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값이란 말이 있다. 껌을 사는데 드는 돈이며, 또한 시중에 파는 간식성 먹거리 중에서 값이 가장 싼 것이기에 무언가 하찮고 적게 들어가는 비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데 씹다가 뱉어버린 껌은 쓸모나 값이 있겠는가? 미국 시애틀 어느 골목벽엔 기상천외한 관광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껌을 씹다가 뱉어서 벽에 붙여놓음으로 생긴 것이다. 그곳을 방문하면 역겨운 냄새가 고약하지만 뭔가 재밌고 흥미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씹다가 뱉은 껌의 값에 대한 놀라운 기사도 있다. 영국 매체 스포츠 바이블은 알렉스 퍼거슨이란 사람이 씹은 껌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5억 8000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알렉스 퍼거슨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축구감독으로 긴장해소를 위해 1500회 축구 경기에서 3000개의 껌을 씹었다고 한다. 특히 2013년 5월 19일 은퇴 마지막 경기에서 껌을 씹다가 뱉은 것을 한 팬이 주워서 장식장에 보관해왔다. 그러다가 ‘알렉스 퍼거슨 경의 마지막 껌’이란 문구를 적어 경매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일반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낙찰된 것이다. 껌값이라 하지만 껌을 누가 언제 무슨 용도로 이용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짐을 알려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8~19) 블레셋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세력이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기 전에 제거하고자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질문하여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인 성도들 같았으면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무슨 “전쟁에 나갈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조건 군사를 소집하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았던 삶이 몸에 베여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 시간에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두는 부분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데 둡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 외에 또한 저와 함께 계신 성령님의 지시를 늘 따르며 살아가는 데 온
“예전에는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사람이 좋았다. 요즘에는 심장 박동수를 느리게 하는 사람이 좋아졌다.” 노수봉 저(著) “뜨끈뜨끈 광고 회사인의 메모장”(북클라우드, 9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있고,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좋고 필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평가절하가 많았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은 깃발을 꽂게끔 돕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은 ‘풍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청미래, 280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기차가 좋은 것은 ‘앞’을 보여주지 않고 ‘옆’ 풍경을 보여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림에서 떨어져 그 대상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형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을 본다는 것입니다. 들숨 뿐 아니라 날숨이 있어야 호흡을 하듯이, 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보기를 원합니다. 더 넓게 보기 위해서 더 높이 떠오르시기를 바랍니다. 더 깊이 보기 위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원합니다. 한반도 창공을 높이 떠올라 지구를 통찰해 봅시다. 러시아의 흰 곰이 얼음 구멍에서 먹이를 찾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남쪽의 섬에서는 물개가 먹이를 찾아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저 태평양 넘어 독수리가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자기 먹을 것만을 찾고 있습니다. 높이 떠올라 더 높이 떠올라 서쪽을 보세요. 수 만년 묵은 고목나무가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동남아를 쳐다보세요. 야자수 그늘이 점점 사라지고 고목나무의 새순이 그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한반도 위 창공에 떠올라 보세요. 휴전선 토막한 땅 속에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아 남진하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땅 위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미래의 지도자는 세계 속에서 국가관을 일깨워주고 한국인의 민족혼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양떼를 어느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산 좋고 물 좋은 곳,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곳이 어디인가?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
미래를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볼 수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면 또한 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먼 소경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인도한다 할지라도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도자란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만약에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거나 내다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소경은 인도자가 될 수도 없고 길가는 나그네에게 이정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사람이 길가는 이들에게 이 말 저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사흘길이 되는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빗자루 들고 마당 쓸러 나가는 사람에게 마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독생자’로 번역된 단어(‘모노게네스’)는 본래 “단 하나의” 혹은 ‘유일무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특별한 성격 곧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1:18; 3:16, 18). “아버지의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의 존재 곧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존재이셨으며, 화육하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결되셨으며, 이제는 보혜사 성령의 존재로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용어에서 중간에 위치한 ‘생’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의 출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출생한 것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한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다른 화육의 신학을 부각시킨다. 화육의 신학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중생과 칭의의 동시성 개념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제공하여 의롭게 만드는 칭의와 새 생명 곧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중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롬5:18; 요5:24). 이처럼 카너는 ‘의롭게 만드는’ 칭의의 경험적 측면을 통해 중생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반면에 무디는 중생의 당연한 결과로서 칭의가 발생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라고 간략하게 표명했다. 2. 중생과 성화와의 관계 대그는 중생을 성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를 선호했다. 이는 그가 중생과 성화의 행위가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중생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과 육신의 소욕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행위를 증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갈5:17). 그래서 대그는 중생과 성화의 시작을 동시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빌2:13). 보이스는 대그와 달리 중생이 성화보다 선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중생을 성화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사람이 중생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획득해야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중생과 성화가 본성적으로 하나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강조는 중생과 성화 모두가 시작부터
이사준비에 참 바빴다. 전세든 우리 예사랑교회 장소를 옮겨야 한다. 어디로 옮길 것인가? 노영식 목사님의 세 번 초청으로 청계산 기도원에서 장기 금식기도 중 서울 말죽거리 개척을 중단하고 부산에 내려갔더니 동래구 거제동 남문구 길가 2층에 10여명 모이는 교회에 부임해 그 후 7번이나 개척 교회당 이사를 옮긴 후 사직동 중앙교회당을 건축한 70년대의 기억이 새롭구나! 서울교회에 와서는 사택을 7번 이사한 경험도 떠올랐다. 침례교 전국여성선교연합회 건물수리 관계로 예사랑교회는 수원역 화서로 옮기도록 기도와 답사 끝에 50여 평 남짓한 이층으로 계약하고 7월 초에 이사해 새로운 복음전도의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둔 수난주간 마지막 세 예화 중(마25장)에 열 처녀의 비유를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떠오른 기름준비의 말씀이 나의 심령을 두드렸다. 교회당 이사준비로 몇 주간 깊이 생각하고 이사준비하고 실행하는데 준비처럼 나와 성도들의 천국 이사준비는 어떤가? 천국과 지옥의 실존에 이어 천국 소망에 대해 설교했고, 기름 준비 없이 깜박거리는 등불만 들고 기다리는 교인들이 있어 이는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세상의 돌아가는 종말적 징조는 너무나 농후한데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해보라고 하고, 신약은 할 수 없는 일인데 해보라하지 않는다 (Law would tell us something even though it was impossible for us to do. Gaspel would not tell us to do something if it were impossible to do.). 구약율법은 우리에게 못 올라갈 나무에 올라가 보라고 말하고 신약의 복음은 못 올라갈 나무라면 아예 올라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너는 안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은 “너는 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실천과 에베소서 5장21~33절의 부부생활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으니까 해보라고 한 것이다. 율법은 안 되는 줄 알면서 시켜본 것이고 신약은 되는 줄 알기에 해보라는 것이다. 어째서 복음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율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① 많은 것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② 미래의 노후 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幸福)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現代人) ③ 나누면 행복(幸福)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現代人) ④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現代人) ⑤ 늘 행복(幸福)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해매며 찾아다니다가 일찍 지쳐버린 현
“문장에 파란이 없는 것은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 천하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곡선이지만. 죽은 것들은 모두 뻣뻣하다. 자연계는 곡선을 좋아한다. 연기와 같이 피어오르는 안개, 뭉실뭉실 솜 같은 구름, 담을 넘어 삐죽 고개를 내민 꽃가지, 구불구불한 시내… 반면에 인조물은 직선을 좋아한다.” 임어당 저(著) 김영수 역(譯)“여인의 향기”(아이필드,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건축예술의 거장 안토니 가우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니체 또한 “진리는 모두 곡선”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은 ‘곡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서 나옵니다. 산 능선에서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눈썹과 같은 곡선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곡선이고 난초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의 귀는 곡선으로 생겼기 때문에 직선의 언어보다는 곡선의 노래가 더 잘 들어옵니다. 나무도 그러합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습니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새들도 곧은 가지보다 굽은 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고, 함
생전 처음 명동에 간 나는 양장점과 구두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외계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어떤 진열장에 걸려 있는 흰색 원피스를 가리키며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 그 가게 앞에는 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은 문턱이 있어서, 나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 밖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주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동생을 반겼다. 그런데 동생을 탈의실로 안내한 후 무심히 돌아서던 그녀가 문에 기대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와요.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번에는 한 옥타브 더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구요!” 순간 그 소리를 들은 동생이 옷을 입다 말고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라고 그랬어요, 지금. 우리 언니를 뭘로 보는 거냐구요!” 나는 그제야 주인 여자가 나를 가게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지난 전국사모회 제12차 총회와 교육수련회가 6월 3~5일 부산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서 열려 폐회설교 부탁을 받고 처음으로 동참하게 됐는데 200여명 넘는 사모님들이 참석했다. 돌이켜보니 2년전 총회 주소록을 받고 교단 전체교세가 없어 주소록에서 대충 헤아려봤더니 115지방회의 4810교회에 목회자 수는 6226명으로 기억됐는데 따져보니 평균 30:1 비율로 200여명이 참석했었다. 듣자니 지난번 교단 홀사모 위로회는 40여명 중에 30여명이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사모회는 좋은 강사진과 알찬 진행으로 영적 은혜를 많이 받은 집회에 소수로 모여 아쉬움이 남는다는 참석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새로운 집행부는 명년에도 갑절로 참석토록 행사위주의 진행보다 열매맺는 영적 집회가 되도록 더욱 잘 준비하기를 기대해 본다. 엄부자모란 말이 있는데 아버지는 엄중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모님은 사모님(師母任)? 사모(事母)님? 사(思)모님? 무슨 뜻인지? 목사의 어머님, 스승 같은 어머님? 일하는 어머님? 사모하는 어머니란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사모는 목사가 설교를 길게 하면 뒷쪽에 앉았다가 일어나서 손으로 X표를 하는가하면 노골적으로 설교가 뭐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고 행복할까?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절대 착용하지 않을 장신구를 갖고 있는 것으로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까?(중략)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으로 채워진 자신의 공간과 생활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이상적인 생활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곤도 마리에 저(著) 홍성민 역(譯)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더난출판, 58~5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리의 여왕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통쾌한 선언을 합니다. 그녀는 두근거리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하며, 두근거림이 없는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좋아하는 것들로 삶이 채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인생의 고통은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많은 것을 얻은 자가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을 버린 자입니다. 어리석은 새는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든 주워 모으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주워온 유리 조각 쇳조각들로 둥지가 엉망이
율법의 복은 조건부 복이다. “…행하면…” “…순종하면…” 등 사람 편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사라고 했다. 물론 이말 속에는 “…행하지 않으면…복을 안주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쏟아붓는다고 했다(신28장). 이에 비해 복음의 복은 조건이 없다.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은 하나님이 충족시켜 놓은 조건이다(요일 3:16, 요일 4:10).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것에 눈을 감으시고 복을 주었다. 눈 감으신 것이 아니라 눈을 뜨셨지만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셨으니 곧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 하셨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들의 허물과 죄 위에 보혈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구약 율법이 주는 조건부 복을 나열해 보자. 성읍에서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신28:3), 온갖 인생과 짐승의 소생이 복을 받고(신28:4),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신28:5),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신28:6), 적이 한길로 침입했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혼줄나게 쫓겨 가고(신28:7), 꾸어 줄지언정 주지 않고(신28:12), 남의 머리가 될지 언정 꼬리가 안 되고 위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