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행 길에 가장 심하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율법적 안식일과 십일조다. 예수 피 공로로 사죄받아 칭의얻고 성화과정을 거치며 재림의 구주님을 기다리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의 고속도로에 안식일과 십일조라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장애물은 구원사역의 시초에서 사라진 것이었는데 누가 다시 갖다 놓았던가? 단적으로 이단들의 소행이다. 그 이단이란 누구를 가리키냐? 안식일을 고수하고, 또 십일조를 법으로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언필칭 십일 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행하라고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다. 십일조를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나의 불신친구는 끝내 십일조 헌금 문제로 아직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있다. 고정수입에 십일조가 첨가되어도 빠듯한 살림인데 거기서 1/10을 빼간다는 것은 경제 논리상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가 경제학 정공학도이지만. 엄격한 안식일만 하더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4시간을 무위무동(無爲無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안식교 의사는 아예 토요 안식일에 대어 놓고 의료행위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안식일 준수 못한 죄책감으로 안식교인으로
전쟁에서 연속 이기고 언약궤까지 빼앗은 기쁨은 잠깐, 블레셋은 언약궤를 조롱거리로 삼으려는 뻘짓 때문에 다곤 신은 박살나고, 언약궤를 갖다 놓은 지역마다 독종 재앙으로 비상이 걸렸다. 환난을 면해보려고 이리저리 언약궤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지역마다 쑥대밭이 됐다. 옮길수록 환난은 더 커지고, 사망 자가 속출하기까지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았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포로가 된것 같다. 그야말로 언약궤를 빼앗아 온이후 일곱 달은 공포의 7개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급기야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언약궤를 반환하는 블레셋 언약궤 반환을 결의한 블레셋 지도자 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삼상6:2).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릴 것을 제안했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제안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신을 달래려 한다. 유사한 것을 바침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주술적 행위인 동종요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금 쥐는 독종이 쥐를 통해서 전파된 것이라 생
노인의 되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행위다. 나도 여러 번 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내가 이제는 값싼 안경을 맞춰주는데 이유는 또 잃을 것이 뻔하지 않겠냐는 것이 다. 안경을 잃고 귀가하는 날, 안경 없는 맨 얼굴을 보고 아내가 묻는다. “또 그 안경을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소?” 정말 코믹한 아내의 질문이다. 세상에 자기 물건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짐짓 일부로 잃어버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건을 잃었을 때는 그 물건과 함께 시간과 장소도 잃게 마련이다. 이것을 잃음의 삼중주(三重奏)라 할까. 더 나아가서 잃은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물건을 잃을 땐 자기도 깜빡하는 순간의 자기상실이 따른다. 이때는 잃음의 4중주(四重奏)라할 것이다. 혹시나 하고 내가 머문 곳을 다시 가보아도 역시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잃는 장소와 시간을 확실히 알 턱도 없지만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그곳을 찾지만 역시나 역시이다. 물건상실보다 더 괴롭고 비참한 것은 자아상실(自我喪失)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기를 잃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잃어버린 자아(lost ego)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영원
‘한국이 소멸한다’의 저자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020년이 인구 변화의 중대한 기점”이었다고 강조한다. 740만 명에 이르는 제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선두 세대인 1955년생이 2020년에 딱 65세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후 2028년까지 8년 안에 제1차 베이비 부머가 모두 65세에 진입한다. 제2차 베이비부머까지 포함한 광역의 베이비붐 세대(1955~1975년생), 1700만 명이 생애주기 이동을 시작하는 셈이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에는 중년, 장년층이 넘쳐나게 된다. 전영수는 “100세 시대에 돌입한 지금, 40대는 과거의 중년이 아니다. 아울러 노인 기준이 상향 조정되며, 고령층이 ‘뒷방 늙은이’가 아닌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체’로까지 받아들여진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미래 한국사회의 급속한 변화가 시작됐음에도,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에 닥친 ‘노인문제’에 등한시했음을 다시금 인식하고,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시니어(특히 ‘신 중년’ 100세 시대의 50~70대)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견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주어왔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 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 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주었다고 꼭 팁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 보상을 위해서는 한 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고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 전파했다. 성경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했고 (3:20), 본문 1절에서는 “사무엘의 말이 온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라고 했다.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 도시이다. 마치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은 표현인데 지금 같은 미디어 시대도 아니고, 인터넷이 설치된 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알았다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 아닐까?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선지자가 되었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은 갑자기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로 바뀐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진다. 너무 명암(明暗) 대비가 뚜렷한 전개라서 좀 당황스러울 정도다. 다만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과 엘리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바뀌는 과도기(過渡期)였기에 엘리 시대의 결말을 정리한 것으로 본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엘리 가문의 영적 타락,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다. 은혜 상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함께로부터 태어났지만 나 홀로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왔던 세월 자만과 오만 감촉 살아 있어 착각 속에서 사랑을 느끼며 착각의 불만족에서 분노하였다 욕망으로 가득하게 팽배한 희망 삼아 지나온 세월 속에 지출된 그 삶들은 얼룩지고 고뇌와 큰 슬픔 느끼며 허망의 가득함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흩어진 빈 광야에서 나를 있게 한 함께를 그리워하며 회한의 눈물 한줄기 흘림은 새롭게 너를 느끼며 조용히 너와 나 관계를 찾았다 관계에서 바라보는 함께하는 사랑의 눈은 믿음의 실상 보며 너를 느끼는 나를 새롭게 평안으로 이끌고 남은 세월에 평안을 약속한다 사랑의 실상이 함께라는 이 실체를 길고도 긴 세월에서 나는 깨닫고 느낀다 내가 세상 끝까지, 그리고 영원히 너희와 함께하리라는 주님 자신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시인은 ‘크리스천문학’으로 등단했 으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 시집 ‘나팔꽃 당신’ 등 다수를 펴냈으며 부평중앙교회를 섬기고 있다.
영적 타락이 심각하던 시절, 하나님의 준비였던 사무엘(Samuel)이 소명 (vocation)을 받는다. 제사장(priest)과 선지자(prophet)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Judge)로 소명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士師) 시대와 왕정(王政) 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적 시대의 주역이 된 사무엘을 보며 우리의 소명을 생각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 제사장, 축복의 통로 당시 제사장 엘리(Eli)는 비록 아들들의 잘못과 자녀교육 실패에 대한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제사장 역할을 잘 수행한 측면도 있다. 기도하던 한나(Hannah)를 축복했고(1:17), 그의 축복대로 한나는 사무엘을 얻는 큰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사무엘을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를 또 축복해서 한나로 하여금 사무엘을 대신한 세 아들과 두 딸, 즉 5남매를 더 낳는 축복을 누리게 한다(2:20~21). 하나님이 은혜를 엘리를 통해 쏟아부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제사장은 축복의 통로다. 가끔 제사장의 능력이나 인격이 논란거리가 될 때가 있기는 해도 제사장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자 통로다. 물론 깨끗하면 잘 나오고, 녹이 슬면 쫄쫄 나오고, 오물이 많으면 아예 막혀버
한국교회가 심하게 침체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그 침체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의 침체는 전혀 코로나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가속화됐을 뿐이다. 2020년 연말 미국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가 세계 선진국 중심 14개국을 대상으로 1만4000명을 설문 조사했다. 코로나19가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중 미국 같은 경우는 코로나19로 신앙생활이 오히려 크게 더욱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나머지 조사국들은 예전과 비슷하거나 약간 활력을 얻었다고 답했다. 반면 조사국 중 유일하게 코로나19로 인해 신앙이, 그것도 심각하게 침체되었다고 답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50% 이상이 교회 안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청년부가 따로 없는 교회는 더욱 많다. 믿을만한 통계들에 의하면 현재 대학 생들의 경우에는 3% 남짓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에 대
코로나19로 인하여 유례없는 상황이 1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우울감을 느끼는 ‘코로나 블루’에 이어 분노를 느끼는 ‘코로나 레드’, 절망감과 암담함을 느끼는 ‘코로나 블랙’ 등 각종 신조어까지 나왔다. 교회를 섬기는 나 자신이나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초래된 변화와 어려움에 피로감이 계속 누적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체된 개인과 교회의 문제를 적절히 풀어가지 않으면 의욕상실, 부정적 관점의 강화, 영적침체 라는 악순환의 고리로 치닫게 되기에 이것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과 기도를 오가는 가운데 국내선교회와 미남침례회 해외선교회(IMB)가 주최한 ‘선교적 교회 세우기’ 세미나에 참여하게 됐다. 사실 이전부터 IMB에 대한 세계적인 명성과 선교적 활약은 익히 들었기에 부푼 기대와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리고 IMB는 어떠한 전략과 선교적 기술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고 세워나갈까 하는 호기심으로 세미나를 듣기 시작했다. 세미나의 내용은 성경과 교회 역사의 관점으로 조명한 선교적 교회에 대한 정의 및 이론으로 시작해서 선교현장에서 규범과 전략
길은 길로 인도한다 선택한 그 길 길이 된다 길의 끝에 미리 서 보라 낭떠러지인지 찬란한 영광이 비추이는 곳인지 길의 끝에 미리 서 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가시밭길에서도 산 넘고 물 건너는 순간에도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노래하며 걸을 수 있다 앞날에 펼쳐질 그림들을 생각하며 끝에 웃을 것을 기대한다 거룩한 길에 서서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침례교 목산문학회 회원이다. 현제 엘림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인정(人情)은 사람이 지닌 정이다. 그것은 사람만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이다. 인정의 대상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에 견정(犬情)이란 말은 없다. 돈정(豚情)이란 말도 물론 없다. 사람만이 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만이 인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주고받을 정(情)을 소유한 피조물은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은 없다. 문제는 사람만이 갖도록 부여된 이 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걱정이다. 지금 인정의 향방이 문제다. 우선 향방 자체가 없는 인정도 있다. 자기만이 소유하고 끝나버리는 메마른 인정이다. 이래서 정을 줄줄 모른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모양도 여간 딱하다. 어떤 인정은 주기는 주되 그러니까 향방은 있는데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 인정은 흐르긴 하지만 흐름의 대상은 물(物)이다. 돈에게 인정을 붓고 탐욕물에 인정을 쏟고 하는 등이다. 요사이 가장 쉬운 예는 반려견을 인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 하겠다. 오죽하면 그 대상이 사람(人)이어야 하겠건만 동물(動物)이랴. 그 이유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정을 줘도 받지를 않는다? 정 받을 사람이 너무 없다. 예수 하늘에서 인정을 주려 왔건만 사람들은 마다하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Abraham)은 축복의 통로였다. 은혜로 평화의 사도인 이삭(Isaac)을 얻었다. 이삭도 축복의 통로였다. 그 역시 은혜로 축복의 조상 야곱(Jacob)을 얻었다. 야곱도 대를 이은 축복의 통로였다. 그 또한 은혜로 예수의 형상인 요셉 (Joseph)을 얻었다. 축복의 물줄기가 대를 이어 흐르는 은혜로 인해 그 가문이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어느 학자는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막스 죽스(Max Jukes)라는 18세기의 두 가문을 비교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막스 죽스는 머리는 좋았지만 불신자였고 부도덕한 사람, 비슷한 처지의 여자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가 극도로 나빴고 집안에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이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는 예수 잘 믿는 은혜의 사람, 미국 초창기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 자였으며, 그 부인 역시 은혜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그 두 가정에서 나온 후손들을 보면 너무 달랐다. 막스 죽스의 506명 자손 중 310명이 거지였고, 150명은 범죄자, 그중 70명은 살인자였다. 사형당한 사
알렌 허쉬와 마이클 포르스트가 쓴 “새로운 교회가 온다”라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의 교회와는, 전에는 없었던 참신하고 매력적인 교회를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허쉬의 새로운 책, “잊혀진 교회의 길”(The Forgetten ways)에서 그가 원했던 새로운 교회란 사실은 성경에서 말했던 본래의 교회였으며,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의 길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전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다.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소원을 가진 자라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고 물으며, 찾고 찾으며, 세우고 또 세워야 하리라. 국내선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의 모임은 바로 이문제에 대한 해결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며,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바로 그 일이다. “선교적 교회 세우기” 세미나는 다섯 가지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지를 진단하고, 적용하고자 했다. 첫째는 “와 보라”(Come and See)에서 “가서 세우라”(Go and Stay)를 지향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오라”라고 명령
크억 크억 컥 푸우 아빠 콧소리 피유 피유 피르르 엄마 콧소리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콧소리 말똥말똥 밤을 뒤척이는 아가 숨소리 아가가 잠을 자다 깜짝 놀랐습니다. ‘크억 크억’ 천둥 같던 아빠 숨소리가 ‘컥’하며 멈췄기 때문입니다. 아가는 아빠를 깨우고 싶었습니다. ‘으앙’ 울음을 터뜨리려는데 갑자기 ‘푸우우’ 아빠 입에서 증기 뿜는 소리가 났습니다. ‘휴우∼’ 아가는 안심이 되었어요. 아가는 엄마 소리가 궁금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니 엄마에게서 ‘피유 피유 피르르’ 예쁜 산새소리가 났나고 엄마 소리는 엄마 냄새처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아빠 콧소리, 엄마 콧소리, 째깍째깍 시계 콧소리…. 잠들 수 없는 아가는 문뜩 자기 소리도 궁금했습니다. 말똥말똥 눈망울 빛내며 아가가 밤새 뒤척이고 있다가 사르르 잠이 듭니다. 과연 아가는 자기 숨소리를 들었을까요? 임경미 사모 / 비전교회
교단 내 임시총회에 향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은 거의 매년 임시총회를 열며 전년도 총회에서 미비했던 문제들을 다뤄 나갔다. 하지만 건설적인 결론이 도출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매번 대의원권 문제, 총회비 문제 등으로 시작도 전에 시간을 거의 잡아먹어 버려서 정작 논의해야 할 문제들은 제대로 된 이야기 한번 못 나누고 종결돼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또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이 규약이 맞다” “저 규약이 맞다”며 입씨름만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총회(총회장 박문수 목사)는 오는 4월 13일 오후 2시 여의도 총회 예배실을 비롯해 전국에 지정된 장소에서 대면과 비대면을 병행해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번 임시총회는 △총회 규약과 기관 및 위원회 정관 (규정), 총무 사무규정 수개정의 건 △다음세대 부흥위원회 신설의 건(규약기관) △원로목사(홀사모 포함) 지원의 건 △기관 재정립의 건을 다룬다. 이번 임시총회의 안건들을 살펴보면 크게 원로목사 지원의 건과 다음세대 관련 안건, 그리고 총회 기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게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관에 대한 문제다.
완연한 봄 날씨가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아직 우리는 메마른 땅에 우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한국에서는 지난 2020년 1월 20일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하고, 2월 16일까지 30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당시 확진자 증가 추세가 하루에 한두 명 수준이고 확진자의 동선 정보 공개도 바로바로 됐지만 2월 18일 31번째 확진자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모 사이비 종교를 통해 확산된 코로나19로 인해 확진자 수는 수백 배로 치솟았으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 아메리카의 확진자가 폭발하기 시작한 2020년 3월 10일 이전까지 확진자 수 순위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인구수 대비로는 세계 1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이때부터 한국사회는 물론 교회들의 수난이 지속됐다. 3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면예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확진자 수의 증가는 전국을 사실상 얼어붙게 했고 때때로 조금씩 완화되기는 했지만 1년이 넘도록 비대면예배가 지속되는 아픔을 겪게 했다. 총회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확산되면서부터 전국 교회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응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총회장이던 윤재철 목사(대구중앙)는 “코로나
올해 부활절은 오는 4월 4일로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이 땅의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죄목도 찾지 못하고 단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은 전후로 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키고 부활절 감사예배를 준비한다. 믿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왜 죽으셨는지를 전하며 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찾으며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한국교회도 부활절을 기념해 지역별로 수많은 교회들이 함께 참여해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고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며 회복임을 선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연합찬양대의 찬양과 설교, 헌금을 통한 구제와 나눔은 한국교회가 쌓아온 오랜 역사와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부활절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부활절과 관련된 여러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고 비대면으로 부활절을 기념했다. 주의 만찬을 대면행사로 여기는 방역당국의 지침으로 인해 ‘드라이브 스루 주의 만찬’이라는 신개념을 임기응변으로 실
지난 2월 26일 국내에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일상으로의 복귀가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 그지없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 지이겠지만 한국교회에게 코로나19 팬데믹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 상황이 이리 오래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고 대면예배를 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들의 피로 감은 계속 쌓여만 갔다. 하루빨리 예배당에 모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국내의 코로나19 1차 대유행은 대구의 모 이단 종교단체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대구·경북의 교회는 코로나 이전에도 해당 종교단체로 인해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1차 대유행 사태를 통해 더욱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당시 본보는 해당 지역의 몇몇 교회들과 연락을 취해 그 당시의 상황을 기사로 보도한 바 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미디어 선교의 중요성을 알고 미리 대비했던 교회나 그나마 인터넷 사용에 익숙한 목회자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예배를 지속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 들의 경우 그저 하염없이 교회의 문을 잠가 놓을 수밖에 없었다. 목회자가 준비됐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인터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교회는 대면예배의 제한과 기타 모임 금지라는 철퇴를 맞았다. 다수가 모이는 시설이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교회는 철저한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어느 기관 못지 않는 철저한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 옮겼다. 실제 신천지를 제외하고 종교시설 감염자 비율은 8.2%라는 최근 통계도 나오면서 정부는 “교회의 대면 예배를 통한 감염은 거의 없었다. 방역수칙을 준수한다면 대면예배 자체가 감염위험도가 높은 행위가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교회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감독은 여전하다. 매주일 시도공무원들의 교회 방문은 이제 일상적인 상황이다. 방역지침 점검을 내세우며 교회를 방문해 인원을 파악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점검하는 것에 대해 교회를 철저하게 이 지침을 준수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대면모임 비율은 수도권은 20%, 비수도권은 30%이며 예배 이외의 모든 모임은 일체 금지된 채로 1년의 시간이 지나왔다. 그동안 정부의 방역지침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해, 소상공인과 주요 업종별 관계자들은 헌법소원과 소송, 시위, 공청회를 거치면서 해결책을 찾았다. 집단감염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정부 측의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