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 그 중에서 고고학박물관에 가신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람 아닌 사람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사람 모양의 토관들이다. 이 유물은 지금부터 3300~3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용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관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가자에 있는 텔 테이르 엘-발라(tel Deir el-Balah)에서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모세 다얀(Moshe Dayan)이 개인적으로 무단 발굴해 소장했다가 1981년 박물관에 기증․판매된 ‘다얀 컬렉션’의 일부이다. 이 토관은 보통 사람 키보다 크고(160~195cm), 이집트 오시리스 수염과 팔 모양을 한 모습으로 마치 이집트 미라를 위한 관 모양과 유사한데 관 안에서는 고인의 유골과 함께 사후 세계에서 사용할 토기, 장신구, 청동거울, 무기 등이 함께 발견됐다. 이 토관의 주인공들에 대한 규명은 명확하지는 않다. 이집트 사람과 밀접한 교류 지역이니 이집트 사람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집트 장례문화의 영향을 받은 블레셋 사람 또는 가나안 사람일 수도 있다. 아직 DNA분석까지 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그런데 고고학 박물관에 갈 때마다
피터스 선교사가 머물렀던 제주도는 오랫동안 ‘유배의 섬’으로 불렸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인물들이 이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육지와 떨어진 지리적 특성은 감시와 통제를 용이하게 했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도 인조반정 이후 제주로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이렇게 제주는 중앙 권력의 끝자락이자,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의 종착지였다. 최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왕과 같이 사는 남자”는 6대 임금 단종의 비극을 다시 소환했다. 단종은 1452년 12세(10세)에 즉위했으나, 숙부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1453년)으로 1455년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고, 1457년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이 영화의 감독 장항준은 왜 수양대군(훗날 세조)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등장하면 악역 한명회의 무게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는 서사의 집중을 위한 영리한 선택이다. 이렇게 단순해야 힘이 있다. 단순하다는 것은 메시지를 한 지점에 모으는 일이다. 설교와 강의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내용을 나열한다고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핵심에 집중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한
한 마을에 거울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거울은 마을을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밝고 건강해 보일 때는 거울을 더 열심히 닦았다. 사람들은 그 거울을 보며 안심했고, 거울을 통해 비치는 마을의 모습이 곧 현실이라고 믿었다. 거울은 마을의 자랑이었고, 관리자는 그 자랑을 지키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얼굴에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상처를 지우기 위해 거울에 금칠을 했다. 처음엔 번듯해 보였다. 빛이 더 강해진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도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금칠이 두꺼워질수록 거울은 더 이상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을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거울이 진실을 비추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 순간 거울은 자랑이 아니라 불신의 대상이 됐다. 아무리 화려해도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울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단지는 교단의 홍보 매체다. 이 사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공동체의 사역과 방향을 알리는 일은 분명 중요한 역할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홍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는 순간,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역
설 연휴는 한 해의 시작점에서 공동체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시간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던 가족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관계의 무게와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명절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결을 다시 잇는 시간이다. 가족은 신앙의 첫 공동체다. 믿음은 예배당에서만 형성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사이에서 나누는 말과 태도, 갈등을 대하는 방식 속에서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언어를 갖는다. 설 연휴는 가족 안에서 무뎌졌던 마음을 돌아보고, 미뤄두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신앙의 말이 삶의 말로 이어지는 자리도 바로 이때 마련된다. 하지만 명절의 풍경은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설 연휴가 가까워질수록 더 깊은 공허를 느끼는 이들도 있다. 홀로 지내는 노인, 외국인 노동자,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웃, 명절 비용조차 부담이 되는 가정에게 설은 기쁨의 절기가 아니라 견뎌야 할 시간이 되기도 한다. 웃음과 만남이 강조될수록,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의 고립감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런 현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은 축구 역사에서 특별한 대회로 남아 있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첫 우승을 차지하며 강국으로 도약했고, 주세페 메아차라는 전설적인 이름도 이 대회를 통해 각인됐다. 하지만 이 우승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함께 남긴다. 과연 그 업적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가라는 물음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아래에 있었다. 월드컵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국가 선전의 도구였고, “이탈리아의 우승”은 선택이 아닌 목표가 됐다. 그 과정에서 심판 배정 논란, 거친 플레이에 대한 방조, 상대 팀에 불리한 재경기 일정 등 공정성을 훼손한 정황들이 쌓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그 우승은 지금까지도 ‘깨끗한 승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방향이다. 무솔리니는 국가의 위신과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위해 과정의 정당성을 희생시켰다.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정권의 선전물이 아닌, 역사적 논쟁거리로 남았다. 업적을 남기려 했지만, 방식이 함께 기록되면서 오히려 평가가 분열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 독재자의 일화로만 남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숫자, 성과, 외형적 성공에 대한 조급함이 커질수록
2월은 총회 기도의 달이다. 총회는 이 한 달 동안 매일 다른 기도제목을 제시하며, 전국에 있는 침례교회와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총회를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는 침례교 공동체가 다시 한 번 ‘기도로 서는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영적 요청이다. 총회는 침례교회의 신앙공동체다. 결의와 회의, 제도와 정책으로 운영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교단의 영적 태도가 놓여 있어야 한다. 기도가 약해질 때 총회는 조직으로 남고, 기도가 살아 있을 때 총회는 공동체가 된다. 그래서 총회를 위한 기도는 일부 리더들의 몫이 아니라, 침례교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이번 2월 기도제목을 살펴보면, 그 구성 자체가 총회의 현실과 과제를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월초에는 총회 임원과 위원회, 부서별 사역을 위한 기도가 집중된다. 이는 총회가 개인의 역량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따라 섬기는 구조가 되도록 붙드는 기도다. ‘지혜와 사명’ ‘능력과 겸손’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이란 표현들은 총회 리더십이 어떤 영적 토대 위에 서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교회 현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개척교회와
한국침례신학대학교와 대공원침례교회(유재영 목사), 주원침례교회(김주원 목사), 성산침례교회(윤양중 목사)는 지난 1월 11~18일 필리핀으로 단기 선교 및 해외봉사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단기선교에는 김주원 교수와 조은샘 교수, 기독교교육학과 6명, 신학대학원 2명의 학생들이 함께 했습니다. 필리핀 선교를 위해 교회 및 교수들과 학생들은 영어 복음설교, 합창, 발레, 태권도, 춤, 중독 예방 교육과 성교육을 준비했습니다. 성교육과 중독 예방교육은 조은샘 교수와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학생들이 함께 진행했습니다. 학생들은 “익숙치 않은 영어로 강의를 준비하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지만 언어와 사고의 폭을 확장케 하는 통로”가 됐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단기 선교팀은 11일 밤 비행기로 출발해 12일 새벽 필리핀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숙소로 4시간을 이동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필리핀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부어주셨고 필리핀 사역 가운데 성령님이 인도하시길 간구했습니다. 숙소에서 짐을 푼 후 바로 아마라오 국립고등학교로 이동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첫째 날은 아마라오 국립고등학교, 둘째 날은 GIS 학교, 셋째
“53년간의 저의 사역에서 가장 큰 후회는 여성들을 제한하는 데에 사용된 네 개의 (성경) 구절에 대해 저의 개인적인 해석을 좀 더 일찍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 저의 삶, 교회, 사역에 있었던 모든 선한 여성들에게 제가 무지했던 세월 동안 제 자신의 견해를 용기 있게 밝히지 못했음을 공개적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지상명령(사도행전 2장 17~18절)에 순종하는 일에 제가 방해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그들이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그들 안에 주신 영적 은사와 리더십 기술들을 사용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지금 저의 마음은 찢어지고, 저의 죄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이여, 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 릭 워렌 목사(새들백교회 원로) “여성이 목사직에서 섬기는 문제는 남침례회의 교리와 질서를 모두 위반하는 중요한 성경적인 권위의 문제이다.” - 리차드 모어 남침례신학대학원 총장 “우리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교회에서 섬길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는 것과 ‘목사의 직분은 성경에 의해 자격을 갖춘 남성으로 제한된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Baptist F
피터스는 약 한 달간 제주에 체류하면서 제주의 모습을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A Visit to Quelpart(제주 탐방기)”다. 그의 기록에는 당시 제주의 사회, 문화, 경제적 특징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제주는 항구, 도로, 여관, 상점 등 기본적인 기반 시설이 거의 전무했다. 교통과 유통망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는 제주가 근대적 교류망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민들의 경제 활동은 주로 농업과 가축 방목, 특히 말과 소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상품경제는 미약하고 자급자족적 생활양식이 두드러졌다. 종교적 양상 또한 특이했다. 불교 사원과 승려는 드물었고, 샤머니즘과 제사 중심의 종교 행위가 지배적이었다. 언어와 풍습 역시 육지와 달라, 피터스는 제주를 단순한 지역적 변방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기록한다. 오늘날 제주도는 국내 최고의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안타깝게도 제주의 물가가 비싸 “제주도에 가느니 동남아로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그럼에도 제주는 여전히 낭만의 공간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피터스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제주는 결코 그런 땅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제주는 대표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 지역 소멸이라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 농어촌교회는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문제는 이것이 농어촌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농어촌교회가 무너지면, 한국교회 전체의 뿌리 또한 함께 약해진다. 농어촌교회는 지원의 대상이기 이전에 한국교회의 신앙 생태계를 떠받쳐 온 기반이다. 오늘 도시교회를 이루고 있는 많은 성도와 목회자의 신앙은 고향교회에서 시작됐다. 기도와 헌신, 공동체의 기억이 쌓인 그 자리에서 한국교회의 토대가 형성됐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교회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20여 년간 이어져 온 ‘설·추석 고향교회 방문 캠페인’은 단순한 명절 행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캠페인은 한 번의 방문을 통해 교회의 연결망을 유지하게 하고, 끊어지기 쉬운 관계의 끈을 다시 묶는 역할을 해 왔다. 농어촌교회는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 세우기 어렵다. 사람이 떠나고, 리더가 사라지고,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관계만 살아 있다면 작은 관심과 지원도 실제적인 힘으로 이어진다. 고향교회 방문은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를 ‘돕는 교회’와 ‘도움받는 교회’로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