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밤’을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꽃잠’이라고 표기했다(중략). 음식점에서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는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첫사랑을 꽃사랑이라고 하면 더 풋풋할 것 같고 하기 싫은 공부를 꽃공부라고 하면 덜 지겨울 것 같기도 하다.” 김홍신 저(著) ‘하루 사용 설명서’(해냄, 6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을 꼽으라면 ‘꽃’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입니다. 꽃은 하나님의 미소,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선물입니다. 보는 이가 없다 해도 들꽃은 피고, 그리움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해도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슬픈 단어에 ‘꽃’이라는 말을 붙이면 한결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꽃아픔, 꽃갈등, 꽃싸움, 꽃미움, 꽃두려움, 꽃열등감, 꽃질투, 꽃욕, 꽃이별, 꽃슬픔, 꽃고독, 꽃분노, 꽃외로움… 심지어 돼지 앞에 꽃을 붙이면 꽃돼지가 되어 이쁜 돼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은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 미안한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좋
성경에 비둘기는 좋은 새로 등장한다.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문 예가 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또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도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그러나 무릇 모든 예화나 비유에 등장하는 사물은 그때의 교훈을 위한 단편적 일회적일 수가 많다. 가령 누룩만 하더라도 이단 교훈으로 누룩을 말하기도 하고 천국의 확장을 의미하는 누룩으로도 말해지고 있다(마13:33, 마16:6). 이런 것을 서두에 말하면서 비둘기 인생이란 주제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둘기의 답답한 삶의 일면 때문이다. 공원에 가 보면 비둘기가 떼를 이루어 날았다가 내려오곤 또 온종일 옆도 살피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며 쪼아 댄다. 이게 혹 먹이가 아닌가 저게 혹 먹이가 아닌가 하고 무조건 눈에 띄는 것을 쪼아 본다. 먹이면 먹고 아니면 뱉으면 된다는 식이다. 가만히 보노라면 이 짓을 하루 종일 계속한다. 그 조그마한 창자를 채우려고 세상모르고 땅을 쫓는 저 비둘기를 보노라면 위도 못보고 하늘구경도 못하고 오직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만을 찾아
대학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그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서커스 장소에서 일어난 화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커스 주인은 불을 끄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여 맨 먼저 만난 광대를 붙잡고 빨리 동리에 나가서 화재 진화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 광대는 서커스 준비로 이미 무대 연기를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벗을 여유 없이 곧장 동리로 달려가 “불이야!” 하면서 서커스 장에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광대의 행동이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마음껏 박수를 치며 웃었다. 광대가 더 광분하고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수록 사람들은 그 열렬한 연기에 더욱 크게 웃었다. 결국 서커스 장을 태운 불길은 온 동리를 덮쳐 불 속에 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목사의 구령에 대한 경고가 교인들의 웃음거리로 넘겨졌을 때의 결과는 우리 이웃과 한국과 지구촌도 다 지옥 불로 타고 만다는 뜻이 아닐까? 주님의 유언이요. 지상명령인 구령의 사명을 잊어버린 오늘 우리에게와 교회에게 주신 경고와 경종이겠다. 복음전도로 구령의 시급성을 알리는 “지옥, 불이야!”라는 말에 우리는
태종 시대에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한 사람이 북을 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듣고 왕이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북을 치는 절차가 까다로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북이 있으나 마나 했다. 서민들이 신문고까지 가기에 너무 먼 길이었다. 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령에게 고하고, 다음에 관찰사, 그 다음에 사헌부,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세종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419년(세종 1년) 2월 17일, 참찬 김점(金漸)이 이름뿐인 신문고 제도를 혁신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절차를 폐하고 누구든지 북을 칠 수 있게 하여 소원을 들어주자는 건의였다. 그래서 세종은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노비라도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조정하여 청렴결백한 동료나 상관을 모함하는데 신문고를 이용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마구잡이로 북을 치거나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나 그 배후 세력까지도 엄격하게 처벌하는 제도를 보완했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은 가난하고 힘
1977년 미국에서 제작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영화로 그 당시로는 황당한 공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42년이 지난 2019년 지금 황당한 공상이 대부분 현실이 되어 버린 세상이 됐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 상상력의 현실화가 핵심이다. 전 세계의 화두는 이제 4차 산업혁명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1, 2, 3차 산업혁명과는 달리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2016년 1월 2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클라우스 슈밥에 의해 처음 언급된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하는 기술혁명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개념인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이제 인간의 삶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다주고 있지만 상상 속에서만 꿈꿨던 미래생활과 기술들이 가져올 파급력은 제대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할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은 IT기술, 인공지능, 드론, 우주항공, 사물 인터넷, 가상현실, 생명공학 등이 연계되고 급속도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대혁
필자는 앞으로 세계 침례교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려 한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초 영국 분리파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되어 미국에서 꽃을 피운 세계 최대의 복음주의 개신교단이다.교세로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단들의 합 4800만 명, 미남침례교회 1300만 명, 그리고 독립 침례교회들을 합하여 전 세계에 약 80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명한 침례교인들로는 윌리엄 캐리, 찰스 스펄전, 마틴 루터 킹, 월터 라우센부쉬, 빌리 그레이엄 등이 있다. 필자는 구체적인 침례교 역사를 기술하기 전에, 침례교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성경중심주의와 교회관을 먼저 다루려 한다. 이번에는 침례교 성경중심주의에 관해서만 살펴보겠다. 성경이 신앙과 행습의 유일한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성경중심주의는 침례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개신교단들도 공통으로 믿고 있다. 개신교 보편 신앙인 성경중심주의가 어떻게 침례교회의 독특한 특성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 때문이다. 첫째, 침례교회는 어떤 신학이나 사상을 성경해석의 틀로 삼지 않고, 성경에 직접 나아가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집중하려 한다. 장로교회는 존 칼빈의 신학을, 감리교회는 존
“영어를 왜 배워야 해요?”. “영어, 한문 그런거 필요 없잖아요.” 이곳 진도에 내려와 아동센터 아동들을 교육할 때 들었던 소리다. 올해도 계획하고 있는 일로, 작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센터 아동들을 대상으로 미국체험과 어학연수를 계획했다. 가능할까 의심의 마음으로 시작을 하고 모집을 했는데 최종적으로 다섯 명의 아동들이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자녀들을 향한 교육 열의가 많은 부모들의 마음을 보았고, 센터에 속하지 않은 지역의 아동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땅끝 진도 농어촌의 시골 마을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이들이 미국을 향해 날아 갈 수 있을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눈치도 받았다. 그러나 다섯 명의 아동들이 서류를 준비하고 사전 교육을 받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사진을 보는 순간, 설마 하던 마음에서 “나도 가고 싶어요.”라는 소리로 바뀌었다. 수시로 미국 생활의 사진을 볼 때마다 호기심과 설렘은 커졌고, 영어나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에 부정적이던 말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어떻게 가면 되요?”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이곳 지역아동센터의 29명의 아동 중에 대다수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다. 가까운 읍의 학교 만해도 부모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경주 보문단지의 펜션에서 둘째 처남이 회갑연을 베풀었다. 그 후 행사를 마치고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는 길에 90살인 장모님이 동행하는 자녀들에게 “이번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을 했네.”라는 말을 했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겨울철 경주 보문단지는 벚꽃이 만개하는 봄처럼 아름답지 못하다. 그 날은 몹시 춥고 바람까지 불어 밖에서 산책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을 했다는 장모님의 말에 모두들 의아했다. 그 동안 세 처남들 사이엔 갈등과 불화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유산을 적절하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끔 집안 행사가 있어 모이면 서로 얼굴대하기가 껄끄럽고 힘든 관계였다. 하지만 회갑연에서 처남들과 가족들이 보여준 태도들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장모님에게 꽃바구니와 용돈을 드리며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였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식사를 하고 재미있는 순서도 가졌다. 그런 것들이 장모님에겐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이었다. 90세가 되도록 자녀들에게서 늘 바랐던 형제 우애와 화목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상담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대화의 기술은 단연 공감이다. 상대의 아픔과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공감을 통해 드러난다. 상담의 90퍼센트가 공감만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감이 100퍼센트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할 때가 온다. 혹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지를 안 써준다고 상담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펄펄 뛰다 돌아간 내담자는 다시 상담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칭찬으로만 일관할 수 없다. 물론 칭찬을 충분히 많이 해야 하지만, 문제가 있는 행동을 지적하고 선을 그어야 할 때도 많다. 아이들에게 늘 잘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나친 칭찬과 허용이 아이를 망치기 때문이다. 배우자에게 잔소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의 관계가 위로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는 없다. 늘 편을 들어주면 상대방과 틀어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제 좀 그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까지 똑같은 불평을 계속할 것인지,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것인지 답
책상에서 지리학을 배우고 독도법을 배운 사람들은 지도를 펴들면 산의 높낮이와 길이가 숫자로 떠오른다고 한다. 산사람들이나 특전사 요원들은 지도를 펴들면 먼저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두 발로 산과 계곡을 헤매이고 수없이 실시되는 야외 훈련을 통해 손발과 몸으로 독도법을 익혀기 때문에 박노해의 시 ‘정신의 발’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보면 지리학을 공부한 지리학자가 지리를 잘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역설이 나옵니다. 책상에서의 공부와 일상에서 이뤄지는 공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체득한 지식을 가슴으로 정리해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습기 있는 지식이 있고 메마른 지식이 있습니다. 메마른 지식은 머리에서 나오고, 습기 있는 지식의 지성소는 가슴입니다. 습기가 부족한 지역의 이파리는 가시가 되어 가듯이 메마른 지식은 가시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찌릅니다. 눈물과 땀이 가득한 습기 있는 지식은 수많은 생명을 살려냅니다. 신약성경 사복음서에는 모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 중 누가복음의 내용에는 독특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눅8:6). 바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
우주의 항성 또는 행성들이 인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체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당기고 밀면서 자전 공전을 거듭하면서 각자의 위치를 유지하듯이 한 사회 역시 말 이라고 하는 요체를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엮이어지면서 문명이라고 하는 옥동자로 가시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 멀리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말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더없이 멋쟁이이고 더없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러므로 말에 대한 이야기를 좁은 지면에다 표현 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그 많은 말 중에 남의 말에 관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를 너나 할 것 없이 느끼고 있습니다. 말의 공해라고 해야 합니까? 그 말의 공해란 “필요 이상의 남의 말”이 그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또 남의 말이란 “사돈이 밭을 사면 배가 아파요”는 질투의 심성과 자신의 결백이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자기변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그 주종을 이룹니다. 성경은 비판한 그대로 헤아리는 그대로의 보응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응은 뒤로 하고서라도, 장난으로라도 연못에 던진 돌맹이가 아이들에게는 재미놀이가 될는지 모르지만 물속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개구리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심각한 사건
평생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마더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봉사활동을 하실 때에 함께 일 할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첫째, 잘 웃고 둘째, 잘 먹고 셋째, 잘 자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 3가지가 잘되어 있는 사람이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기본자세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뿐만 아니라, 어느 유치원 원장도 직원을 채용 할 때에는 잘 웃는 직원을 뽑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 역시 아주 간단했습니다. 잘 웃는 직원이 어린이들을 더 친절하게 더 열성적으로 더 열심히 보살핀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업무와 관련된 지식은 한두 달이면 익히지만, 잘 웃는다는 것은 인격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웃음이 인격이며, 성품이고, 기회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잘 웃을 수 있다면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도 같은 값이면 잘 웃고 친절한 사람에게 물건을 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구매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내용)이 문식(꾸멈)보다 승하면 야하고,문식이 실질보다 승하면 너무 화미하다. 실질과 문식이 겸비되어야 한다. 이것을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한다.” 김성우 저(著) ‘명 문장의 조건’(한길사, 18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치열한 역사에 승리하면서도 황홀한 신화를 아는 사람. 차가운 경제 용어를 알면서도 시어(詩語)에 젖어 사는 사람. 추상같이 냉엄한 결단을 내리지만, 이웃의 아픔 앞에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 멀리 보는 독수리의 눈을 가졌지만, 곤충의 눈으로 발밑의 미물(微物)을 볼 줄 아는 사람. 명검이 있지만, 제어하는 칼집이 있는 사람. 아끼고 절약하지만,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는 거룩한 낭비를 하는 사람. 지식이 있지만 지혜까지 넘치는 사람. 진지하지만 유머가 넘치는 사람. 달려갈 줄 알지만, 멈춤의 돌아봄이 있는 사람. 옳기도 하고 좋기도 한 사람. 물음표도 있고 느낌표도 있는 사람. 목표의 아름다움과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의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 중심이 흔들리지 않지만, 어울릴 줄 아는 사람. 자존심은 낮출 줄 알고, 자존감은 늘 높은 사람. 예민하지 않지만, 이웃의 필요에는 민감한 사람. 뱀 같은 지혜로움이 있지만,
가나 혼인 잔치 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세 통 되는 항아리 여섯에 하인이 물을 채움 같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두 눈을 씻음과 같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명하신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해 배를 타고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림과 같이 그리고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라는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함과 같이 그리고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 “오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의지가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와 상식을 벗어나 순종하기에 심기가 불편하게 여겨져도 그리고 순종할 때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피곤하고, 지쳐서 도무지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하므로 인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에 많은 손상을 입는 일들이 발생하며 또한 위험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선 자신의 마음을
요셉이 애굽에 간 것은 인신매매되어서이다. 여러 형제들이 시기와 미움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은 20에 팔아넘김으로 그곳에 가게 됐다(창37장). 그는 팔려갔지만 거기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됐고, 전에 꿈꾼 것들이 거기서 다 이뤄졌다. 기근에 애굽까지 식량을 구하러온 형제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을 누구보다 편애했던 아버지 야곱은 어떤 경우에도 그를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나 인신매매되어 먼저 애굽에 가게 됐다. K 선교사는 나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파키스탄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한 그에게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됐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비전을 갖고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느냐, 바울이 빌립보에 간 것처럼 환상을 보고 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해줬다. 파키스탄인에게 속아서 갔다고 했다. 그는 괌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자기 나라에서 고아원을 운영한다는 파키스탄인을 만났다.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