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의 기독교전략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능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능으로 자연을 정복할 만큼 강해졌다면, 그 지능조차 보조하고 심지어 대체까지 할 수 있는 기술은 실로 가공할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 무서운 힘이 반드시 건설적이고 결코 파괴적이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자동화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이 이 세상의 일을 중심으로 다뤄 왔다면,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은 신의 영역까지 들어갔다. 이러한 4차 산업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종교계의 무서운 변화도 예측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육과 인간의 죽음을 결정짓는 영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신이 필요치 않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종교는 있지만 신이 통치하는 세상은 없어지고 인간의 편리함과 유익을 추구하는 종교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인 죄, 인간, 하나님이라는 구도 안에 예수
거의 세계인은 물론 우리 한국 사람도 우간다 나라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래 전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우간다의 아름다움을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했었다. 영화 ‘타잔’의 배경이기도 한 우간다는 조그마한 빙하 지대에서 열대 지역까지 품고 있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국토의 1/6 이상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 천혜의 자연을 보유한 아름다운 나라이다. 코끼리와 하마와 사자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산과 숲에는 고릴라와 침팬지 그리고 1,000여종이 넘는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인 빅토리아 호수와 우간다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방문한다는 아름다운 분요니…. (밀알 2017년 봄호 Vol.57 P.30에서 인용) 우간다의 자연환경은 그렇거니와 나라의 구성은 어떤 것인가.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부터 우간다는 아프리카 중앙 동부에 있는 나라로, 19세기 강력했던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부터 유래했다. 정식 명칭은 우간다 공화국(Republic of Uganda)이며, 수도는 캄팔라(Kampala)이다. 14, 15세기경 오늘날의 국민을 이루고 있는 부족들이 중앙아
윌리엄 브랜함(Branham) 부흥사는 놀라운 신유 부흥사로 한 번은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농아를 먼저 강단 앞에 세우고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 귀신아 떠나가라.”고 명령해 즉시 고침을 받게 됐다. 이것을 보고 오스본(T. L. Osborne) 목사는 크게 은혜받아 변화됐다고 한다. 그에게 은혜받은 큰 종을 영적 아들로 두긴 했으나 브랜함 목사 자신은 진리로부터 떠난 어떤 교리를 전개했다. 1963년대에 그는 요한계시록 11장에 있는 ‘두 증인 중의 하나’가 자신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극단적인 논쟁에 휘말렸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다. 오늘날 한국교회나 세계적으로 마지막 때에 출현한 이단경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965년 12월 신유부흥사 브랜함은 애리조나로 가는 십자로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음주운전하는 차에 그의 차 앞부분을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운명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한 무리는 브랜함이 하나님이 될 것이고 처녀에게서 다시 탄생할 것이라고 믿
가정뿐만이 아니라 5만 명 이상이 거주하지만 신호등이 하나도 없는 스마트 도시도 등장한다. 이는 도시들이 서비스, 공공사업. 도로를 인터넷과 연결하고 스마트하고 지능적인 기능을 적용해 데이터 분석과 예측 모델링을 통해 이루어내는 미래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은 빅 데이터 통계 기법을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악하여 즉시 제품에 반영하는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는 구조를 가져올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소비자의 욕구가 있고, 이를 최고, 최대로 만족시키기 위해 연관된 기술들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3)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사물 인터넷이란 인터넷을 기반으로 모든 사물을 연결하여 사람과 사물 혹은 사물과 사물 간의 정보를 상호 소통하는 지능형 기술이나 서비스를 말한다. 1969년 10월 29일 인류 최초의 인터넷 아르파넷(Arpanet) 두 컴퓨터는 접속 개시를 뜻하는 5바이트 크기의 한 단어 ‘Log In’을 전송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인류 최초의 인터넷 연결이후 9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를 중심으로 100만 대의 기기가 인터넷에 연결됐고, 90년대 말 노트북이 가세하며 10억
침례교회가 다른 교단과 구분되어 독자적인 교단이 된 주요 이유는 독특한 신약성경적 교회관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지난 호에서는 신자의 침례를 다루었고, 이번에는 중생자 회원과 엄격한 치리 전통을 살펴보려 한다. 1. 중생자 회원 침례교인들은 신약성경의 교회는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적 교회를 지향하는 침례교회 역시 중생한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즉 침례교회는 신약교회를 재현하려 하였기에 중생한 신자가 회원이 되는 교회를 추구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어떤 사람이 중생한 사람인지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중생한 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했는데, 침례교회는 침례를 중생의 객관적인 지표로 삼기로 했다. 침례는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만 받았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신앙고백과 관계없이 행해졌기 때문에 중생의 표지가 될 수 없으며, 당연히 교회 회원의 기준도 될 수 없다고 봤다. 회심하고 침례 받은 신자를 교회의 정식회원으로 삼는 행습은 영국과 미국 침례교회의 교회언약서, 헌장, 신앙고백서 등에 표현돼 있다. 예를 들면, 1644년의 “제1차 런던 신앙고백서”의 제33항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교회는…성도들의 모임이다.
“목사님, 뒤에서 팍팍 밀어줄테니 하고 싶은 일 해보세요.” 어느 날 보험회사 설계사인 K집사님이 뜬금없이 해온 말이었다.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해왔지만 그동안 개인적으로 목사의 후원자가 되어주겠다는 교인은 없었다. “그래요. 기도와 봉사로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에요. 돈으로 후원하겠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요.” K집사님의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동차 보험에 들게 하고 거기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수당의 몫은 전부 목사의 이름으로 된 통장에 바로바로 입금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나는 그녀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솔직히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수당이란 게 적은 금액일 수도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협조해줄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K집사님은 실행에 옮겼고,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때로는 몇 만원 때로는 일, 이십 만원 이란 금액이 꾸준히 들어오더니 얼마의 기간이 지나선 몇 백 만원이 됐다. 그때서야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이 뭐였지를 생각해봤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교회당을 지어줄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란 말 ‘소확행’이 유행되고 있었다. 그녀가 힘쓴 후원금으로 뭔가는
“병이란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할지를 모르는 것” 이성복 님의 시 ‘오늘 아침 새소리’입니다. 시인은 그리움 때문에 병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할 줄 모르는 것이 병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움 대신에 차지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공, 명예, 돈, 욕심… 이런 것들로 인해 어느덧 그리움은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시가 없고 그리움이 없으면 플라스틱 인생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그리움 때문입니다.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갑니다. 자기가 떠나온 늪지대의 물소리, 바람 소리가 그리워 구만리 장천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갑니다. 그리움이 있는 옛날을 ‘추억’이라 하고, 옛날에서 그리움을 빼면 그저 ‘기억’이 됩니다. 혜원 신윤복이 남장(男裝) 여자라는 오해를 일으킨 ‘바람의 화원’이란 팩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단원 김홍도가 도화서 서생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그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서생들이 대답을 합니다. “사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묘사한 것이 그림입니다.” “멀고 가까운 것을 분별하는 것이 그림입니다.” 혜원의 차례가 왔습니다. “너는 그림이
내 나이 10세 때인가 보다. 큰 개 한 마리를 키우는 증외갓집에 자주 다녔다. 물론 그때는 매어놓지 않고 풀어놓고 개를 키우는 때였다. 그런데 나는 이 개를 무서워했다. 그 개만 보면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섰다. 어느 날 이놈의 개는 나에게 덤벼들어 나의 종아리를 물어 제켰다. 피가 났다. 나는 공포와 아픔에 질려 울었다. 외숙모라는 아줌마가 담담하게 말한다. “괜찮다. 우리 개는 착하다.” 착하긴 뭘 착해. 이미 나를 물어 제켰는데. 종아리에 피가 나는데. 외숙모라는 아줌마는 그냥 개를 저리 가라고 워리워리 하고는 나에게 와서 된장을 발라 주면서 괜찮을 것이라 할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개에 그 외숙모 아주머니구나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동네 또래 아이들과 함께 그 집을 지나가노라면 이놈의 고약스러운 개는 달려와서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굳이 나를 지목하여 짖어 재기고 그리고 또 물어 재긴다. 환난의 순간이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겪었다. 10대 아이인 내 마음 속에는 복수심이 생겼다. 두고 보라. 이 세상의 모든 개들은 나의 적이다. 그땐 집에서 키우던 개를 아무 생각 없이 요리해 먹는 것이 세풍(世風)이었다. 사돈이 오는 등 귀빈
바울 사도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증거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증거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순교한 제자의 삶이었다. 탄생과 부활이 하나님의 전적인 구속 섭리의 예정으로 이뤄졌다면,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 자기의 멍에를 지신 예수님께서 자원하 신 것이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장엄한 광경이요, 기적이며, 인류역사는 이 갈보리 십자가의 빛 아래 조명돼야 한다. 에릭 사우어(Eric Sauer) 박사는 “구약은 약속과 대망이요, 신약은 성취요 완성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전투에 대비해서 군대를 배치시키는 것이며, 신약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말
우리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서 있다. 산업이라는 단어에 혁명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해 일어난 산업상의 변화가 사회,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과 기계화로 대표되는 1차 산업혁명, 19세기 말 전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본격화된 2차 산업혁명, 그리고 20세기 말에 인터넷이 이끈 컴퓨터 정보화 및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주도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4차 산업혁명이란 IT(information technology) 기술,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빅데이터(Big Data) , 우주항공(Aerospace) , 생명공학(Biotechnology) 그리고 모바일(Mobile) 등 지능정보통신기술이 기존 경제와 산업, 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만들어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말한다. 3차 산업혁명의 키워드가 정보화였다면,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는 지능화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어떤 징조를
침례교회가 다른 교단과 구분되어 독자적인 교단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침례교회만이 믿고 있는 독특한 신앙교리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같은 성경을 믿으면서 여러 교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성경 해석의 차이에 기인한다. 교리와 신학은 성경 해석의 기준이 되며, 따라서 교단의 나누어짐은 교리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내에서 교리의 차이는 크고 본질적인 경우도 있고, 미세하고 비본질적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이나 정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교리를 믿고 있으나, 개신교단들 간에는 교리적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다. 침례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요 유일한 구원자이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하나님임을 믿는다. 또한 성경의 권위, 유일한 중보자 예수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등의 교리를 믿는다. 침례교회는 이처럼 개신교단의 일원으로서 다른 개신교회들과 공통적인 신앙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다른 교단과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적 특성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침례교 정체성의 핵심이며, 침례교회로 하여금 독립된 교단으로 남아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성경중심주의와 신
“소설을 쓰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밤’을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꽃잠’이라고 표기했다(중략). 음식점에서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는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첫사랑을 꽃사랑이라고 하면 더 풋풋할 것 같고 하기 싫은 공부를 꽃공부라고 하면 덜 지겨울 것 같기도 하다.” 김홍신 저(著) ‘하루 사용 설명서’(해냄, 6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을 꼽으라면 ‘꽃’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입니다. 꽃은 하나님의 미소,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선물입니다. 보는 이가 없다 해도 들꽃은 피고, 그리움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해도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슬픈 단어에 ‘꽃’이라는 말을 붙이면 한결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꽃아픔, 꽃갈등, 꽃싸움, 꽃미움, 꽃두려움, 꽃열등감, 꽃질투, 꽃욕, 꽃이별, 꽃슬픔, 꽃고독, 꽃분노, 꽃외로움… 심지어 돼지 앞에 꽃을 붙이면 꽃돼지가 되어 이쁜 돼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은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 미안한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좋
성경에 비둘기는 좋은 새로 등장한다.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문 예가 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또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도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그러나 무릇 모든 예화나 비유에 등장하는 사물은 그때의 교훈을 위한 단편적 일회적일 수가 많다. 가령 누룩만 하더라도 이단 교훈으로 누룩을 말하기도 하고 천국의 확장을 의미하는 누룩으로도 말해지고 있다(마13:33, 마16:6). 이런 것을 서두에 말하면서 비둘기 인생이란 주제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둘기의 답답한 삶의 일면 때문이다. 공원에 가 보면 비둘기가 떼를 이루어 날았다가 내려오곤 또 온종일 옆도 살피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며 쪼아 댄다. 이게 혹 먹이가 아닌가 저게 혹 먹이가 아닌가 하고 무조건 눈에 띄는 것을 쪼아 본다. 먹이면 먹고 아니면 뱉으면 된다는 식이다. 가만히 보노라면 이 짓을 하루 종일 계속한다. 그 조그마한 창자를 채우려고 세상모르고 땅을 쫓는 저 비둘기를 보노라면 위도 못보고 하늘구경도 못하고 오직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만을 찾아
대학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그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서커스 장소에서 일어난 화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커스 주인은 불을 끄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여 맨 먼저 만난 광대를 붙잡고 빨리 동리에 나가서 화재 진화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 광대는 서커스 준비로 이미 무대 연기를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벗을 여유 없이 곧장 동리로 달려가 “불이야!” 하면서 서커스 장에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광대의 행동이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마음껏 박수를 치며 웃었다. 광대가 더 광분하고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수록 사람들은 그 열렬한 연기에 더욱 크게 웃었다. 결국 서커스 장을 태운 불길은 온 동리를 덮쳐 불 속에 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목사의 구령에 대한 경고가 교인들의 웃음거리로 넘겨졌을 때의 결과는 우리 이웃과 한국과 지구촌도 다 지옥 불로 타고 만다는 뜻이 아닐까? 주님의 유언이요. 지상명령인 구령의 사명을 잊어버린 오늘 우리에게와 교회에게 주신 경고와 경종이겠다. 복음전도로 구령의 시급성을 알리는 “지옥, 불이야!”라는 말에 우리는
태종 시대에 대궐 밖 문루(門樓) 위에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고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한 사람이 북을 치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듣고 왕이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북을 치는 절차가 까다로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북이 있으나 마나 했다. 서민들이 신문고까지 가기에 너무 먼 길이었다. 북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수령에게 고하고, 다음에 관찰사, 그 다음에 사헌부,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세종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419년(세종 1년) 2월 17일, 참찬 김점(金漸)이 이름뿐인 신문고 제도를 혁신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절차를 폐하고 누구든지 북을 칠 수 있게 하여 소원을 들어주자는 건의였다. 그래서 세종은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노비라도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조정하여 청렴결백한 동료나 상관을 모함하는데 신문고를 이용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마구잡이로 북을 치거나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자나 그 배후 세력까지도 엄격하게 처벌하는 제도를 보완했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판은 가난하고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