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들은 로마에 납부해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이 징수해서 자신들의 배를 채웠기에 민족의 반역자로 천한 자, 죄인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세리 마태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며 제자의 자리로 부르시게 됩니다. 일어나 따르라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 9:9) 사람들이 세리는 싫어하지만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세금을 적게 내게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마태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는 단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선택했던 돈과 명예의 자리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주님이 부르실 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일어나 따라감으로 위대한 제자가 됐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일어나 주님께 순종하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함께 있으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순수하다’라는 말은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빌립은 눈치도 느리고 특별한 재능도, 은사도 없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순수한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단순한 순종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1:43)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셨을 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때 놀랍게도 빌립은 예수님을 그냥 따라갑니다. 심지어 성경은 ‘빌립이 예수를 따라갔다’는 결과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가 됐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사람은 그대로 믿지만 의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쉽게 순종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명령에 의심하고 주저하기보다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ekstnsg나 순종을 하기 바랍니다. 분명한 확신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이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고 하용조 목사의 ‘초점’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지식)은 필요 없어! 그냥 믿으면 돼! 머리로 따지지 말고 느끼는 대로 믿어!”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생각을 멈추라, 연구(공부)를 멈추라, 질문을 멈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내용의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매우 지성적이셨습니다. 율법을 정확히 이해하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논리로 꺾으셨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지식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아라”(신 4:39) “주의 율법을 묵상하라”(시 1:2)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라”(빌 1:9~10)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 그렇다면 지식과 삶(행함)이 균형을 이루는 신앙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반, 실천을 반으로 섞는 절충적인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지식적으로 바르게 알고, 그 알게 된 그 지식의 토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삶이 균형 잡힌 바른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삶은 지식(이해와 깨달음)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올바른 이해와 지식 없이 올바른 신앙과 삶이 나올 수 없고, 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하시는 방식, 곧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인도하고 다루시는지 배우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분이시며, 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지위와 위치는 어디인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간격과 질적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려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오셨는지를 배우는 것이 신앙입니다(이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이 말은 어떻게 인격적인 인간을 기르시고 다루시고, 양육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과 일하심(양육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인지 그분의 기호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죄와 의, 성화(형상 회복)에 관하여 아더 핑크는 그의 책 ‘전적 타락’에서 설교자의 책무를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의 첫 번째 직무는, 모든 인간적 자랑과 교만을 긁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높이 바라보는 것을 내려뜨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악 된 부패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욕심 많은 사람에게 ‘놀부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영어권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도마와 같은 사람’(Doubting Thomas)이라고 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의심했던 제자 도마’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의심이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의심이 찾아올 때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도마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자가 되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의심이 많은 도마가 됐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구멍 난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생장으로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의 여정입니다. ‘산티아고’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야고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지중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배를 타고 로마를 지나 스페인까지 건너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야고보의 별명은 ‘열정적인 제자’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결단의 사람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20) 예수님께서는 어부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베드로, 안드레와는 다른 위치의 어부였습니다.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버려두고’라는 말에서 ‘품꾼(the hired servants)’은 고용된 일꾼들이기에 일꾼들을 거느리고 어업을 하던 선주이거나 많은 부를 누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유함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 야고보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붙잡고 주님만 의지하는 성도는 믿음의 모험을 떠나는데 주저하지 않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열정의 사람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
기독교 신앙은 창조의 절정이자 중심인 인간을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둡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관계하도록 창조된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성과 인격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고 관계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종교개혁자 칼뱅은 기독교는 두 지식의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인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면밀히 살핍니다. 반면에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만, 정작 인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지식에는 소홀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에 대해서도 성경은 많은 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에 대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관심을 가져도 성경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 혹은 성경 외의 ‘책’
베드로는 약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수를 할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보면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 많이 공감대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다시 부르시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시 부르심(Recall)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부르셨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포기했지만 주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이 낙심과 절망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힘든 일이 있다고 세상 사람들처럼 술을 마시거나 쾌락과 정욕으로 빠지면 심령이 더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성도는 예수님께 다시 돌아와야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리콜의 목적은 사랑을 회복하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하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도 어려움이 찿아옵니다. 요한복음 2장 1~11절은 혼인잔치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에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원치 않는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찿아옵니다. ‘이제 큰일 났구나’ ‘잔치를 망쳤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인잔치에 먹구름이 찿아온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혼인잔치는 7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고을에서 이적을 베푸셨으나 믿지 않은 곳에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를 알고 찾는 자에게 그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23~27절에서 호수에 풍랑이 일어나 배가 가라 앉을 때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문제를 만날 때, 주님을 깨우고 찿아야 합니다. 본문에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힘든 게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범한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로 사람을 낚는 사람들, 사도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제일 첫 번째로 제자가 된 사람은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입니다. 그의 이름은 ‘남자다운,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갈릴리의 어부였고 그의 형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 1:37) 안드레는 침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침례 요한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요한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6) 침례 요한의 이 말에 안드레는 곧장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는 진리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고 따름에 있어서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축복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용기를 내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