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 피고인 신성균(平山聖均)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수년간 한문을 배운 후 농업에 종사하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타이쇼(大正) 5년(1916년)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됐고, 동 12년(1923년) 교사가 됐고, 다음 해(1924년) 목사로 선임되어서 현재에 이른 자이다. 쇼와(昭和)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昭和) 17년(1942년) 9월 상순 경까지 소속되어 있던 경상북도 영일군 송남면 광천리 광천교회에서 매 일요일 예배의 때 신자 이OO 외 약 30명에게 전기와 같이 설교를 했다.
제9 피고인 박성도(竹山成道)는 경성 기호중학교를 중퇴한 후 서당 교사,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중 동아기독교회의 교리 신조를 따라 메이지(明治) 44년(1911년)경 침례를 받고, 그 교인이 되어 타이쇼(大正) 13년(1924년) 감로가 됐고, 쇼와(昭和) 14년(1939년) 4월 목사에 선임됐다. 이후에 함경북도 함흥 종성에서 구역을 담당하고 현재에 이른 자이다. 쇼와(昭和) 16년(1941년) 5월 15일부터 쇼와(昭和) 17년(1942년) 9월 상순경까지의 기간 중 관할하는 구역인 나진교회 등에서 매월 1회 평균 예배 시 신자 김태복 외 약 320명에게 전기와 같은 설교를 했다.
1943년 5월 28일 9인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감옥생활이 계속됐는데, 1년이 넘는 혹독한 심문과 열악한 수감생활로 인해 교단 지도자들은 날로 쇠약해 갔다. 이들 중에 장석천 목사가 가장 병약했으나 기적같이 견디어 냈다. 그러나 1944년 2월 13일 전치규 목사가 병고에 시달리던 중 형무소 안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옥고와 영양실조, 여독으로 온 신병으로 인해 그는 57세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전치규 목사가 순교한 지 이틀 후인 1944년 2월 15일 이종근 감목(총회장)을 제외한 7인(노재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은 병보석으로 임시 출옥했다. 7인 병보석을 통해 볼 때, 이들의 형무소 생활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알 수 있다. 석방된 8인은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그들은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건강은 단기간의 치료로 완쾌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열악하였다.
이종근 감목은 옥중에 있었고, 병보석으로 임시 출옥한 7인이 각지로 돌아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무렵,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44년 5월 10일 함흥재판소가 동아기독교회 교단 해체령을 공표한 것이다. 해체령의 주된 요지는 동아기독교회가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거부하므로 일제와 천황을 모독했으며, 교단의 교규 내용이 국체명징에 위배되는 불온사상을 지닌 교단이라는 죄목에 대한 판결이었다.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처사로, 교단 해체와 같은 중대사를 서울의 고등법정이 아닌 지방법원에서 판결했다는 것이며, 법질서에 있어서 상식 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일제의 불법적인 교단 폐쇄령에 따라 전국의 동아기독교회 건물은 폐쇄 조치됐고, 일체의 예배행위가 금지됐으며, 교회의 종각들은 강제로 국가에 헌납됐고, 교회의 대지와 건물은 매각되어 국방헌금에 납입됐다. 충남 강경의 요지인 옥녀봉 일대 4천여 평이 넘는 강경교회 대지가 일제에 강제로 몰수되어 그들의 신사 부지로 조성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고 각 교회의 집회가 불허된 가운데, 1944년 8월 8일 임시 출옥했던 7인(노재천·김영관·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박성도)이 재수감됐다. 7인은 구류 중인 미결수 상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됐기에 몸이 회복됐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다시 수감했던 것이다.
공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7인은 집행 유예 5년으로 석방됐고, 이종근 감목(총회장)은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재수감됐다. 이종근 감목(총회장)은 1945년 3월 말 옥중생활 2년 9개월을 마치고 석방된 후 가족과 함께 만주의 간도로 이주했다.
교단 폐쇄령이 내려진 이후 예배처를 잃은 많은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타 교단으로 가거나 이 집 저 집으로 몰려다니며 예배드리다가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가정예배로 대치됐다. 동아기독교회는 해방되어 1946년 2월 다시 교단이 재건되기까지 최대의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침례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교단 대표 32인이 체포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으며, 이들은 열악한 수감생활 속에서 온갖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등 무지막지(無知莫知)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중에 최소 6명이 순교를 했는데, 전치규 목사는 옥중에서 순교했고, 김해용 감로, 남규백 감로, 박두하 감로, 이상필 감로, 장석천 목사는 출옥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순교했다. 그 외 다른 분들도 가족과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살아있다고 해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같은 순교와 고난의 발자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믿음의 후손으로서 이들의 신앙을 기리고, 계승하여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겠다. 이분들이 몸으로 저항했던 신사참배 거부는 8.15해방을 끝나지 않았다. 또 다른 측면의 신사참배 강요가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금 되새겨 보자.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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