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의 성령운동 이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길선주에 의해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나게 됐다. 장대현교회는 1907년 1월에 북한 전역에 있는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모아 한 주간의 특별연차수양회를 가졌다. 1907년 1월 8일 주일 밤에 약 1500명의 신도들이 모여 마지막 집회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자, 이에 초조해진 길선주가 안타까워하며 간구했을 때 갑자기 성령의 뜨거운 불을 체험하였다. 내용인즉은 그가 자신의 친구 미망인의 재산 100달러를 사취했음에 대한 회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수양회에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눈물로 죄를 고백했다. 그러자 다른 성도들도 밤새도록 눈물로 회개하며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무려 저녁 7시에 시작한 집회가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됐다. 요나단 고포트(Jonathan Goforth)는 이날의 놀라운 체험에 대하여 “이는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해 주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
그루뎀(Wayne Grudem)은 세 가지 유익을 언급한다. 첫째, 글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비언어적 방식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보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통해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신31:11~13; 수 1:8).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반복된 연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이해와 더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요 5:39; 딤후 2:15 참조). 셋째, 기록된 책으로서의 성경은 꿈이나 환상 혹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구전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이후에도 특별 계시가 추가적으로 주어지고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 특별 계시의 핵심 내용은 구속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와 구속받은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최종 계획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뤄진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연합에 대한 최종 계시의 책인 요한계시록이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강점기 교단 창설자 말콤 펜윅 선교사의 비정치적 신학의 영향으로 초교파적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교단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운동이나 항일활동을 전개하지 않았으나, 친일을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대로 성경적 진리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제의 통치에 저항했고, 결과적으로 항일활동을 실행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애국주의를 표방했으며, 일제의 통치가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침해하는 경우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항거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는, 1)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19일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교단 연합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2)1906년 펜윅 작사의 애국가를 교인들에게 보급했으며, 3)1916년 「포교계」 제출을 거부해 수난을 당했고, 4)1930년대 신사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해 박해를 받았으며, 5)1940년대 교단 폐쇄를 불사하면서도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고수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인 한국침례교 역사가 허긴 박사는 대한기독교회는 선교사 말콤 펜윅의 영향으로 1905년 을사
특별 계시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이 아닌 특별한 대상에게 일반 계시에서 얻을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특별한 내용을 특별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내신 진리를 의미한다. 특별 계시의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멜기세덱과 욥)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이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교회의 성도들이다. 특별 계시의 내용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형벌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사함과 칭의, 성령의 중생과 내주하심, 교회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아버지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만 가능하다(마 11: 27; 요 17:3, 6~8, 23~25).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베드로의 인간적 통찰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셨다(마 16:17).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성부와 완전
아래 그림은 정체되어 있고, 점점 쇠퇴해 가는 교회는 기존의 형식화와 제도화에서 벗어나, 2단계의 무브먼트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무브먼트로의 회복은 단순한 개선이나 보완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뿌리로부터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스티브 애디슨은 사역(Ministry)과 무브먼트(Movements)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역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면, 무브먼트는 내가 누군가를 도와 그로 하여금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령으로 돌아가고, 사명(Mission)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북미에서는 그 전부터 계속 증가하던 문닫는 교회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됐다. 30만개의 교회 중에서 앞으로 18개월 이내에 6만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내다 봤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교회가 점점 쇠퇴하고, 급기야 소멸되기 전에, 무브먼트를 회복해, 다시 부흥의 길을 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듯이, 무너진 성벽이 다시 회복되듯이 우리의 교회도 다시 회복되기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의 회개 미국에서 1906년에 윌리엄 시무어에 의해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부흥집회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던 시기에, 한국은 1907년도에 평양에서 영적 대각성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뿌리 깊은 전통 가운데서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784년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1866년 대원군 집권 당시에는 그 핍박이 극에 달해 약 8000명의 천주교 주교와 신부 그리고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다. 최초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인천 항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천주교가 들어온 지 약 100년이 지난 후였다. 1884년에 장로교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나란히 한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됐다. 두 선교사는 모두 학생 자발운동 출신으로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로서 이들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했으나 일찍이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65년에 영국 웨일즈에서…
고대 교부 시대의 자연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천지창조를 시공간과 질서의 창조로 인식했기에 이전의 교부들에 비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에 집중했다. 물론 그의 자연 이해는 단순하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편으로, 그는 자연과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사명을 다한 후 버려진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선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을 사용하거나 개발할 수 있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당신을 멀리 떠나 당신을 대항해 스스로 교만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을 잘못 모방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잘못 모방하는 그 행위에서 당신이 바로 모든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든지 당신을 전혀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의 질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들의 하나님, 나는 천사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족, 친구, 학교, 일터, 취미 그룹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관계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근접 공간학 (Proxemics)의 개념에 의하면, 인간관계 물리적 심리적 거리의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1) 친밀적 공간(1~3명, Intimate Space), (2) 개인적 공간(8~12명, Personal Space), (3) 사회적 공간(20~50명, Social Space), (4) 공적 공간(50명 이상, Public Space). 과거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을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이미 익숙해 있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만 머물지 말고, 사회적 공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역을 위한 핵심 그룹 혹은 창립 팀은 삶의 현장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회로 데려오려는 시도보다는 그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셋째, 지역 커뮤니티의 필요를 채워주는 플랫폼을 구축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마 28:19~20). 이 대사명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개척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어야 한다. 제자 삼기 위해서 먼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침례을 줘야 하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사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전에 말씀하셨던 대 계명을 생각해 보자. 대계명은 한 가지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양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다(마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양식이며, 신앙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대사명인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있어서도 이 대계명이 전제돼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제자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Sent One) 곧 사도(Apostle) 로서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더라도 일반 계시를 통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자들(포괄주의자들)은 요한복음 14:6과 사도행전 4:12과 같은 ‘오직 예수로만’의 구원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이들은 두 본문이 직접적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구원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본문의 청중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자의 구절은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후자의 구절은 베드로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음으로 그 분만이 구원의 길임을 인정할 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신학적 도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거나 혹은 들었다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예수’의 신앙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괄주의자들과 달리 우리는 요한복음 14:6과 사도행전 4:12을 기록된 각 책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오랫동안 따라다녀 자신의 정체성을 충분히 알만한 제자들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 세상 모든 죄인에게 비추이는 빛으로 오셨다(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