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마을에 기독교 홍모 목사가 주도하는 자선 사업 가게가 들어선 지 수년이 됐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물건이나 혹 쓰다가 그만둔 물건이 있어 그곳에 기증하면 염가로 판매해서 장애인을 돕는다는 선한 취지로 운영되는 고마운 가게였다. 초창기 나는 이 가게의 취지와 목적을 많이 홍보해줬다. 나도 많은 물건을 기증했다. 물론 기증할 때는 일전 한 푼 대가를 받는 것이 없다. 순전히 공짜로 기증 받은 것을 염가로 판매하지만 솔직히 이익이 붙는 장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가게의 직원이 모두 교체되고 난 뒤 가게의 분위기가 나에게는 시베리아 벌판이다. 살벌하다. 이익을 많이 남겨야 한다는 상업정신이 살아난 것이다. 거의 발걸음을 멈췄다가 도무지 지금은 어떤가 싶어 짐짓 친구와 함께 들렀다가 커피 한 잔을 샀다. 이미 우리들은 커피를 많이 마셨기에 딱 한 잔을 주문했다. 이 한 잔을 다른 종이컵에 나눠 먹었으면 해서 직원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종이컵 하나를 달라 하니 일언치하(一言治下)에 거기 쓰여 있는 경고문(?)을 읽어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이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기증자들이 수없이 많은 물건을 기증해 왔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커피 한잔의 봉사
지난 한 주간 옛날 17년간 목회한 제2의 고향인 부산에 내려갔다. 둘째 딸의 초청으로 해운대 넘어 송정에 우리는 모처럼 쉬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의 기회를 나누었고 해운대, 기장과 영도, 다대포와 일광에 둘러 해변가를 나가 경치를 보며 전도지를 나눠주고 전도했는데 마지막 날 만난 그 사람은 아주 정색하며 반감으로 거절하는 바람에 나의 기를 꺾는 듯 했으나 그래도 두 손으로 전도지를 전하며 꼭 읽어 보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시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우리가 잘 아는 크리스천 철학자 파스칼(Pascal)의 세계는 그의 철학의 빛들로 가득차 있다. 그의 명상록 “팡세”(Pance)의 서문에는 그가 고치지 못해 고통받던 피부병을 예수님의 성상 앞에서 기도하고 손이 닿았을 때에 깨끗이 고침을 받은 기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게 되었고, 기독교 철학자가 되는 동기가 됐다고 한다. 또한 그는 어떤 말들보다 훨씬 고귀한 말을 했다. “모는 육체들이나 별들과, 땅이
4) 기술의 혁신을 추구 현대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그 주기가 짧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과 해결책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양산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정부와 기업은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며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미래적이고 선제적인 혁신기술과 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특별히 4차 산업혁명을 지지하는 기술 낙관론자들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혁신적인 방법을 통해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 IOT는 기술혁신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연결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신속하게 활용해 공유하도록 돕는다. IOT에는 사물과 데이터의 연결이 가능하도록 기기를 연결해 주는 센서가 110억 개에 달하고 있으며 이 수치는 2030년에는 100조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 연결기술이 확장될수록 데이터의 활용범위가 넓어지고 상호작용을 통한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융합의 범위를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 성공회를 개혁하려한 청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첫째, 모든 예배와 신앙행습은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예식서의 예전적 형식의 예배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 하에 자유롭고 살아있는 예배였다. 따라서 획일화된 예배를 생산하는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폐지돼야 한다. 둘째, 가톨릭교회의 절기들을 없애고, 대신 주일을 엄격히 성수해야 한다. 주일날 세상적인 오락과 경건치 못한 언행과 행위들은 금하고 경건하게 지켜야 한다. 셋째, 예정과 특별구속, 하나님의 언약은 성서적 진리이므로 믿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계약사상)은 존 칼빈과 스위스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로부터 기원했다. 칼빈의 언약신학은 예정론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언약을 맺었으며, 따라서 언약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일방적인 약속이라 하였다. 한편 불링거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반응을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 계약사상을 주장했는데 즉,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화해와 축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소나 닭들을 방목하며 키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참 평화롭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묶여 있거나, 갇혀있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이곤 했습니다. 그 차이는 “자유”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근심, 걱정, 불안, 시기, 질투, 미움, 낙심, 절망, 두려움 등 우리가 이런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복”인 “자유”가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이 자유가 진리 안에 있으며, 진리를 알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가능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교회 임원진들과 회의를 할 때, 교회 내에 물건을 구입하는 일에 있어서나 또는 단합회 선물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교회 리모델링 등 여러 의견들에 있어서 늘 마음을 비우고 가능한 한 성도들의 의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지내왔지만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사수해왔습니다. 왜냐면 진리는 하나님 말씀 곧 하나님 뜻이기
목사님께 가난한 집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의 지혜와 명철로 제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가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학교도 다니고 함께 먹고, 함께 등산도 하면서 무엇이든지 함께 동고동락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빵 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벌더니 어느날 변해 버렸습니다. 제가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금전적인 부탁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 뒤로는 이제는 길에서 서로 만나도 아는 척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인사는커녕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한참 동안 눈을 감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습니다. “이쪽으로 오셔서 창문 밖을 쳐다보세요? 무엇이 보입니까?” “산이 보입니다. 집이 보입니다. 빵 가게도 보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리 오셔서 거울을 보십시요!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의 마음이 유리창처럼 투명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보면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고백했던 말, “여호와 이레”. 우둔하고 연약한 사람의 생각 너머에서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외치는 소리다.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삼일길을 걸어가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해 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 준비해 놓으신 그 분의 손을 모르고도 순종할 수 있었는데, 적어도 우리는 그를 위해 벌써부터 준비하시고 기다리셨다는 말씀의 주님을 알고도 순종하지 못한다. 부족하지만 작은 순종에 준비하시고 기다리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10여년전 한국의 모든 사역을 정리하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기도하던 아내가 처가가 있는 논산 시골 마을에 아동센터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생활비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의 씨앗을 심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위해 기도했다. 2년여 동안 가깝지 않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교대로 몇 차례를 오가며 아동센터를 세웠다. 급식비라도 보조금을 지원 받기 위해서는 2년 동안 개별적으로 운영을 해야 하기에 가능한
인생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나 그 인생의 시발은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다. 10개월이 아닌 장장 3년을 어머니 모태에만 남아서 살겠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은 고집쟁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그런 고집쟁이는 아무도 없다.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란 의학적으로는 출산이다. 어머니는 출산했고 아이는 출생했다. 탈출은 못 있을 곳이기에 그곳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되지만 천국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탈출해야만 하는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한 시점의 사건이지만 존재의 양태는 언제나 탈출이다. 탈출은 이동을 말한다. 인간은 식물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적 존재이니 그 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 맨 날 움직이는 존재다. 탈출은 발전을 향한 발 뛰어 놓음이지만 탈선과는 다르다. 탈선은 어느 시점이든 정상에서 벗어남이요, 정상의 부정(不定)이요, 파괴다. 출생한 영아는 태아(胎兒)의 자리에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고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의 이동이다. 다 자란 청년이 되어서는 부모의 품안에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인간은 캥거루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모로부터 탈출을 결혼이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성경속이나 세상 역사속에 절대 왕좌에서 최상의 영화와 권세로 40년간 복록을 누린 이스라엘 3번째 왕인 솔로몬왕이 그의 저서 전도서에 첫 번째 나오는 오허(五虛)의 말씀이다. 솔로몬의 외경인 지혜서에도 “우리의 이름은 조만간 잊혀질 것이고,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은 구름의 자취처럼 사라질 것이고, 안개처럼 흩어질 것이다”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회고했다. 그런데 전도서의 결론으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로 심판주이심을 진술했다. 대학시절 영어영문학과에서 배운 미국 시인 롱펠로우(Longfellow)는 “구슬픈 싯구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공허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요, 사물은 눈에 보이는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 내 분수에 넘는 세월은 그 얼마나 의심스럽고 안타까운 것이었던가!”라고 일본의 위인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72세로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프랑스 시인 라우르 뾰숑이 완전히 은둔하자 친구가 찾아가서 파리 구경이라도 같이 가자고 권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왜 파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전통적인 변신론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게 직접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잘 보여 줍니다. 삼인칭적 경험과 일인칭적 경험의 차이지요.” 강영안 저(著)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IVP, 19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교 변증학의 거성(巨星) C.S.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한 권은 고통을 객관적인 어조로, 이론적으로 다룬 ‘고통의 문제’이고, 다른 한 권은 자신이 겪은 슬픔을 관찰한 ‘헤아려 본 슬픔’입니다. 전자가 3인칭 시점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1인칭 체험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마치 고통이 저만치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통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제일 유명한 구절이 이것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그러나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다릅니다. 루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만년에 뒤늦게 만나 결혼하게 된 사랑하는 아내 조이 그레섬이 죽은 직후 이 책을 씁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했던 자신의 말을 잊은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나타나는 기술의 융합과 연결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산업구조와 새로운 생활의 패러다임을 지칭하는 말로 그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를 살펴보면 사물인터넷, 빅 데이터, 플랫폼, 인공지능 등이 나타난다. 물론 이외에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특징과 현상이 존재하나 전반적인 과학기술과 산업체제의 변화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이 연구의 범위나 목적을 넘어서기에 위에서 열거한 일반적이며 대표적인 특징들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려 한다. 1) 플랫폼(Platform) 플랫폼은 4차 산업혁명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플랫폼은 본래 기차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목적지로 보내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현대사회는 이 용어를 기술 혁신을 통해 사람과 사람 또는 사물을 연결하는 인프라를 제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의 생태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전통적인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 생산자와 다른 쪽에 연결된 소비자 사이의 중간역할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다면 플랫폼 기반 기업은 혁신적인 과학기술과 플랫폼을 중심으로 모인 사용자들 간의 개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연결해 새로
한국침례교 최초의 순교자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박노기 목사, 김희서 교사,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였다. 이들은 10월 20일 포시에트해(海) 모커우 지점에서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해 해상에서 순교했다. 이 일이 연추와 수청 전 지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교회 부흥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동아기독교 순회전도자들은 대게 육로로 이동했는데 왜 이들은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이동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당시 국경지대에 마적단(馬賊團)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바닷길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연구자가 지난해 1월 연해주의 고려인 역사관을 방문해서 초기 한인이 탔던 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배가 너무 초라한 목선(木船)이어서 오늘날의 국제여객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배였다는 사실이다. 큰 풍랑을 만난 작은 배로 인해 순교한 것이었다. 4. 평가 시베리아는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이 가장 단기간에 이뤄졌고 빨리 문을 내린 지역이다.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1909년 2월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1925년 가을에 으르싯쓰교회가 마지막으로 개척됐다. 시베리아에 44개의 동아기독교가 세워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작품 중에 묘사된 유토피아(Utopia,理想国)는 헬라어 ‘ou(not)’와 ‘topos(place)’의 합성어 ‘outopos’로 그 뜻은 ‘not+place’ 곧 ‘nowhere’이다. 그런데 그의 유토피아 제2권에서 이방인과 공산주의자의 도시국가로 묘사된 이성(理性)에 의해 전적 통치되는 헌법과 정치록(1516)에 관해 가장 훌륭한 공화국가로 새로운 섬 “유토피아(Utopia)”는 플래툰(Platon)의 공공성(Repablic)을 말하지만 유토피아는 없었다. 결국 이 세상엔 이상국이라고는 없다는 뜻이다. “예수 믿고 천당가요!” 어떤 때는 노란 종이에 빽빽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선전종이를 주기도 했으나, 엄마 따라 울릉도 주사골 봉래폭포 위에 있는 석굴의 절법당에 다니는 나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예수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고 뒤따르며 놀려대기도 했다. 1951년 8월 3일 처음으로 저동침례교회에 나간 뒤 알고 보니 그는 교회당에서 100m쯤 떨어진 용바우골에 사는 교회 집사라고 했다. 그 후 그 집사님을 볼 때 부끄러웠고 매우 훌륭하게 보였다.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목회자가 없어 대전지방 도안교회가 문 닫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해보라고 하고, 신약은 할 수 없는 일인데 해보라하지 않는다 (Law would tell us something even though it was impossible for us to do. Gaspel would not tell us to do something if it were impossible to do.). 구약 율법은 우리에게 못 올라갈 나무에 올라가 보라고 말하고 신약의 복음은 못 올라갈 나무라면 아예 올라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너는 안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은 “너는 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실천과 에베소서 5장 21~33절의 부부생활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으니까 해보라고 한 것이다. 율법은 안 되는 줄 알면서 시켜본 것이고 신약은 되는 줄 알기에 해보라는 것이다. 어째서 복음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거의 같은 시기의 러시아의 문호 끄리일로프(Krylov)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인을 하고 잡혀서 사형을 받아 죽고 한 사람은 유명한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존경을 받다가 나이가 많아 죽어서 심판대에 서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죄가 인정되어 지옥으로 가서 벌을 받게 됐습니다. 둘 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마솥에 들어가게 됐고, 가마솥 밑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었으나 살인죄를 짓고 사형을 받고 온 죄인의 불보다 오히려 책을 많이 썼던 학자의 불이 더 뜨거웠습니다. 학자는 “재판장님! 저 사람은 사람을 죽인 흉측한 살인자지만 저는 그런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남의 것을 한 푼도 훔치거나 떼먹은 일도 없는데 불이 더 뜨거운 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라고 항의를 하자 재판장은 “저 사람은 한 사람의 생명을 죽였거니와 너는 네 쓴 책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병들고, 죽게 했노라. 그러므로 너는 불이 더 뜨거운 것이 마땅하니라”고 선언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볼테르야말로 수세기를 이어오면서 그의 높은 지식과 넓은 학문에 비춰 불멸의 지성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