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원고까지는 3번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위의 4번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 4:6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두 사람의 마라아는 누구누구란 말인가? 그 첫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마리아이고 그 다음 둘째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이 섬기는 마리아다. 전자는 진짜이고 후자는 가짜이다. 성경의 마리아를 보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의 수태를 예고했었다. “보라 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온통 의아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보충 설명이 따른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리라”(눅1:35) 마리아는 즉각 순종했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8) 성경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단순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서 수태를 수용한 마리아다. 그 뒤 성경에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호칭됐다. “성경에는 이 마리아에 대해 ‘주님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 ‘그 어머니’ ‘네 어머니’ 또는 ”내 주의 모친” “그 모친” “예수의 모친”이라고 불리다.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러온 사실은 없다. 성육
전 국민이 코로나19로 대구가 생지옥 같았던 지난해 3월, 직접 트럭에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마스크를 나눠준 영화배우가 있었다. 바로 김보성씨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달에 또 다시 대구로 달려갔던 김보성씨는 ‘의리의 사나이’로 소문난 배우다. 그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의리 신드롬’에 빠질 정도였다. ‘의리’ 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즉 인간의 기본 인성 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기본적 인성인 최소한의 의리마저 다 무너진 듯한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이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다. 형제국과의 전쟁 요단강 동쪽 나라 암몬은 요단강 서쪽 해안가의 블레셋과는 달리 사실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암몬은 모압과 함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 세웠고,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웠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신23:7)고 했고,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신2:19)고 했다. 서로 미워 하거나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실 형제가 어릴 때는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마지노선은 1934년 프랑스가 독일국경에 만들어 놓은 요새선(要塞地)으로 근대 축성(築城)의 획기적인 축성인데 전쟁 중 독일 공군에 의해 파괴됐다. 독일군이 이 마지 노선만 넘으면 프랑스에 큰 타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노선은 넘어서는 안 될 절대경계선이다. 이것을 빗대어 우리 생활에도 마지노선을 넘었으니 어쩌니 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나? 그 선은 지켜야 할 생명선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마지노선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은 마지노선을 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마지노선을 범한 것이다. 일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일찍이 마지노선을 범했다. 마지노선 이전에 있어 야할 그가 그만 선을 넘었다. 그게 타락이요 범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 니라”(창 2:17) 이게 하나님의 마지 노선이다. 그런데 여자가 범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마지노선을 범한 후 그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인도하심을 구합니다…우리는 영적 균형을 잃고, 절대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1996년 1월 23일 미국 캔자스 주 상원 의회 개회식때 기도하신 조 라이트(Joe Wright) 목사의 기도 내용이다. 그는 ‘다원주의’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진리를 타협하는 것과 ‘또 다른 라이프-스타일’이라며 성적 타락을 인정해 주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착취하는 '로또 당첨', 게으름을 보상하는 ‘복지’, 태아를 죽이며 ‘부모의 선택’이라고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것 등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또 권력을 남용하며 ‘정치’라 하고, 공금을 횡령하며 ‘필수경비’라 하는 것, ‘야망’이란 이름으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고, ‘표현의 자유’라는 그럴듯한 말로 경건치 않은 삶과 포르노로 공기를 더럽히는 것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존중받은 가치들을 농락하는 것에 대해 눈물로 기도했다.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사람들은 강퍅해지며 나라가 어지럽다. 이런 때에 우리의 발목을 잡은 코로나19는 진실로 눈물로 매달릴 때가 되었다는 표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인이다. 왕으로 등극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며 조 라이트 목사처럼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돼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 의 법을 버리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
단순히 불신세계의 남성 탈선 문제를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혹 어떤 남성이 이래저래 탈선해놓고 늘어지는 변명을 뇌 깔이고 있기에 “그건 아니올시다. 오해하시는군요.”라고 신약 성경이 답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목적은 일부일처제가 하나님 본성의 제도라는 것을 알자고 한 것이다. 구약세계는 하나님 계시의 여명(黎命) 시대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천하를 환하게 비추는 것은 신약세계이다. 그런즉 구약 여명 시대 것을 신약 계명 시대의 그대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구약 계시의 여명시대에 일부다처 사례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구약세 계에서 일부다처제 곧 축첩은 다반사로 있었고 아무런 윤리적 개념도 없었 다.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갈이란 첩을 두었고(창16장) 야곱이 레아와 라헬 두 자매를 아내로 뒀고(창29, 30장) 사사기 기드온도 그랬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 멜렉이라 하였더라”(삿 8:30~31) 솔로 몬도 부하 장군의 아내들 강제로 취해 왔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신다(8:10~19). 끝없는 사랑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통 큰 양보가 돋보이지만 그 허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이기도 했다. 먼 훗날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 13:11)라고 하신다. 결국 이스라엘의 신정(神政) 정치는 막을 내리고 왕정(王政)이 시작된다. 헤매던 사울 사울의 첫 등장은 좀 예상외다.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가문인 기스의 아들(1~2절), 그렇다면 남쪽을 대표하는 유다 지파도 아니고 북쪽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지파 출신이라 시기와 질투도 별로 없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 등장이 근사할 만도 하건만 아니다. 첫 등장은 ‘헤매는 모습’이다. 베냐민이라는 종족적 배경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준수한 소년’, 이스라엘 중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의 준수함과 그 위풍이 화려해서(9:2,24)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9:20)가 됐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사모하는 자’를 ‘가장 훌륭한 자’라고 번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평생 자녀들 뒷바라지로 살았습니다. 학교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밤낮없이 밭에서, 논에서 해질 때까지 일하면서 80년 넘는 세월을 살며, 저에게는 밭이 학교였고, 호미자루가 연필이었답니다. 그런데 진도군에서 문해학교가 생겨 용기를 내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멋진 책상과 의자가 있는 교실이 좋았고, 내 책, 연필, 공책, 필통으로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재밌기도 했지만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 속상하기도 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이 되어 떳떳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날, 졸업생 대표로 낭독한 한 엄니 학생의 글이다.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 버리기가 쉬운 연세에 있는 분들이 학창시절에 못한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늦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장날 장에 갔다 시간을 맞춰 달려오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병원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날에는 빠질 수 없다며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받아
습관은 여러 번 반복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생긴 버릇이다. 이것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는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으며 좋은 습관은 범사에 유익과 성공이 있게 한다. 반면에 나쁜 습관은 개인의 삶을 피폐케하며 국가적으로는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B.C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패망케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시길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청종치 않는 나라의 백성 들은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정부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하게 패망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의 삶에서 습관이 있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셔서 늘 성경을 읽으셨고(눅4:16) 마을들을 찾아다니시며 전도하셨다(막1:38). 특히 밤이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쉬거나 기도하셨다 (눅22:39).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 기도하기, 복음전하기, 봉사하기 등이 예수님처
손을 의식적으로 불 속에 넣어 화상을 입었다면 생존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며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에 따른 반대 되는 행동이다. 외부 세계에 자연의 법칙이 있듯이, 감정과 사고의 영역에도 자연의 법칙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 세계만큼 내부 혹은 심리적 영역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정서적 본성을 어김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보지 못한다. 내가 화를 낸다면 그 화는 먼저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감정과 생각을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해를 미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화나게 한다고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화내기에 앞서 먼저 자신 안에서 만들 어진 화를 느끼고 화를 낸 이후의 결과에 후회하게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외부에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내부에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손을 불 속에 넣으면, 자신이 행한 실수를 바로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화를 내거나 증오 같은 격렬한 감정이 표출될 때는 외부의 사건들처럼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대부분 원인과 결과를 전혀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을 자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에벤에셀의 영웅 사무엘도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된다. 너무 빨리 늙었다. 어머니 한나에 의해 잉태됐다는 것과 어린 시절에 대한 분량에 비해 사사와 선지자,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분량이 너무 짧다. 미스바 집회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했다는 말씀을 하자마자 바로 은퇴를 준비한다. 물론 이후에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인 사역은 여기가 끝이다. 앞으로는 사울과 다윗으로의 왕정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무엘의 사명(使命)이다. 왕을 세우고 왕정의 기초를 닦는 일 외에 다른 인생 이야기는 없다. 왕 세우는 일도 사무엘 입장에서는 기쁨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백성들의 요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런 게 사명이다. 사명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고, 싫어도 하는 것, 사무엘은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명에 충성했고, 위대한 다윗 왕조를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년의 사역이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였던 “왕을 세워 달라”라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대로 할 때가 더
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불태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수많은 짐승이 죽었고 이런 제사를 끝도 없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장도 백성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드리며 제사를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를 계속 드리며 지쳐 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를 끝내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속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