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는 두 사람에 의해 발전됐다. 한 사람은 존 다비(John Darby)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코필드(Scofield)이다. 세대주의는 인류 역사를 7기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기를 시대 혹은 세대라고 한다. 세대주의의 시작 존 넬슨(John Knelson)은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신앙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모아 한 그룹을 형성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들은 교회의 모든 제도를 전면 무시했다. 예배에는 형식이 없었다. 성경공부하고, 성찬예식을 했다. 넬슨을 포함한 사람 가운데 존 다비는 독특한 성경해석을 시도했다. 다비는 일곱 번이나 영국에 건너가 자신이 세대주의라고 하면서 성경해석법을 소개했다. 당시 미국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던 무디는 이 세대주의에 감명을 받았다. 무디는 자신의 부흥운동에 이 성경해석법을 도입했다. 후에 설립된 무디성경학교로 이 세대주의론을 대표하는 기관이 됐다. 특히 영국의 스코필드(Scofield)는 세대주의를 학적으로 정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코필드 관주성경(The Scofield Reference Bible)”을 편찬했다. 다비나 스코필드는 세대주의 발전에 공헌했다.
율법 :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에 관해 멜랑히톤은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율법은 이방 문화의 도덕률과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준수는 죄 된 세상에서 인간이 함께 사는데, 그리고 삶의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둘째, 신학적 측면에서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한다. 셋째, 교훈적 기능으로 인간이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병을 알려주는 반면에 복음은 치료약’이라는 말로 멜랑히톤은 율법과 복음의 역할을 구분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은 동시에 선포돼야 하는데, 율법 없이는 죄를 알지 못하고 죄의 세력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칭의 : 멜랑히톤은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확고히 지지했다. 평생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였던 칭의론에 관해 멜랑히톤은 ‘오직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다고 했다. 신앙 :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역사, 삶과 죽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을 믿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밝히는 죄는 구원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로마서의 죄론에 대한 이해는 구원론에 대한 이해이며, 이러한 죄론과 구원론은 선포되는 복음과 이에 대한 인간편의 반응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혀준다. 로마서는, 유대인은 종이에 쓴 율법으로, 이방인은 본성(양심)에 쓴 율법으로 하나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았다. 이것을 로마서는 ‘죄’라고 말한다. 그 죄는 아담을 통하여 들어온 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데 실패했으며 로마서는 이를 ‘죄’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이 근원적인 죄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행하는 온갖 죄악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까? 로마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한다.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이는 동시에 우상숭배와 연결된다고 본다. 이 우상숭배가 바로 로마서가 기록되던 사회의 배경인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단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상숭배로 귀결된다는 것이
독일의 루터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 맞은편 루터의 동상 옆에 나란히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에서 그의 역할과 업적에 비해 매우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신학자요 교육자요 훌륭한 작가였으며, 24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 통론을 저술해 새로운 시대의 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인물로 유명하다. 동시에 그는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제출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편집해 루터교 최초의 신앙 고백을 탄생시켰다. 멜랑히톤은 가톨릭 측과도, 인문주의자들과도, 그리고 개혁파 개혁자들과도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멜랑히톤은 1497년 2월 16일 독일의 브레튼에서 태어났다. 멜랑히톤의 종조부 요한네스 로이힐린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멜랑히톤은 그에게 어려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1518년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에 헬라어 교수직에 취임하게 된다. 루터는 그의 헬라어 수업을 들었고 멜랑히톤은 루터에게 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에 감동되어 독일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요, 교육 개혁자요 종교개혁 1세대의 대표적 신학자로 활동한다. 멜랑히톤은 루터보다 14세 어렸지만 루터는 그와
구원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에는 함정이 있다. ‘오직 예수’라는 주장의 함정이다. 종교다원주의자가 유일신을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이다. 만일 이들이 기독교(예수)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기독교 밖에서는 예수의 구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은 그 내면에 오직 기독교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하나의 등산로를 택했으면 그 방향에서는 오직 그 등산로를 통해서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맥락과 같다. 그러나 산은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지만, 구원의 길은 한 번으로 끝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등산과 구원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종교다원주의는 여러 구원의 통로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는 주장 속에서 종교 간의 공존과 평화를 위한 사랑과 대화를 주장하면서 사회의 지성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세력을 확장한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는 실제로 어떤 관련성을 가질까? 종교다원주의의 다양성 존중은 결국에는 성적 취향의 다양성 존중으로 이어진다. 여러 종교의 공존과 같은 여러 성적 취향의 공존이 종교다원주의 사상 속에서 평등의 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신약성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 윤리와 종교관을 어떻게 직시하고 복음으로 해석하며 대응했을까? 신약성경은 헬라-로마의 문화적인 배경을 어떻게 도구로 활용하며 복음을 전했을까?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대는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폭넓게 퍼져있던 종교다원주의 상황이었다. 신약시대의 분위기에서 단 한 분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무신론을 의미할 정도로 다신교가 성행했다. 그리스도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유일신관이 오히려 충격적인 사상이었다.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당시의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지성이었다. 여러 신을 섬기던 신전인 로마의 판데온(Pantheon, 만신전)이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만연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인들에게 생활이고 문화였다. 초대교회는 복음전파 과정에서 다신교나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치열하게 극복해 나갔다. 당시의 사회에서 유행하던 풍조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은 투쟁을 수반한다. 복음은 이러한 문화 투쟁을 하며 사상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다. 로마 황제 숭배의 현상과 그리스도인의 대응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는 로마의 체제에
일제는 동아기독교회의 지속적인 신사참배 거부에 제동을 걸고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1940년 동아기독교회 원산총부에 교규(敎規) 제출을 통보했다. 이에 교단총부는 서둘러 성경을 토대로 15장 36조의 교규를 작성했고, 원산에 있는 진성여자보통학교 교장인 강주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일어로 번역해 1940년 9월 9일 당국에 제출했다. 본 교규는 이종근 감목이 1940년 7월 15일 함경남도 원산부 영정을 주소로 포교관리자 설치를 신청한 서류와 함께 제출했는데, 주된 내용은 1906년에 작성했던 교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제가 동아기독교회에서 제출한 교규를 면밀하게 검토하던 중에 소위 ‘우태호(禹泰浩) 사건’이 발발했다. 그는 벨몬트침례교회에서 전도 목사로 안수받은 후 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 일본국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아 입국해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1941년 말엽 원산의 동아기독교 교단총부를 찾아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교단 임원들은 우태호와 같은 외부인의 합류를 달갑지 않게 여겨 함께하는 것을 거절했고, 심지어 안대벽은 그가 교단 재산을 노리고 합류를 시도한다고 여겨 일경에게 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까지 했다.
땅, 땅, 땅! 지난 2024년 7월 18일 일부 대법관들이 반인륜적 혁명을 선언했다. “피고(국민건강보험공단)는 이 사건 처분을 통하여 사실상 혼인관계 있는 사람 집단에 대하여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면서도, 동성 동반자 집단에 대해서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두 집단을 달리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취급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다른 대법관들의 별개의견과 보충의견이 합리적인데도 말이다. “①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배우자’는 이성 간의 결합을 본질로 하는 ‘혼인’을 전제로 하는데, 동성 간의 결합에는 혼인관계의 실질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움 ② 동성 동반자가 법률상 또는 사실상 배우자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볼 수 없고, 설령 두 집단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피고가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합리적 근거 없는 자의적 차별이라고 볼 수 없음 ③ 설령 배우자 외 동성 동반자까지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법률이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반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입법이나 위헌법률심판제도로 교정해야 할 대상임.” [대한민국 법원
1938년 8월 조선총독부는 국체명징(國體明徵)을 내세우며 신사 규칙을 전면 제정해 다시 참배할 것을 재차 동아기독대(1933~1939)에 강요하자, 김영관 감목은 재차 ‘달편지’를 통해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에 불복할 것을 전국의 교회에 자차 통고했다. 이에 일제는 동아기독대의 신사참배 반대거부의 확산을 막고자 이들을 제압하려는 방안 마련에 신속하게 착수하는데, 이런 와중에 경흥구역에 속한 함경북도 웅기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광고가 실린 ‘달편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됐다. 4. 신사참배 거부와 교단폐쇄(1944년)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전출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같은 전시체제 아래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을 공포했는데, 이는 총력전을 위한 체제로써, 국민적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침례교에도 닥쳤는데, 동아기독대(1933~1939, 현 침례교의 전신)의 김영관 감목(총회장)은 1935년의 ‘달편지’를 통해 전국의 교회에 신사참배와 황궁요배의 부당성과 당국의 강요에 불복할 것을
우리교단은 지난 113차 총회를 통해서 교단 산하에 ‘침례교사회봉사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로써 침례교단은 성경적인 교회공동체로서 교회와 세상을 향한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필자는 이 지면의 글을 통해서 이번 총회를 통해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귀하고 아름다운 사회봉사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교단 사회봉사단의 필요성을 짧게 논해봅니다. 첫째는 교회가 세상의 낮은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에 잘 알려진 설교인 존 스토트 목사는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책을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려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교회들의 생각을 환기시켜줍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근본적인 사회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빈부의 격차에 의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빈부의 격차들은 개인의 능력과 열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더불어서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
그래서 아버지와 저는 성도들 앞에서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허리에 잔뜩 힘을 주고 마치 군가 부르듯 하고 내려왔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및 함성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가슴을 적시거나 감흥을 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냥 씩씩하게 부른 것에 대견해하는 눈빛 그것 하나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버지께 정중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빠, 원수 갚았으니까 다시는 하지 말죠….” 순전히 그 날 무대는, 그 옛날 저 때문에 망친 특송을 상쇄시키기 위해 해 드린 것이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기쁜 마음으로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법 맘에 드셨던지, “알았다” 하시며 연신 웃으셨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모님께서, 천안 집에 함께 사실 때인데, 동생을 하나님 품에 먼저 보내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아갈 때쯤입니다. 특히 부모님께서 새로 나가게 된 은혜침례교회 오지수 목사님과 박미희 사모님 외에 온 교우들이 우리 가족의 사정을 아시고, 특별히 부모님께 많은 사랑과 관심으로 힘을 주셨습니다. 동생의 장례식장까지 오셔서 예배와 기도와 격려를 잊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고 순교
펜윅이 공교육을 금지한 결정적 계기가 1924년 10월 11일 발생했는데, 그것은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였다. 이는 강경신사(神社) 추계대제(秋季大祭) 때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기독교인(천주교 개신교) 학생들이 참배를 거부하거나 불참했는데, 이로 인해 학교 측은 이들을 처벌(퇴학 처분)했다. 4. 일제의 공교육 거부(1926년)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가 심혈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의 교육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식민지 한국을 황국신민화해 자신들의 식민지를 공고히 하려는 수작이었다. 이를 위해 1911년 8월 23일에 공포된 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은 한국의 학제를 천황의 칙령 아래 위계적인 법체계로 확립했고, 같은 해 10월 20에 공포된 사립학교 규칙(부령 제114호)은 ‘조선교육령’과 동일 선상에서 한국인의 식민지 교육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제21차 대화회(총회)가 예천구역 점촌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이 펜윅의 ‘공교육(학교 교육) 금지령’이다. 이는 펜윅에 의해 주장됐고, ‘달편지’를 통해 전국교회에 전달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경험했던 김용해 목사는 “19
저희 삼형제가 유년기를 보냈던 영등포의 교회에서는 매 주일 저녁예배 때 특송 시간이 있었습니다. 솔로부터 중창까지, 심지어는 자녀들을 동원한 악기연주까지, 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족들끼리 그렇게 특송을 한 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씀을 가끔 하셨는데, 아버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어머니는 적극 만류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꼭 특송을 하겠노라 덜컥 신청부터 하시고는 날짜와 곡까지 정해서 통보를 하셨습니다. “슬픔 걱정 가득차고 내 맘 괴로워도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죄 짐이 풀렸네~.” 아버지의 고집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매일 저녁 동원되어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형제가 모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특송 연습을 하러 모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매일 저녁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그냥 우리끼리 몸싸움을 하거나 티격태격하는 것이 더 즐겁지, 몇 번을 불러도 별 다를 바 없는 화음을 들어야 하다니….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적극적인 화음을 듣는 것은 아주 큰 고역이었습니다. 무조건 크게만 부르면 ‘장땡’이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깜짝 놀라 깨어나실 정도였습니
3. 포교계 제출 거부와 교회 폐쇄(1918) 한국의 기독교가 20세기 초 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교세가 급격하게 성장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극도로 경계하며 이들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을 내놓았는데,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 규칙’과 1915년 8월 ‘포교규칙’이 그것이었다. 기독교의 경우,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통해 미션스쿨을, ‘포교규칙’을 통해 교회를 통제하고자 했다. ‘개정사립학교 규칙’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스쿨의 성경 교육을 포함한 기독교 교육을 전면 금지하면서 동시에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식민지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고, ‘포교규칙’은 대부흥 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성장하고 있던 기독교를 억제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포교규칙을 강요받은 것은 대한기독교회(1906~1920,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전신)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교단은 1914년에 발발한 교단 내 지도권 다툼으로 인한 내홍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원산에서 개최된 1914년 제9차 대화회(총회)에서 제1대 감목(총회장)이던 펜윅이 이종덕 목사를 제2대 감목으로 지명함에 따라 교단 내 지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교단 지도자들은 대화회가 있기 전부터 제2대 감목은 신명
교도관 시절의 이야기다. 갑자기 한 수용자로부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정식으로 만나겠다는 의사 표시이며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꼭 만나달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대부분 수용자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화 중에 마시게 될 커피 한 잔이 그리워서 만나자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커피 한 잔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 어떤 상담자보다 문제해결의 능력이 탁월한 것을 매번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커피 한 잔 마신 후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기쁜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이 수용자는 방을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방을 옮겨주지 않을 경우엔 사고를 쳐서라도 징벌 사동인 독방으로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면담을 요청 한 수용자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수용자는 뭔가 느낌이 달랐고 몸까지 허약한 상태라 보안과와 상의한 끝에 본인의 의사대로 독방으로 옮겨줬다. 나는 그 후로 매일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를 찾아가 기도해 줬고, 성경책도 방에 넣어줬다. 놀라운 것은 일주일 만에 그 성경책을 일독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