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와 악한 자 누구를 들어 쓰실까? 마음이 악한 자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면 사도 바울처럼 갑자기 강하게 역사하셔서 저를 꺾어서라도 하나님이 쓰신다. 그런데 몸이 약한 자는 하나님도 어찌하시지 못한다. 이미 탈진해 기진맥진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계시나 소명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저 천사를 통해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셨다. 그리고 자게 하셨다. 즉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게 하셨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왕상 19:7) 나는 이 말씀에서 무한한 은혜와 감동을 느낀다. 하나님은 쉬지 못하는 당신의 종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남은 목회, 해야 할 사역, 영광 돌려야 할 사역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지쳐 쓰러진다면 누가 가장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처럼 목회는 마라톤이다. 절대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다 보면 머지않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고 만다.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 1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코로나 시국에서 목회자의 탈진은 어쩌면 너무나 분명히 예견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순교할 상황도 아니고 그
나는 목회학을 공부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먼저 목회를 배웠다. 어머니는 세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설교할 때는 가끔 웃겨라. 둘째, 심방 가서는 잘 먹어라. 셋째, 상담할 때는 잘 들어줘라.” 이어서 말씀하셨다. “건강해라. 건강은 목회의 생명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최고의 목회학 교수였다. 27년 전, 몸이 아파서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왔다. 그때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목회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목회는 설교, 심방, 상담, 교육….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목사의 삶이다. 목사의 삶에 예수가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설교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상담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함께 밥 먹을 때도 예수가 보인다. 예수가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요 목회다.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질문했다. “자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인가?” 소명감에 대한 열정은 펄펄 끓고 있었지만, 목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목표를 세 가지 말씀을 드렸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탈진하는 이유에 관해 존 샌포드는 목회자의 일이 끝이 없다는 것, 출퇴근이 없는 직업이며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 불가하며 하던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직이라는 것을 예로 들었다. 다섯째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기대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다뤄야 한다. 월요일만 되면 핸드폰을 아예 꺼두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날만큼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그런 목회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월요일에 목회자가 필요한 날이 있는데 너무 목사님이 자신만 생각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거의 119대원과도 같은 것이다. 여섯째로 목회자는 매년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어딜 가나 골치 아픈 사람, 까다로운 사람, 교만한 사람 등이 있게 마련이다. 목회자는 이들을 피하거나 골라 가르칠 수 없다. 다 받아줘야 한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목회자도 있다. 다음 날 그 사람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표정관리가 잘 될까 고민이 많아진다. 일곱째로 목회자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목회자야말로 감정노동에 시달리
물론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침례 사이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써의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침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침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봤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침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침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침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
한국의 목회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교와 가장 많은 예배 인도, 가장 많은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학창 시절 부흥회를 다닐 적에 한 목사님이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제단에서 기도하다 죽는 게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제일 사랑한 말씀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죽은 목회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문제는 가정이다. 가정이 없었다면 영광스러운 순교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아직도 한참 일할 나이에 과로로 죽게 되면 아내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동차와 같다. 장거리를 뛴 자동차는 한 번 점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점검은 고사하고 계속 매일 장거리를 뛰다 보면 갑자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운전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장이나 사고로 큰 위험을 당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과거 목회자들에 비해 요즘 목회자들은 건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건강을 위해 건강보조식품 복용이나 등산 및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사실 누구도 탈진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다 보면” “하다 보니까” 탈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고 난 후 20년 이상 우리나라 경제는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취업문제와 주택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필자는 IMF가 오기 전에 예배당에 화재가 발생해 갑자기 건축을 하게 됐는데 교회가 부흥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빚을 내서 건축을 하는 중에 IMF가 와서 6개월 만에 완공하고 입당하기로 했던 계획이 틀어져 4년이나 걸리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입당은 했지만 IMF로 실직을 한 사람, 폐업을 한 사람, 타지로 떠난 사람, 장기간의 건축으로 떠난 성도들도 있었고 IMF로 인한 경기침체와 함께 교회부흥도 침체되면서 건축 부채를 갚느라 힘겹게 목회를 했다. IMF사태 이후로는 교회를 개척해도 자립이 어려워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경제활동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일을 하게 됐고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됐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기도하다가 죽을 각오를 하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 주신다면서 다른 일 하는 것을 소명의식이 결여된 목회자로 여기며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중독은 크게 신체 증상인 중독(Intoxication, 약물중독)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정신적인 중독이 문제가 되는 중독(Addiction, 의존증)을 동시에 일컫는다. 여기서는 역기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의 의존증에 대한 상호작용에 관해 보고자 한다. 남편이 흡연자인 경우, 아내는 비흡연자이지만 간접흡연으로 임신 중에 아이에게 악영향을 주어 신체적으로 발달을 저해하며 조기 출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니코틴 중독자인 남편(아이들의 아버지)만이 중독자인 것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중독에 반응하고 노출되기에 상호의존중독(相互依存中毒)에 걸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증상이 나타나는 한 사람이 아닌 가족 전체로 봐야 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은 자신이 어렸을 적 원가족의 역기능을 자신에게 살아있는 인간 문서로 기록하여 자신의 가족에게 상처를 대물림한다. 이렇게 역기능도 계속 세대를 거쳐 유지하려는 힘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항상성이라 불렀다. 물론 순기능이 발달하였다면 순기능을 유지하려는 힘이 강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바꾸는 치료와 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역기능의 특징 중에 하나가 수치심에 기반을
목회자들이 자주 보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조회수가 가장 많은 게시판 중의 하나는 청빙게시판이다. 우리 교단의 총회 홈페이지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청빙 게시판의 평균 조회수가 가장 많은 편이다. 그만큼 어느 교회에서 사역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떠나 다른 사역지를 찾는 이들도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들도 새로운 목회자를 구할 때 신문이나 SNS의 청빙공고를 통해서 목회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됐다. 특히 요즘 시대는 청빙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공평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바라던 교회나 사역지에서 청빙공고가 나오면 요구되는 제출서류를 준비해 제출하게 되는데, 교회들은 엄청난 지원서류 더미에 시달리게 된다. 필자도 한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사임을 하고 떠나려고 할 때에 목회자 청빙공고를 냈었던 적이 있는데 무척이나 많은 지원서류를 받아봤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서류를 제출하신 분들 중에서는 전화까지 걸어 이러저러한 것을 문의하기도 하고,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까지 있었다. 독일에서 사역할 때도 주변의 한인교회
우리 모두의 삶에는 여러 모양의 산과 계곡과 평지가 이어진다. 늘 좋은 일에 기뻐하고 축하만 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고 피하고 싶어도 우리 모두가 지나가야 하는 슬픔이 존재한다. 바로 상실의 순간이다. 글에서조차 화두로 올리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상실의 모양은 여러 가지다. 요즘처럼 바이러스로 일상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 연애하다 차일 때, 친구와 싸워서 절교할 때, 교회를 옮길 때, 사업을 접을 때 등등 다양하다. 인간으로서 모두가 지나가야 하는 깊은 상실도 있다. 아이가 자라 부모의 품을 떠날 때, 부모를 잃을 때, 꽃다운 젊은이가 쓰러져갈 때, 열정을 불태우던 직장에서 은퇴할 때와 같이 우리는 떠나보내고 떠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어떤 상실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준비시키며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에서 귀중한 무엇인가를 통째로 뜯어낸다. 축하보다는 슬픈 소식이 많은 이 특수한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상실의 순간을 대면해야 할까? 평소에도 자주 보고 수다 떨고 웃던 분의 갑작스럽고 황망한 소천의 소식을 들으며 장례를 준비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든 절차가 간소화된다. 장례처럼 한 사람의 인
내가 사는 집은 골목과 접한 빌라를 끼고 들어가 그 빌라 뒤쪽에 있는 4층 빌라 중에 2층이다. 창문이 지면에 닿은 지층까지 합하면 3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방과 옆의 건넛방 모두 창을 열면 앞집 벽만 보인다. 빛은 잘 안 들어오지만 다른 층 사람들의 목소리는 앞 집 벽에 반사되어 잘 들어온다. 여름날 저녁으로 향하는 오후에는 30도를 웃도는 정오의 더운 날씨가 조금 수그러져 대부분의 집들이 창문을 열어 놓는다. 아랫집 창문도 열려 있었고 어린 딸에게 야단치는 엄마 목소리는 확성기를 입에 댄 것처럼 쩌렁쩌렁 울린다. 거의 1시간 동안 들리는 높낮이 없는 일관성 있는 소프라노 소리에도 아이들 목소리는 들리지 아니했다. 그러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이가 엄마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뭐가 무서워, 학원 선생님이 무서워? 내가 더 무서워?…누가 학원에 가지 말라 했어?…80점이 뭐야?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해?” 이 아이는 어제 앞집의 담과 우리 빌라 사이에 깔개를 펴고 그늘진 좁은 공간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뒹굴며 책을 펴 놓고 놀고 있었다. 아마도 공부와 숙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책을 펴 놓았을지도 모른다. 어쨌
목회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사역을 목회라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크고 작은 교회에서, 혹은 선교나 봉사직으로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개념적 정의”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로 알려진 프로이트와 더불어 무의식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낸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구스타프 칼 융은 아버지가 개신교 목회자였다.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목회자로 헌신한 융의 아버지는 어린 칼 융에게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아버지가 죽음을 앞 둔 어느 날 융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융아!” “네! 아버지.” “너 목회가 무언지 아느냐?” “아버지 목회가 무업니까?” “목회라는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목회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융의 아버지가 보기에 목회라는 것은 목회자가 사람의 수준을 벗어나서 완벽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 설교도 잘 해야 하고, 심방도 잘 해야 하며, 목사님이 기도하시면 다 응답을 받아야 하고, 상담도 행정도…
궁인 목사 휴스턴 새누리교회 코스타(KOSTA) 강사 미국에서 목회하는 필자는 최근 ‘코로나 종식’을 선언하면서 3년 만에 새벽기도회를 다시 시작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지막으로 모든 공식 예배가 정상화됐다. 상반기를 목표로 하는 평신도 소그룹 (목장)만 다시 시작한다면 모든 교회 사역과 부서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예배와 조직은 다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들과 성도들의 헌신을 코로나 이전으로 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필자가 사역하는 휴스턴은 1년 전부터 마트와 레스토랑에서 마스크도 안 쓰고 다니고 모든 일상생활이 안정을 찾은 듯 보이지만, 신앙생활에서만은 아직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오진 않은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성도들은 전염병으로 인한 극한의 두려움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했다. 어쩌면 영원히 팬데믹 이전으로 돌이키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매우 오랜 기간 성도들이 집에 고립됐고 가족 위주로 생활을 하다 보니 우울감을 호소 하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지난 몇년 동안 성도 간의 교제와…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환경과 사람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 헤아리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나와 환경과 사람의 형편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더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 밖에서 혹은 말씀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삶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혹은 말씀 위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모저모들이 선명하게 깨달아지고, 심히 어렵고 힘들게만 여겨졌던 교훈과 명령들이 오늘과 내일을 위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안내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일상을 통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더욱 진하고 강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 이즈음에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열어주신 눈을 ‘또 다시 어둡고 흐르게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열어주신 눈을 ‘더욱 밝고 맑게 만들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김한순 목사 금마성산교회 침례교부흥사회 부회장 신학적 배경 토레이의 저서 ‘성령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의 핵심은 이 책 속에 계속 되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서는 이하나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즉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하였다” “위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다”“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등 이다. 둘째는 성령침례란 우리가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의 문제 라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침례란 성령의 중생케하는 사역과 별개의 것이요 구별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넷째는 성령침례란 언제나 증거와 봉사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토레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성령침례”는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 토레이는 그의 예일 대학 동료였으며 그의 목사 안수식 설교자였던 힐스(A. M. Hills)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첫 목회를 서로 밀접하게 도와줬으며 영적 탐구에 있어서도 서로 조력했다. 그러나 1900년경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성령침례론의
심연희 사모 미국 RTP지구촌교회 학교폭력의 희생자로서 학교 일진의 분풀이 대상으로 이유도 모르고 내내 맞으며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냈던 한 개그맨의 간증을 접하게 됐다. 이렇게 맞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그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감을 토로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는지 모른다. 피해자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더불어 같은 나이의 어린 가해자들의 무지와 악함, 그 폭력을 대물림하고 잘못 지도했던 윗세대들, 눈에 뻔히 보이는 폭력을 방관했던 친구들과 어른들의 비겁함에 씁쓸하기만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그의 부모님들이 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맞을 만하니까 맞는 거라 하셨고, 어머니는 무조건 용서하라 하셨다.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매번 멍과 피로 얼룩진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도 못난 아들을 낳은 당신 탓이라는 자책감으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언뜻 보면 겸손하고 은혜가 많은 크리스천의 자세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문제를 들여다보지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비겁과 나약함이 가려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른들 속에서 아이는 학대와 폭력을 마치 운명처럼 받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다양한 행사와 집회들이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5월 첫째 주일은 각 교회마다 예배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많은 성도들이 주일 영상예배가 아닌 현장예배로 함께 했으며 특별히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다음세대를 위한 섬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둘째 주는 목회자 주일로 준비하며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침례교회에서 있어 5월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달이다. 바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일이다. 우리교단은 1889년 12월 8일 한반도 땅을 밟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의 선교로 시작됐다. 지금의 북한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선교에 주력하며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생명을 걸고 자비량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1944년 5월 10일 일왕에 의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고 교회가 폐쇄를 당하며 수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말씀과 복음으로 세워진 침례교회의 정체성이자 성경적 신앙을 표방했던 선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3년 만에 정확히는 757일 만에 일상을 회복했다. 정부는 2020년 3월 22일 도입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2년 1개월 만인 지난 4월 18일 종료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 체제로 전환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일상회복은 세상과 교회, 특별히 한국교회가 크게 환영하면서 엔데믹 이후의 교회 사역들을 본격적으로 점검하고 대비하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은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역당국은 어느 정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아래 거리두기 체제를 전격 해제하고 나섰다. 그동안 교회는 코로나로 인한 적잖은 고통과 사회로부터 따가운 비난을 함께 받았다. 집단감염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지만 선제적 방역체계를 구축하고 자발적으로 예배 인원을 축소하거나 비대면으로 전환하는데 협력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방역체계는 내부에서 집단으로 발생하는 코로나 확진자를 막는데 주력했으며 성도들에게도 교회 시설 이용을 최대한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며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해 나갔다. 방역기관과 코로나 의료기관을 응원하고 응급 물품들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지역사회에서 돌보기 힘든 소외계층과 이웃을 향해 방역물품과 긴급구호물품들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섬겨왔다.
우리교단 총회(총회장 고명진 목사)는 전국교회들 대상으로 조사한 교세 분석 통계를 2주에 걸쳐 본보에 게재했다. 이번에 발표한 총회 교세보고서는 전체 3098개 교회 중 83.1%인 2575개 교회 지역 분포, 전체 목회자 통계와 교인 통계, 연령별 분포, 재정 현황, 자립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교단 안팎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세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단의 미래를 구성하는 목회자와 다음세대이다. 현역 목회자의 55.2%인 2625명이 50~60대에 집중돼 있고 30대 이하 목회자는 16.9%인 803명으로 나타나 목회자의 고령화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학령인구로 인해 신학교의 정원이 줄어들었고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 목회 사역으로 전환하는 인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교단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담임목회자가 후진을 양성하고 사역자를 키워나가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후진 양성보다는 교회 사역에 집중하고 교회 부흥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차기 리더십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총회와 신학교 등 기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 다가왔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게 된 지 3년째다. 매번 코로나19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아프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꿈꾸는 것은 일상의 회복이자 모이는 예배의 회복이기에 다시금 단어들을 꺼내든다. 지난 3년간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실 단순히 코로나19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여러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장기간에 걸쳐 이어온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인해 엔데믹으로 현재의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교회의 대면 예배로 모두가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한 그 사이 희생을 강요당한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천지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를 향한 마수를 거두지 않고 있어 한국교회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고 있다. 문제는 교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또한 국민통합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6월 지방선거일까지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현 정권과 새로운 정권
교회의 부흥과 코로나 팬데믹 극복을 위한 연합기도회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가 지난해 6월, 12일간의 일정으로 지구촌교회(최성은 목사)에서 열려 큰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기도회는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른 인원 제한과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비대면 방식으로 유튜브 채널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진행했으며 말씀과 기도의 잔치를 펼쳤다. 매 회차별 3만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국교회가 동참했던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침례교회가 기도운동을 전개하며 한국교회의 회복과 코로나 팬데믹을 이겨나가는 말씀 회복 운동, 기도 회복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도 이 말씀과 기도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1일 수원중앙교회(고명진 목사)를 시작으로 매주 금요일 저녁 포항과 부산, 광주, 대전, 논산, 서울, 안성, 원주를 거쳐 세종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매주 연합기도회를 연다. 또한 지역별로 기도회를 진행하며 대면 참여와 비대면 참여를 동시에 이끌어 내기 위해 준비했으며 특별히 100만 뱁티스트 전도운동 사역과 함께 지역 복음화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이번 라이즈 업 뱁티스트가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침례교회는 연합과 협동 정신을 기반으로 지역교회의 연합을 꾀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