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어느 종교에도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신앙입니다. 그 날이 되면 구원 받은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부활 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심판받기 위해 부활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나팔소리에 잠든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그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활의 영광이 각각 다르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39~41) 육체도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와 새의 육체와 물고기의 육체가 각각 생김도 다르고 수준이 다르듯이 부활의 몸도 각각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빛이 다르고 별과 별의 빛이 다르듯이 우리가 부활하면 부활의 몸이 입을 영광도 각각 다르다
지금은 기도할 때다. 미스바로 모이자. 미스바라는 지명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던 야곱과 삼촌 라반이 약속하며 세워진 땅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한다(창 31:49).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올 때,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도의 자리로 부르기 위해 “미스바로 모이라”고 선포한다(삼상 7:5). 대한민국이 성령의 바람으로 가득하던 70년대에 기도할 때마다 부르짖던 말이 있었다. “동방의 이스라엘, 동방의 예루살렘”, “세계 선교의 등불”이라는 구호와 함께 한국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빼앗겨 버린 법궤처럼, 사명을 잊어버리고 기도의 자리를 잊어버렸다. 이제 다시 기도의 자리, 사명의 십자가를 찾아야 한다. 백동의 편지라고 침례신문에 실려진 백동의 글이 편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백동 편지로 보내지는 이 글을 누가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주신다면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의 심정으로 동참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10월 3일에 하루 세끼가 안 되면 한 끼라도 금식하며 기도하자. 각자 있는 곳, 있는 자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이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를 연결하고 있는 진도대교가 놓여 있는 곳인 울돌목에서 1597 년 일본군 300척이 넘는 배후의 배와 울돌 목으로 진입한 133척과 싸워야 했던 조선군 에게 남은 판옥선 12척과 지휘선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승리의 함성을 봤던 것이다. 50년간 개척자로 일하셨던 어느 원로 목회자께서, 항상 열악한 조건에서 몸으로 부딪혀 나가야 했던 개척 일군으로서 어려울 적마다 이순신 장군이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도 포기하지도 아니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최선의 열정으로 임하였던 모습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진도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진도대교에서 명량 축제가 열린다. 백과사전의 기록으로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녹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말한다. 이곳의 가장 짧은 거리는 300여 미터이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약 20미터이다. 이러한 지형적 요건으로 인해 이곳에는 급류가 흐르는데 특히 만조 시에는 시속 23킬로미 터의 빠른 물살이 흐른다. 물살은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 이치며 흐르는데 격류가
현대인들 중에는 텃밭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거기다가 농작물을 심고 가꾸 면서 알뜰하고 재미난 생활을 하길 원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도 텃밭에 애착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왕궁 가까이에 있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던 이유는 그 곳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왕상21:1~2). 그는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거나 돈으로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봇이 거절하자 실의에 빠져 침상에 드러누워 식사까지 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처 이세벨이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왕상 21:15~16). 하나님이 기획하신 에덴동산에는 텃밭이 있었을까? 강이 발원되어 동산을 적시고, 각종 실과나무가 있어서 임의로 따먹을 수 있었던 즐거움의 동산에 그런 밭이 필요했을 까? 창세기 2장 15절엔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전해준다. 아마도 대농(大農)은 아니었을 터이고 텃밭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상상해 봤다. 하나님께선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으셨지만 그것들에게 땅을 경작 하게 했다는 말씀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에덴동산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이성적 숙고들에 의해서도, 자연적인 필연성들에 의해서도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자연 밖에서 인간에게 선사되는, 인간을 압도하는,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계시로써, 은혜로써 표시되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인간이 다른 문화영역들에서와 같이 독자적 창조적이 아니며 철저히 순종적 예속으로 이뤄진 것이다. 결국 신앙은 궁극적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의 동태(動態)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동태이다. 사람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다. 특별히 음식물이나 거주처소 같이 그의 생존 자체를 조건 짓는 것에 대하여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적 존재와는 달리 정신적 관심사, 즉 인식적, 심미적, 사회적, 정치적 관심사가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시급하다. 아주 시급한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관심사와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 또는 한 사회 집단의 생활을 위해서 궁극적 관심사를 주장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궁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그것
1997년 봄에 현 담임인 이동간 목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창원침례교회의 추수감사절 헌금과 국내선교기금으로 개척을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작년 부활절 예배를 드린 후 상가재건축으로 건물을 비워주고 6개월간 예배당 없이 성도들의 가정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는 축복된 기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11월에 이르러 우리도 이제 교회소유의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어 신주거지로 조성된 현동의 새상가 100평을 매입하고 12월 25일 기쁜 마음으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쯤에서 모든 분들이 짐작하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넘어갈께요. 고심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9월 5일 새벽기도시간에 강한 감동을 1시간 동안 받게 됩니다. “네 책을 팔아 교회부채를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달 8월에 이동간 목사가 두 번째 시집을 발간했는데 그 책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감동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5년간 쓴 시 중에서 엄선한 작품들을 꼽아 만들어졌습니다.전혀 기대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발간 20여일 만에 알라딘 집계 전자책 베스트셀러 부분에서 시 부문 1위, 소설·시·에세이 부문 7위, 통합부문 17위에 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 셨도다” (시편34:4)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을 전해 이 소식을 듣는 자 중에 한 생명에게라도 은혜와 축복이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을 믿고 이 간증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 총회 사무실에 가서 군경선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양회협 목사님께 인사드리고자 찾아갔습니다. 양 목사님께서 저의 건강을 물으시면서 어디 가서 설교할 때에 제 이야기를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다시 살게 해주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간증해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누어야 한다. 나를 통해 지금도 역사하심을 보이셨는데 나는 그대로 간직하고만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간증을 나눕니다. 폐결핵에서 살려주신 하나님 1983년도 아내와 결혼하고 1985년도에 역곡에서 첫 목회를 시작 하게 됐습니다. 목회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저녁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요강으로 받아내야 할 정도로 각혈을 했습니다. 각혈이 멈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목적과 본성에 있으며,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줄만 남은 비파의 이야기가 있다. “왈츠”라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지붕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 매여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이 안 보여도 비파 줄이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켤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의 줄만 있다면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 옛날이야기에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과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 날씨가 좋은 날이면 우산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가 와도 허허 날씨가 좋아도 허허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이렇게 비가 오면 작은아들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구만 당신은 뭐가 그리 좋아서 실없는 사람처럼 허허하는 거요?” 하자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다. “비오는 날은 큰아들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날 좋은 날은 작은 아들 짚신이 잘 팔려서 좋으니 다 좋지 않소.” 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같은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느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성경에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이기 때문에 말씀에 불순종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사망이지만 영의…
학교의 담임 선생님은 학생이 말을 듣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벌을 주기도하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합법적으로 정학이나 제적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담임목사는 성도가 불순종하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목사를 모함하고 비난해도 보호자를 모시고 오라고 할 수도 없고 반성문을 쓰고 회개하라고 꾸짖기도 어렵다. 그랬다가는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사람보다 반항하고 목사를 비난하고 풍파를 일으키고 교회를 어렵게 할 사람이 많을 것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렇게 안한다. 교회 이름으로 치리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목사도 성도도 교회도 다 상처를 입게 되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의 공동체로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며 우리는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구원 받지 못한 이웃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주님과 복음을 위한 공동체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 증거
불신자가 전도를 받고 교회를 출석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깨닫고 믿음이 자라고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지도 해주는 사람이 목회자이다. 모든 삶에 신앙생활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만큼 신앙생활이 중요한데 이 중요한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목사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성경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했다. 성도는 목회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으며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신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사랑으로 잘 섬기면 하나님을 사랑으로 잘 섬기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를 영접하는 것이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10:40~41). 목회자는 권위를 내려놓고 성도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다가가는 것은 목회자의 자세이며 감사한 일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세우셔서 교회를 돌보라고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자라는 생각으로 존경하고 잘 섬겨야한다. 필자는 목회자들에게
현대사회는 핵가족화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경제사정도 여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부모님도 짐으로 여기고 돌보지 않고 방임하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낯선 곳에 버리고 사라지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신자 불신자를 떠나 자녀의 근본적인 도리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향한 봉사의 사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기부모님부터 잘 섬겨야 한다. 부모님 시부모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5:16)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식에게 땅에서 장수하며 복을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지 않을 지라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자식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오늘 날 세상은 도리도 저버리는 세상이 되어간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 볼 때는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다. 천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라 선포하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시편24:1에서 다윗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했다.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요 모든 만물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요 청지기일 뿐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우주만물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믿음의 증거요 모든 물질의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은 신명기14:22에서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한 것은 레위 인들이 백성들을 위해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수기18: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가까이했다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을 막고 백성들의 죄를 위해 대신 제사를 담당하도록 레위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구별하고 그들에게는 땅을 기업을 주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마20: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잘 섬길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잘 섬기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둘째계명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마22:37-40)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다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항상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로 살아야한다.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도 그리스도인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요소요소에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그 이유는 섬기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위가 높을수록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자로 산다면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교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배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 지침으로 대면예배가 어려워지고 행정조치로 인해 예배당이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던 팬데믹이 극에 달했을 때 많은 교회들은 예배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예자연)는 서울시장을 상대로 대면예배 금지 처분 취소 소송을 진행했고 최근 6월 10일 1심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대면예배 금지 처분은 교회가 음식점 등과는 달리 생산 필수시설이 아니라는 점에 근거해 집합을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의 심적 위안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등 안정된 정신 건강을 지원하는 순기능이 있다”며 “장기간 시행된 거리두기 등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우울증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기능이 생산필수 시설에 비해 열등하거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볼 타당한 이유는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감염 예방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이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비례의 원칙이나 평등원칙에 반해 재량권을 일탈, 남용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그동안 교회 예
오는 7월 16일, 서울광장이 음란과 죄악의 장소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한국교회 내에서 커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리는 동성애축제(퀴어축제)를 조건부로 승인했다.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시민위)는 지난 6월 15일 회의를 통해,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신청한 서울광장 사용 신청 안건을 수정, 가결했다. 시민위는 애초 조직위가 신청한 행사 기간(7월 12∼17일)을 7월 16일 토요일 하루로 줄이고, 신체 과다노출과 청소년보호법상 금지된 유해 음란물 판매·전시를 안 하는 조건으로 광장 사용 신청을 받아들였다. 시민위는 무대 설치 등 행사 준비 시간을 주기 위해 행사 전날인 7월 15일 오후부터 조직위가 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동성애축제가 처음으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것은 2015년부터이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오프라인 집회가 금지된 기간을 제외하고 불허된 적이 없이 매번 시민위를 통해 사용신청이 통과됐다. 지난 2019년 당시 서울시의 다수의 공무원들이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를 반대하며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서 ‘서울광장은 시민의 건전한
말씀과 기도의 축제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 침례교 연합기도회는 지난 6월 3일 세종꿈의교회(안희묵 목사) 집회를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과 함께한 이번 연합기도회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대면과 비대면으로 동시에 적극적인 참여로 말씀을 회복하고 기도로 은혜받은 집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기도회가 열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코로나19로 인해 제한적인 교회 사역 가운데 나온 돌파구였다. 교회의 모임이 제한을 받고 대면 모임이 사실상 통제되면서 대규모 집회를 치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온 대안이었다. 그리고 이 대안은 지난해 12일 동안의 연속된 집회를 통해 침례교회가 ‘기도하는 교단’ ‘말씀으로 충만한 교단’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별히 2022년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주요 지역의 거점교회를 선정하고 인근 지역에 속해 있는 침례교회가 함께 연합으로 참여하는 자리로 마련하자는 취지로 10개 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교단 안팎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말씀 증거자로 나서 침례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 구령을 위해 교회 회복을 위해 한
2년 남짓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교회는 심각한 목회 사역의 타격을 입었다.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는 해제되고 일상의 회복이 이뤄지면서 외관상으로는 정상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교회의 완전한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와 기아대책 등이 지앤컴리서치(대표 지용근)에 의뢰해 조사한 목회자와 교인들의 현장 예배 참석에 대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3명만이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지앤컴리서치는 또 목회자 981명과 교인 1500명에게 설문한 결과 28.3%만이 ‘곧바로 현장 예배에 참석했다’고 답했으며 57.8%는 ‘일정 기간 지켜본 후 현장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지난 5월 첫째주부터 교회는 마스크 미착용자나 발열증상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 모든 인원에 한해 예배당을 개방하고 교회 자체적으로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가운데 교회 사역을 정상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도 안되는 인원만이 현장 예배에 참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온라인 예배에 길들어진 성도들의 주일 예배에 대한 인식이 현장 대면 예배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면 예배 참석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그만큼 역사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침례교의 역사는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침례파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기였던 16세기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됐다. 침례교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됐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William Carey)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침례교의 기원은 1889년 12월 펜윅 선교사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로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