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12월 8일 캐나다 독립 선교사였던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이 제물포에 도착해 이 땅에 침례교회의 씨앗을 뿌린 이래로 13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를 기준으로 올해는 115차 정기총회가 열리는 해이기도 합니다. 한국 침례교 135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구한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기간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 교단이 폐쇄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웠습니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 남침례회(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협력으로 재건한 기독교한국침례회는 현재 139개 지방회, 약 3,500개의 소속교회, 70만 성도로 성장했습니다. 한국 침례교회의 성장은 세계 침례교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고 성공적인 성장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성장의 이면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에 속한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밑거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35년 동안 급변하는 시대적인 요구 속에서도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침례교 신학과 신앙을 타협하지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입니다. 저는 이번 기독교한국침례회 신앙고백서 채택을 지지, 찬동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침례교단 동역자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는 가장 복음적 교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적 교단에 속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복음의 핵심은 결국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시고 주님이라는 것. 둘째, 그리스도께서 구주와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고백이 복음을 가장 복음답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복음적 사역자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침례교단은 그동안 소위 신조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신조를 별로 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Creed(신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도신경을 우리 침례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예배 시간에 잘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를 부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1. 성경 성경은 하나님께 영감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됐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담고 있는 보물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것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고, 그 내용에 어떤 오류도 섞여 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구원받는 지식과 믿음과 순종의 유일하고 확실하며 권위 있는 규칙입니다. 성경은 지금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기독교적인 연합의 참된 중심이며, 모든 인간의 행동과 신조들과 종교적 견해들을 검증할 최고의 표준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초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 만물의 조성자이시며 보존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자신 안에 모든 완벽하고 무한한 속성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적이시며, 영적이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며, 창조주요, 심판주요, 구원자요, 보호자이시며,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은 그의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미래의 결정들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까지 미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과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안성시 공도에 있는 함께하는교회의 김인환 목사입니다. 제112차 총회, 78대 총회장을 역임한 저는 저희 112차 총회 임원회를 통해서 “우리 규약위원회의 신앙 고백서를 연구해 주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위원회에 연구 의뢰를 했고, 그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나왔습니다. 그동안 규약위원회에서 지난 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에 연구하시고 또 특별히 한국 침례신학대학교 조동선 교수님과 박홍규 교수님, 귀한 두 분이 함께 연구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귀한 열매를 내게 된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단에는 이상과 주장이 있지만, 이 이상과 주장을 좀 더 강화하고 해설하는 해설서와 같은 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르겠지만 신앙고백서는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차후에 연구하며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보완해서 그 이후에 다시 첨삭하면 될 것입니다. 이번 115차 정기총회를 통해 이번 규약위원회가 상정하게 된 신앙고백서가 잘 채택돼서, 대내적으로는 우리 이상과 주장을 좀 더 강화하고 이해하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3,500개 모든 교회 공동체의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만약 역사 지식이 있다면, 침례교 운동이 시작될 때 신학 전통이 칼빈주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나는 1993년 남 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총장으로 선출됐고 교단의 모체 역할을 하는 신학교가 이 신학을 되찾는 임무를 맡았다.”(앨버트 몰라 서든뱁티스트신학교 총장) “(예정)의 논리적인 결론은 복음 전도가 불필요하게 된다. … 일반적으로, 침례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신앙, 그리스도인 삶, 제자가 될 초대를 받아들일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W. R. 이스텝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 원로교수) “만약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칼빈주의 트로이 목마 안에 숨어있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신앙과 실천들이 우리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밥 앨런 목사, 알라바바제일침례교회, Connect316 실행위원장) 논쟁은 때로는 치열하게 전개된다.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악마화하고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남겨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논쟁은 지난 역사와 현 상황을 되돌아보고 그 주체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
넓은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봤던 신성균 목사는 하루에 100리 길을 걸으며 예배를 인도했고, 교회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927년부터는 충청북도 제천구역에서 사역하면서 인근 예천구역과 경상북도 포항구역까지 순회했다. 1942년 9월 6일 경상북도 점촌에서 활동하던 신성균 목사는 일본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교단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대한 체포의 일환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이내 원산으로 압송이 됐는데, 이때 경상북도 점촌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주언 감로와 이덕상 감로도 함께 압송됐고, 이곳 헌병대 유치장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신성균 목사가 체포되었을 당시 45세로, 체포된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젊은 나이었으나, 일제의 고문에 따른 탄압과 열악한 옥중생활을 견디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되어 15일간 재판을 받았는데, 그 결과 함께 검속된 32명 중 그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노재천·장석천·박기양·백남조·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신성균
‘권서인(勸書人)으로 조선에 들어가라!’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일본 담당 총무이자, 훗날 일본 최초의 장로교회인 요코하마 제일장로교회(요코하마시로교회)의 초대 목사로 섬기게 되는 ‘헨리 루미스’의 제안을 피터스는 받아들인다. 당시 일본의 권서인은 미국 성서 공회에 소속되어 성경이나 복음서를 전하며,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돕는 사역자였다. 영어로는 Colporteur라 불리며, 이는 프랑스어 ‘col(목)’과 ‘porteur(운반한다)’에서 유래한 말로,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고 책을 운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권할 권(勸)’을 표기해,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경을 ‘권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한편으론 책을 팔았다고 해서 ‘매서인(賣書人)’이라고도 불렸으나, 책을 권하는 사람인 ‘권서인’으로 불리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훗날 많은 권서인들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사역했는데, 특히 황해도 송천리(松川=소나무가 있는 냇가)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교회가 생겨났는데, 이 교회가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다. 소래교회는 조선인이 세운 조선 최초의 교회(1883년)고,
신성균 목사(申聖均, 1897~1985) 신성균은 1897년 10월 12일 경상북도 문경군 점촌읍 점촌1리에서 신학희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5세 때(1912. 11. 26) 같은 마을에 사는 박소암의 외동딸 박음점과 결혼하여 일찍부터 가정을 꾸렸다. 1914년 1월 5일 이만기 성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기독교인이 됐고, 유곡교회에 출석했다. 같은 해 9월 25일 이종덕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고, 이후 성경의 진리에 빠져들기 시작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과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 개종은 가족들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인내로 복음전도에만 매진하여 이를 극복해냈다.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신성균은 가정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 전도의 직분을 받았고, 단양지역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주민들로부터 상투가 잘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상투가 잘리자 단발을 한 후 짚신 감발로 전도사역을 이어갔다. 1917년 간도의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2차 대화회(총회)에서는
프로 골프 PGA 정회원, 2011·2012년 연속 대한민국 골프지도자 대상 수상, 24년간 SBS Golf, MBC Sports, JTBC Golf의 골프 해설과 프로그램 기획·제작, Teaching & Coaching 관련 방송 메인 MC, 900여 편의 방송 기획·제작 등 내 이름 앞에 붙은 화려한 경력이다. 이런 성장을 이루기까지 늘 나의 힘이 된 것은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었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 한 번 못 한 11살 때,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없는 외로움과 가난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신문 배달을 했고, 방학에는 연탄공장에서 일을 했다. 힘들 때마다 ‘우리 욱휴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밤새워 공부해 중·고등학교 때는 장학금을 받으며 반장과 학생회장을 했고, 꿈꾸던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여러 장학금과 과외교사로 대학 시절에 대기업 임원 월급 2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그때 과외를 하던 제자와 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함께 유학을 가든지 헤어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백남조 목사는 평소 동료들로부터 “꼬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요 진리에 관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공과 사가 분명했고,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었다. 본 교단의 교규집 제13조 벌칙 43조에 “교역자 및 교우 중 성경에 교유된 점에 배이된 중대실태 또는 위반행위가 있을 경우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교훈과 같이 개인적으로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치 않을 경우는 2~3명 교우를 위원으로 하여 권고토록 하고 또 이에도 불순종할 경우에는 개교회에 있어서 공개 권고토록 하고 그 때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44조에 벌칙의 종류는 출교, 정권, 권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단의 교칙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규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 교회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히 시행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법집행을 통해 교단 행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올바로 잡히는데 크
백남조 목사(1875-1950) 백남조는 1875년 6월 9일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광천리에서 백운락의 4남 1년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비요 한학자였던 그는 일찍이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으나 반일사상가라는 명분으로 축출당해 귀국했다. 고향에서 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던 중에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받아 영일 군청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35세 때(1910) 대한기독교회의 한 순회 전도인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이후 복음 전도에만 전념했다. 1912년 개최된 제7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 직분을 받아 강원도 울진, 울도(울릉도), 경상북도 예천, 포항지역에 전도사역을 했으며, 특히 허담이 울진구역 총찰로 임명되자 그가 맡고 있던 원우학교를 백남조 전도가 위임받아 관리했다. 순회 전도에 전념하던 그는 1919년 간도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4차 대화회(총회)에서 김재형, 김영진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충청북도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파송을 받아 순회 사역을 했다. 1924년 강원도 울진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는 백남조 목사를 울진, 울도(울릉도), 포항지역으로 파송했고, 1925년 원산총
기후 위기는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장마를 통해 우리에게 가슴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극한 기후’라는 말을 남기며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재해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고지대로 혹은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하며 기후 위기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처럼 창조 세계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자녀인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이는 외면하거나 방임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대처할 과제이다. 창조세계의 회복과 보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지구를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꼭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급변하는 지구 생태계 위기는 비단 우리 시대, 우리 교회만의 도전과 관심사가 아니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들도 파괴된 숲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0세기 초에 창설된 시토 수도회도 다른 영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삼림복구를 위해 나무 다시 심기 운동을 벌였고, 훼손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우리 시대의 주 관심사인 생태운동(生態運動)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역사에서 진행되었던 일이다. 현재 인류의 주소는 423이라고 한다. 423은 무슨 숫자일까?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이다. 마리아와 요셉
박기양 목사(朴基陽, 1894-1979) 박기양은 1894년 10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청북동에서 박규석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5세 때(1899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해 4년간 수학했는데, 훈장이 가르침에 따라 잘 읽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배우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등 그의 자질이 뛰어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서당을 수료할 즈음 모친의 병세가 악화되어 1903년 9월 세상을 떠났고, 아내를 잃은 부친은 방황하다가 훌쩍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로 인해 박기양은 졸지에 부모를 잃게 됐고, 급기야 1년 후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다른 동생들과 함께 외갓집에서 성장했고, 17세 때(1911년) 소산동에 살던 임학이의 장녀와 결혼했다. 1911년 4월 충청북도 영동에서 활동하던 박영호 전도인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고, 1915년 이종덕 감목(총회장)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경상북도 포항 조사리에서 개최된 제10차 대화회(총회)에서 반장 직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인으로 임명받았다. 1917년 2월 4일 장남이 출생했으나
5. 노재천 목사(盧載天, 1884-1964) (2)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때를 위하여 준비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새로운 힘을 얻어 앞을 막고 있는 준령을 넘기 시작했다. 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므로 새로운 용기와 남은 힘을 다하여 준령을 넘어 약무초안교회에 찾아 들었다. 형제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고 힘을 얻은 그들은 곧 사경회를 열어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노재천 목사는 간도에서 활동하다가 1924년 강원도 행곡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에서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이후 이곳에서 순회사역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1938년 웅기교회의 ‘달편지’ 발각사건이 발발했다.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는데, 이는 동아기독교 탄압의 빌미가 되어 노재천 목사를 포함해 김영관 감목(총회장)·백남조 총부서기·이종덕 목사·전치규 목사 등이 원산경찰서로 소환됐다. 일제의 강압적 조사와 무자비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답변으로 인해 일제는 가둔지 3개월 만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여 5개월간 원산교도소에 감금했다. 이후 더
기독교로 개종한 후, 피터스(이삭)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자 지도자인 알버터스(피터스) 선교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알버터스 선교사는 단순한 신학적 교리 교육을 넘어, 성경 해석과 설교, 교회사, 선교학의 기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지도를 통해 피터스의 신앙과 지식을 세심하게 다듬어 줬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몇몇 개신교 선교사들이 함께 운영하는 소규모 성경학교가 있었고, 피터스는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으며 신학적 기반을 쌓아갔다. 정통파 유대인 청년이 침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됐다는 소식은 나가사키를 넘어 규슈 전역, 더 나아가 일본 전체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혼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사역하던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피터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ty) 일본 담당 총무로, 후에 일본 최초의 장로교회인 요코하마 제일장로교회(요코하마 시로 교회)의 초대 목사로 섬기게 되는 인물이다. 루미스는 피터스를 만나기 위해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