선박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무역회사 등)가 선박회사로부터 선박의 전부 또는 일부를 빌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을 가리킨다. 선주 프레스턴은 영국 회사인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교역할 상품을 싣고, 그 다음으로 조선어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메도스 상사의 알선으로 인해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미
1997년 제86차 교단 정기총회가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서 있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신학교에 입학한 첫 해였고 교단 총회가 진행되는 상황이 궁금해 총회 회무를 참관했다. 회무 참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안건 중에 하나가 총회 차원에서 사회복지법인 설립의 건이 의결됐다는 것이다. 신학교 1학년 때의 기억은 침례교가 미래를 준비하는 좋은 교단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교단 내에서 교회의 봉사와 사회복지사업을 총괄하는 부서는 부재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와 사회봉사의 약 70% 이상은 교단이나 교회가 설립한 재단, 기독교 단체 혹은 기독교와 연관된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 중 교단 차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이 구세군과 감리교단, 성공회 등이라고 할 것이다. 구세군과 감리교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복지법인을 설립해 지역사회에 필요한 복지 욕구를 해결하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사업과 봉사활동, 사회적 책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예장 통합교단과 합동교단도 많은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구세군의 경우 유지재단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자선냄비 모금…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은 침례교와 구세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거의 모든 개신교파가 시작된 영육 부흥의 땅입니다. 말씀을 사랑했던 센스 어필 오감설교의 대명사 찰스 스펄전 목사를 지근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교의 선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요한 웨슬레는 설교할 강단도 교회도 없을 때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All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최근 필자는 영국을 탐방하면서 영국민과 만나는 세계인들에게 성경과 설교, 찬양이 선교적 유튜브 명함을 건넸다. 그들에게는 무명의 목사일지라도 세계 언어로 번역이 제공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을 중보하며 복음을 건네면서 역사적 현장을 밟고 다녔다. 영국은 한 때 전국민이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때가 있었지만 현재는 1% 내외의 소수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전수하고 있는 땅이다. 전세계에 신앙의 꽃을 피웠던 나라이기에 우리가 흠모하는 땅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울 이후 “남은 자”를 철저하게 구별시킴으로 역사해 오신 하나님 복음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탐방을 기획하며 그들의 성정을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목회자가 되고 침례교 목사가 되면서
침례신문사에서 교회건축세미나를 진행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서울지역 세미나에 등록해 참석했다. 교회건축 설계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재개발과 재건축 대비 등 교회건축 길을 볼 수 있었다. 교회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이고, 가장 많은 문제가 일어나게 하는 요인이 건축자금 부족이다. 교회건축 자금 부족함으로 인해, 목사와 교회는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찾는다. 또 다른 한 문제는 시공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교회건축 시공사들이 교회건축 중에 공기연장과 추가자금 요구, 그리고 설계변경 등으로 추가자금 투입으로 인해 교회와 목사들을 너무 힘들게 해 온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혹은 팁을 알려줬다. 첫째, 설계계약을 할 때 ‘준공 때까지 설계를 책임진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하라는 것이다. 둘째, 건축비를 지급할 때에는, 계약때에 10%를 주지 말고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 정도 주고, 착공때에 20% 주고, 준공때에 30%를 주는 것이 사기를 덜 당할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설계와 건축과 준공에 이르기까지, 총괄 시공할 수 있는 하나의 시공사와 계약하는 것이 건축비용이 덜 들어간다고 했
어느 덧 뿌리 이스라엘 2차 원정대는 유다 산지와 블레셋 해안 평원 사이의 완충지대 쉐펠라에서 소렉, 엘라, 구브린, 라기스 등지 곳곳을 삼손, 다윗과 골리앗, 르호보암, 미가, 히스기야, 이사야와 함께 걷고 뛰었다. 성지순례의 원론적인 목적이었던 성경 속 지명을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 말씀을 펼칠 때보다 생생하게 그 날의 그 땅을 감각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랬고 그 목표는 다섯째 날을 지나며 여정과 함께 무르익어 갔다. 뿌리의 순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유연함, 그 혜택의 정점 또한 이 날의 여정 속에 존재했다. 머물렀던 지난 숙소들이 괜찮은 수준이었다면 단 하루 묵었던 데이비드 사해 호텔(David Dead Sea Hotel)은 사해의 빼어난 전경이 전 객실에서 조망되는 위치에 다양한 메뉴를 구비한 식당을 갖춘 곳이어서 어른 아이 모두의 열광을 이끌어낼 만큼 훌륭했다. 떠나올 때의 아쉬움이란…. 이동 거리를 단축해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최소화 할수록 여행의 효율성이 올라간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지점이 순례가 묵상의 물길을 터주고 그 길이 막히지 않도록 일련의 연결성을 유지하는 여정이어야 한다는 점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게 일정을 안배한 여행사와 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으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된다. 도시의 모든 호텔이 만실이었던 어느 저녁, 볼트가 근무하는 호텔로 선한 인상의 노부부가 찾아왔다. 볼트는 그들이 투숙할 방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부부의 실망 어린 표정을 목격한 순간 그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 방에서 묵으시면 어떨까요? 어차피 전 내일 이른 아침까지 교대 근무해야 해서요. 물론 특실은 아니지만 최소한 주무실 침대는 있으니까요” 노부부는 한사코 거절하려 했지만 볼트는 끝까지 권유했다. 진심으로 자신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감동한 노부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진심 어린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 볼트는 한동안 두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호텔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익히고 훈련받았다. 2년 후 어느 날, 갑자기 볼트는 노부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들이 보낸 초청장에는 뉴욕행 기차표가 들어 있었다. 뉴욕에 도착하자 기차역으로 노부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은 볼트를 데리고 피프스에비뉴 34번가에 있는 거대한 빌딩 앞에…
조선행이 좌절됐던 토마스 선교사의 눈앞에 나타난 ‘제너럴셔먼호’는 기회였다. 제너럴셔먼호는 민간상선이었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아편전쟁 등의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민간상선인 제너럴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미개국(未開國)으로 여기며, 조선 개항을 선점해 한몫 잡을 생각이었다. 그는 배에 보급품을 채우고, 선원을 모집하기 위해 중국에 기항했다. 그러나 기항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용선계약이었다. 용선계약은 선박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무역회사 등)가 선박회사로부터 선박의 전부 또는 일부를 빌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을 가리킨다. 선주 프레스턴은 영국 회사인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교역할 상품을 싣고, 그 다음으로 조선어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메도스 상사의 알선으로 인해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가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
둘째 아이를 임신했지만 빚쟁이에게 쫓겨, 오산리금식기도원으로 도망가고 금식에 금식을 거듭하던 어느 날부터 몸이 탱탱 붓고 숨이 차고 심장이 조여 왔다. 예정일을 1주일 남겨두고 부산 침례병원에 갔다. 치료해야 출산할 수 있다고 이대로는 나도 아이도 위험하다고 어찌 이렇도록 임신부를 놔뒀냐고 남편을 나무라시는 의사의 말에 입원했지만 병원비를 마련할 길 없으니 막막하기도 했다. 치료도 못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둘째가 태어났지만 아기도 입원하고 산모도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입에 죽을 떠 넣으면서 정신을 차리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남편을 만나게 해주신 목사님과 사모님이셨다. 동짓날이라 팥죽을 가지고 와서 먹이셨던 것이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사랑의 손길을 통해 병원비 일부를 보내셨고 침례병원의 많은 배려로 무사히 치료받고 아기와 함께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해서 그 추운 동지섣달에 천막 한 켠에 합판으로 막아 방이라고 겨우 살고 있으니 어찌 산후조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길 건너 이웃 장로교에 다니는 성도들이 천막 교회 사모가 출산했으나 먹을 것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돈을 모아 성미를 모으고 소고기 한 근
선교사 직분을 사임한 토마스는 중국을 떠나 영국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귀국은 쉽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는 생계를 위해 산둥성에 소재한 항구도시 ‘즈푸’의 세관에서 통역사로 취직했다. 지도를 보면, 항구도시 즈푸의 우측 방향에는 서해(황해)가 있는데, 서해(황해)를 넘으면 바로 조선이었다. 세관에서 일하게 된 토마스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일에 전념했다. 약 9개월 정도 일하게 됐는데, 이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알렉산더 윌리엄스 선교사를 만나 호형호제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스는 윌리엄스 선교사를 통해 조선인들과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그 조선인들은 김자평과 최선일이라는 천주교 신자였다. 김자평과 최선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조선은 1791년 신해박해(천주교 신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0년 북경교구에서 내린 ‘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 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모두 불태우며, 윤지충의 어머니 장례를 전통적인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 처형당한 사건)를 시작으로 이후 천주교에 대한 크고 작은 여러 탄압과 박해가 많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천주교를 조선의 전통적인…
본래 다섯째날 방문하기로 했던 유대인 최후 항전 요새인 마사다 국립 공원이 우리의 여정 넷째날까지 오픈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며칠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져 금일의 일정과 후일의 일정을 바꿔 진행하게 되면서 갈릴리 침례식 다음날인 네 번째 날 문제의 요단강 침례터를 전격 방문하게 됐다. 원래의 침례식 거행 장소였음을 밝히자 아이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1차 때보다 모여든 순례객의 수가 현저히 줄어 혼잡은 덜했으나 여전히 강물은 혼탁했고 뚜렷한 기준없는 차림 혹은 탈의한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적잖이 보이니 차갑긴 했지만 잔잔한 유속과 맑은 수질의 갈릴리에서 오롯이 우리들만의 침례식을 거행함이 선물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했던 엘리사가 여리고성의 물을 소금으로 치유해 새롭게 만들었던 일을 기념하며 보존되고 있는 여리고 동편 엘리사의 샘을 지나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던 일명 시험산 조망 스팟을 지나던 중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외국인 성지순례객을 태운 한 버스의 기사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3년 전 1차 뿌리 이스라엘 원정대를 태우고 순례 기간 내내 정을 나누었던 기사 리프핫이었다. 더욱
중국에서 존 로스가 들었던 뜻밖의 비보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사망한 것이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일명 토마스 선교사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또 개신교 선교사 중 최초의 순교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최초에 의미를 두고 연연한지 모르겠지만,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각각 최초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조선 최초의 선교사라고 하면,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를 의미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통해 선교사 최초로 평양에 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이보다 1년 전인 1865년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연평도에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1832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 속한 ‘고대도’라는 섬에서 복음 사역을 했던 독일인 개신교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칼 귀츨라프’ 선교사다. 귀츨라프는 ‘고대도’ 도민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이것이 한글 성경 전체의 번역을 한 것이 아니지만, 비록 단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일생 중에 그분을 떠나지 않을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합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삶 속에서 전하는 자로 살겠습니까?” 호수의 풍광이 간신히 짐작될 만큼 이른 새벽이었다. 우리의 죄된 심령처럼 어둠이 깔린 그 시간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영혼과 온 생애 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이기를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 여정 셋째날의 첫 행보인 침례식을 행했다. 아멘! 아멘! 우리 모두의 심령 안팎에 마침 태양이 떠올라 서로가 은혜로 상기된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을 즈음 아마도 전무후무할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침례식이 마무리됐다. 이곳보다 그리스도를 풍기는 곳이 또 있을까. 순례 중의 침례의식은 의례히 예수님께서 몸을 담그셨던 요단강에서 행해지나 우리는 변화를 주고 싶었다. 1차 순례 중 요단강에서 한 성도님이 침례를 받으셨는데 장소가 품은 의미는 충분했으나 지극히 현실적으로,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탁했던 강물과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몸을 담그고 드나들어 매우 혼잡스러
사역자라는 신분 덕에 두 차례의 여정을 모두 경험했던 나는 1차 순례 내내 아이와 함께 오지 못한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막 성인이 된 자녀에게 더 이상 부모란 이유만으로 믿음을 강제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시점에 다녀온 첫 순례였다. 모태 신앙인 혹은 일명 묵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없이 흘러드는 말씀은, 무시하자니 꺼림칙한 오랜 기록물에 불과한 것인데 그 결정을 따라 나섰더니 강과 산, 광야가 발 아래에서, 눈 앞에서 그날의 그분을 재증언해 줬다. 구멍 난 믿음의 틈새가 메꾸어지는 경험이랄까, 신앙이 새바람으로 환기되는 경험이랄까. 다음 순례는 무조건 딸아이와 동반하리라는 결심을 어여삐 보셨는지 뿌리교회의 2차 순례는 자녀 동반 중심으로 기획됐고 심지어 아이들의 침례식이 여정에 포함됐다. 대망의 순례 첫날 경유 공항인 이스탄불에서 생각보다 긴 출발 지연 상황을 만나 첫날의 원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되어 최적의 이동 경로를 확보하고자 과감히 므깃도 방문을 빼고 가이사랴 항구에 제일 먼저 들렀는데,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보다 많은 부분이 보수돼 우기임을 잊을 정도로 빛나는 햇살을 품고서 한층 유적지다운 모습으로 뿌리 2차…
3년 전 1월,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기 직전 그 땅을 밟았다. 세워진 지 겨우 4년 남짓한 미자립교회의 배부른 행보였다. 온 성도로 하여금 성경 속 지명을 입체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겠다는 담임 목사의 말씀 중심 목회 지향성이 불러 낸 거룩하고도 거국적인 사단(事斷)이었다. 올 1월, 기세 꺾인 코로나 덕분에 다시 한 번 그 땅을 밟았다. 아마도 가보지 않은 최후의 성도가 짐을 꾸려야 이 복된 소요가 멈출 것인데 교회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니 끝을 가늠할 길이 없다. 3년 마다 일명 뿌리 이스라엘 원정대의 구성원이 달라지는 것은 거의 필연적 요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련해야 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은데다 최소 7~10일 정도의 외유가 허락돼야 하다보니 경제적, 일상적 처지에 결행 여부가 달려있다는 점 그리고 각종 예약, 예매일을 앞당길수록 비용이 절감되다보니 순례일보다 수개월 앞선 시점에 참여여부를 확정지어야 하는 등 알고 보면 은근 모험심이 요구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성지순례가 마치 선별된 자들만 갈 수 있는 듯 소개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인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신자의 관점에서 분명 순례 여정은 여느 여행과 차별된 걸음
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것은 영국에서 온 ‘존 로스’ 선교사였지만, 그의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 교재와 띄어쓰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대중화시킨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미국의 ‘호머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었다. 때문에 당시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는 시도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해줬다. 그런 그였기에 고종에게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 서구의 언어식 표기요소를 적극 권장했고, 또한 국문연구소 설립을 건의하여 만들게끔 했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에는 본격적으로 띄어쓰기 등이 도입되게 됐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는 정착단계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과거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