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필수조건이라면 결혼이다. 그로 인해 자녀를 생산하고 대를 잇고 또 다른 가족으로 세대를 걸쳐 종족을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대를 걸쳐 지속되는 가족의 체계에서 중요한 본질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참 자기와 거짓자기(True Self False Self)’다. 참 자기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부모에게서 받은 좋은 영향으로 분화(分化)가 잘 되고 건강하게 성숙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모와 자녀의 순기능적인 관계에서는 부모처럼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숙하여 결혼을 하고 또자신의 부모처럼 자녀를 낳아 좋은 부모가 된다. 나는 6·25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자녀 (遺子女)들을 대학 내에서 몇 개의 팀으로 나누어 강의로 만났다. 강의 겸 집단 상담을 2년에 걸쳐 진행했다. 이제는 이분들이 70세 전후의 조부모 세대가 됐다. 거의 대부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었다. 자신의 배우자를 죽이고 싶다는 표현을할 정도로 상처가 깊은 분도 있었고, 자녀들에게 한 번도 긍정적인 말이나 사랑의 표현을 못해 본 사람도 많았다. 이혼과 사별을 한 분에 게는 재혼을 권했지만 역기능의 상처로 얼룩진 과거의 상처는 선뜻 재혼을 하려는 의지를 꺾어 놓았다. ‘왜 또 그 고생을 해야
2019년 1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19의전 지구적 확산은 우리의 일상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이전에는 경험해 본 적없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해 오면서 경제 활동은 위축되고 생계는 힘들 어졌다. 학교와 직장은 비대면 온라인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여전히 분주하다. 중요한 업무회의까지 랜선으로 진행되고 있고, 친구를 만나기도 부담스럽다.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주요 행사들 또한 모두 취소되거나 비대면으로 간소하게 치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이와 연관된 스트레스로 불안, 우울, 무기력 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어쩌면 무기력감, 흥미와 의욕의 상실, 우울한 기분으로 대표되는 “코로나 블루”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욕심내지 않는 삶, 기본에 충실하되 기다리며 사는 삶을 받아들이고 감내해 가라는 징후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지금까지 농경문화에서 도무지 맛볼수 없었던 광속의 짜릿함 속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 물건배송, 음식 배달 모든 것이 속도전쟁이다. 느리면 살 수 없을것 같은, 아니 속도를 숭배하는 세상 속에 사는 것 같다. 삶이 풍요로워지려면 속도에 저
요즘처럼 집에 콕 갇혀있어야 하는 때에는 우리와 연결된 많은 것들이 단절된다. 교회, 직장, 학교를 포함한 일상의 공간들과 단절됐다. 한없이 길어서 고슴도치의 형상이 된 아들의 머리나, 아들 머리 자라듯이 계속 늘어가는 옆구리살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사이버 공간들은 편하긴 하지만 사람 간의 친밀감의 욕구들을 다 채워주지 못한다. 윗도리는 셔츠 입고, 아랫도리는 잠옷 입고 참석하는 회의는 반만 진지하다.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 떨고 밥 먹고 차 마시던 공간도 여유도 사라졌다. 집에 머무르라는 명령이 슬슬 풀려가고 있지만 역시 아직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 고,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뭔가 찝찝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아주 가깝게 남겨진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다. 쳐다보고 만지고 부대낄 수 있는 단 하나의 관계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각자의 집에 갇힌 생활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떠오른 이슈는 가정폭력이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어떻게 이 풍요의 나라에서 아이들이 밥을 못 먹을 수 있냐고 질문하겠지만, 하루 종일 나가서 일해야 겨우 먹고살고, 그나마 이 경제적 재난에서 한 달이라도 수입
매년 11월 15일이면 영국 북서부에 있는 샌턴 브리지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세계 최고의 거짓말쟁이 대회’가 열린다. 19세기에 이 마을에서 살았던 윌 릿슨이라는 노인을 기리기 위한 행사인데 그는 술집을 운영하면서 늘 거짓말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수상자가 되려면 심판들과 청중들 앞에서 어떤 최고의 거짓말을 해야만 됐다. 거짓말도 ‘선의의 거짓말’ ‘악의의 거짓말’ ‘허풍치는 거짓말’ 등으로 다양하다. 누군가 유머스런 거짓말을 모은 것을 읽어봤더니 황당무계했다. ‘동물원에서 개미가 코끼리를 물어 죽이는 것을 봤다’ ‘산불이 났는데 덩치 큰 사내가 오줌을 눠서 껐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여자의 입이다’ 이런 것들이었다. 세계 최고의 거짓말 대회에서 2007년 우승자는 영국 성공회 소속 한 주교였는데 그는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대회는 세계인들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정치인과 변호사는 참가 불가이다. 이들은 워낙 거짓말에 익숙해 있을뿐더러 프로들로 봐서 아마추어들과 겨루는 것을 금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중에 하루 평균 16번씩 20,000
사랑이라는 말은 어떤 말보다도 아름답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말이다. 사랑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관계나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사랑에는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의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아가페는 신이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주기까지 죄인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무한한 사랑을 말한다.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으로 사람과 사람 간의 인격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에로스는 육체적인 사랑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한다. 남녀 간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에로스(eros) 육체적인 사랑 섹스일 것이다. 섹스는 부부간의 사랑에 있어서 최고의 사랑표현이지만 대상이 달라질 때는 사랑이 아니라 쾌락의 수단이 되고 죄가 되므로 하나님은 에로스 사랑 즉 섹스를 금지한 대상을 정해줬다. 첫째, 짐승과의 수간이다. 짐승과 변태적인 성행위를 금지하고 남자든 여자든 짐승과 교합하면 사람도 죽이고 그 짐승도 반드시 죽이라고 했다.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상담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대화의 기술은 단연 공감이 다. 상대의 아픔과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공감을 통해 드러난다. 상담의 90%가 공감만으로 이뤄진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감이 100% 가 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할 때가 온다. 혹은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 되지 않는 행동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법정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지를 안 써준다고 상담 소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펄펄 뛰다 돌아간 내담자는 다시 상담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다. 가족과의 관계가 칭찬 으로만 일관할 수 없다. 물론 칭찬을 충분히 많이 해야 하지만, 문제가 있는 행동을 지적하고 선을 그어야 할 때도 많다. 아이들에게 늘잘한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나친 칭찬과 허용이 아이를 망치기 때문이다. 배우자에게 잔소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 간의 관계가 위로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는 없다. 늘 편을 들어주면 상대방과 틀어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제 좀 그만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까지 똑같은 불평을 계속할 것인지,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것인지
율법에서 자유합니까? 아직 율법아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은 변명할 것이 없도록 모든 입을 막고, 죄를 깨닫게 하여 온 세상을 심판아래 있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선악을 따지면 죄 없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전에도 사람들은 죄를 지었으나 그때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웃집에 탐나는 물건이 있어 훔치러 갔다가 여의치 않아서 그냥 돌아왔으면 율법이 없을 때는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온 후에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조항 때문에 탐내는 것도 죄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율법이 온 후로는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것까지 죄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마음으로 탐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다 죄가 되니 율법은 모든 사람이 빼도 박도 못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 만들어서 꼼짝없이 심판 아래 들어가게 하는 죽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보혈로
가족 시스템 이론에서는 문제아로 지목된 그 한 사람을 온 가족의 문제를 대표하는 대변자로 본다. 엄마에 의해 중고등부 수련회에 끌려온 한 자매가 있었다. 아이가 집에서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자 엄마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자매를 수련회에 앉혀놓고 돌아갔다. 머리색, 옷차림 등 수련회에서도 단연 튀어 보였던 이 자매는 수련회 내내 시큰둥하게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회나 찬양, 나눔 등 순서에 할 수 없이 앉아있긴 했지만 도통 관심은 없어 보였다. 거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자신이 돌아갈 삶에 대해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내 말이 없던 자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우리 집은 나만 없으면 행복해요. 제가 제일 문제거든요. 근데… 내가 맞으면 우리 엄마가 안 맞아요.” 이 자매는 가족에게 늘 골치 아픈 문제아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족을, 특히 엄마를 보호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자매에게 주어진 축복의 한마디를 통해 자매의 삶이 달라졌다. 가족의 문제아가 아니라 보호자라는 한마디는 자매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문제아로 살 필요가 없어진 것
요즘은 감사관이라는 위치에서 상담기관이나 장애우 복지기관에 감사를 나가다 보니 늘 문제점을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상담기관이나 복지기관들 중에 어느 한 곳도 나쁜 의도로 시작된 곳은 없다. 나름대로 마음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섬기고자 하는 귀한 마음으로 시작된 기관들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상담자나 사회복지사들 또한 더 없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좋은 마음으로 시작이 됐다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의도로 설립이 된 기관이라고 해도 중간중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류상으로나 행정적으로 정부에서 요구하는 기준치에 못 미칠 때는 정부에서 지불했던 돈을 다시 토해내야 할 때도 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할 때도 있다. 감사의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가 지적될 때 기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싫으나 좋으나 찾아오는 정기적 감사와 문제 해결을 보는 관점은 그 상담기관이 어떻게 진화해 나가느냐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문제가 지적될 때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펄펄 뛰는 책임자들도 있다. 감사관이 나타나면 적대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가능한 한 어떤 요청에도 협조하지 않으려 한다. 심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페르소나, 자아, 그림자라는 개념으로 구분 지어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하던 가면을 뜻하는데 ‘외적 인격’, 즉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을 말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이고 행동규범이다. 목사, 사모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대치이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보이는 그 페르소나 뒤에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우리 안에 있는 부도덕하고, 부정적이고, 가리고 싶은 더러운 면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당연히 목회자나 사모에게도 이 그림자는 존재한다. 말씀을 들고 강단에 호기 있게 서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이나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일의 나와 주중의 내가 다르다. 사람들이 몰라야 하는 허물들이 셀 수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쪼잔한지, 찌질한지, 뒤끝이 작렬하는지, 얌체인지, 비겁한지 절대 들킬 수 없다. 하지만 그림자는 잠시 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언제나 은혜만 끼치며 살 수 없고, 맞는 말만 하고 살 수 없다. 안타깝게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