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어느 종교에도 없는 기독교만의 유일한 신앙입니다. 그 날이 되면 구원 받은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부활 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심판받기 위해 부활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나팔소리에 잠든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그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활의 영광이 각각 다르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39~41) 육체도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와 새의 육체와 물고기의 육체가 각각 생김도 다르고 수준이 다르듯이 부활의 몸도 각각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빛이 다르고 별과 별의 빛이 다르듯이 우리가 부활하면 부활의 몸이 입을 영광도 각각 다르다
지금은 기도할 때다. 미스바로 모이자. 미스바라는 지명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던 야곱과 삼촌 라반이 약속하며 세워진 땅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한다(창 31:49).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빼앗겼던 법궤가 돌아올 때,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도의 자리로 부르기 위해 “미스바로 모이라”고 선포한다(삼상 7:5). 대한민국이 성령의 바람으로 가득하던 70년대에 기도할 때마다 부르짖던 말이 있었다. “동방의 이스라엘, 동방의 예루살렘”, “세계 선교의 등불”이라는 구호와 함께 한국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빼앗겨 버린 법궤처럼, 사명을 잊어버리고 기도의 자리를 잊어버렸다. 이제 다시 기도의 자리, 사명의 십자가를 찾아야 한다. 백동의 편지라고 침례신문에 실려진 백동의 글이 편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백동 편지로 보내지는 이 글을 누가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주신다면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의 심정으로 동참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10월 3일에 하루 세끼가 안 되면 한 끼라도 금식하며 기도하자. 각자 있는 곳, 있는 자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이다. 해남 우수영과 진도를 연결하고 있는 진도대교가 놓여 있는 곳인 울돌목에서 1597 년 일본군 300척이 넘는 배후의 배와 울돌 목으로 진입한 133척과 싸워야 했던 조선군 에게 남은 판옥선 12척과 지휘선이 전부였던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승리의 함성을 봤던 것이다. 50년간 개척자로 일하셨던 어느 원로 목회자께서, 항상 열악한 조건에서 몸으로 부딪혀 나가야 했던 개척 일군으로서 어려울 적마다 이순신 장군이 최악의 조건에서도 굴하지도 포기하지도 아니하고 긍정적인 사고와 최선의 열정으로 임하였던 모습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진도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진도대교에서 명량 축제가 열린다. 백과사전의 기록으로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녹진 사이의 좁은 해협을 말한다. 이곳의 가장 짧은 거리는 300여 미터이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약 20미터이다. 이러한 지형적 요건으로 인해 이곳에는 급류가 흐르는데 특히 만조 시에는 시속 23킬로미 터의 빠른 물살이 흐른다. 물살은 굴곡이 심한 암초 사이를 소용돌 이치며 흐르는데 격류가
현대인들 중에는 텃밭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거기다가 농작물을 심고 가꾸 면서 알뜰하고 재미난 생활을 하길 원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도 텃밭에 애착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왕궁 가까이에 있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던 이유는 그 곳을 자기 채소밭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왕상21:1~2). 그는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거나 돈으로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봇이 거절하자 실의에 빠져 침상에 드러누워 식사까지 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처 이세벨이 불의한 방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왕상 21:15~16). 하나님이 기획하신 에덴동산에는 텃밭이 있었을까? 강이 발원되어 동산을 적시고, 각종 실과나무가 있어서 임의로 따먹을 수 있었던 즐거움의 동산에 그런 밭이 필요했을 까? 창세기 2장 15절엔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전해준다. 아마도 대농(大農)은 아니었을 터이고 텃밭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상상해 봤다. 하나님께선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으셨지만 그것들에게 땅을 경작 하게 했다는 말씀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에덴동산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이성적 숙고들에 의해서도, 자연적인 필연성들에 의해서도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자연 밖에서 인간에게 선사되는, 인간을 압도하는,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계시로써, 은혜로써 표시되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인간이 다른 문화영역들에서와 같이 독자적 창조적이 아니며 철저히 순종적 예속으로 이뤄진 것이다. 결국 신앙은 궁극적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신앙의 동태(動態)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동태이다. 사람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다. 특별히 음식물이나 거주처소 같이 그의 생존 자체를 조건 짓는 것에 대하여 그렇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적 존재와는 달리 정신적 관심사, 즉 인식적, 심미적, 사회적, 정치적 관심사가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시급하다. 아주 시급한 관심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관심사와 마찬가지로 인간 생활 또는 한 사회 집단의 생활을 위해서 궁극적 관심사를 주장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궁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전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그것
1997년 봄에 현 담임인 이동간 목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창원침례교회의 추수감사절 헌금과 국내선교기금으로 개척을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행복하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작년 부활절 예배를 드린 후 상가재건축으로 건물을 비워주고 6개월간 예배당 없이 성도들의 가정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는 축복된 기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11월에 이르러 우리도 이제 교회소유의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어 신주거지로 조성된 현동의 새상가 100평을 매입하고 12월 25일 기쁜 마음으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쯤에서 모든 분들이 짐작하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넘어갈께요. 고심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9월 5일 새벽기도시간에 강한 감동을 1시간 동안 받게 됩니다. “네 책을 팔아 교회부채를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달 8월에 이동간 목사가 두 번째 시집을 발간했는데 그 책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감동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5년간 쓴 시 중에서 엄선한 작품들을 꼽아 만들어졌습니다.전혀 기대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발간 20여일 만에 알라딘 집계 전자책 베스트셀러 부분에서 시 부문 1위, 소설·시·에세이 부문 7위, 통합부문 17위에 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 셨도다” (시편34:4)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을 전해 이 소식을 듣는 자 중에 한 생명에게라도 은혜와 축복이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을 믿고 이 간증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 총회 사무실에 가서 군경선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양회협 목사님께 인사드리고자 찾아갔습니다. 양 목사님께서 저의 건강을 물으시면서 어디 가서 설교할 때에 제 이야기를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다시 살게 해주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간증해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나누어야 한다. 나를 통해 지금도 역사하심을 보이셨는데 나는 그대로 간직하고만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간증을 나눕니다. 폐결핵에서 살려주신 하나님 1983년도 아내와 결혼하고 1985년도에 역곡에서 첫 목회를 시작 하게 됐습니다. 목회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저녁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요강으로 받아내야 할 정도로 각혈을 했습니다. 각혈이 멈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목적과 본성에 있으며,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줄만 남은 비파의 이야기가 있다. “왈츠”라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지붕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 매여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이 안 보여도 비파 줄이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켤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의 줄만 있다면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소망은 인류가 갖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소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한 선물 언어이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의 우열(優劣)은 그것이 제공하는 소망의 많고 적음과 낮음으로 정해진다. 성경에 소망이라는 문자가 많은 것은 확실히 그것이 가장 으뜸 되는 종교라는 증거의 하나이다. 목회자는 늘 이 소망을 품고 강단에 서고 소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소망은 다음의 세 가지 일을 행한다. 첫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장차 큰 기쁨과 행복이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둘째로, 소망은 우리에게 그 기쁨과 행복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셋째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그것들을 기다리게 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견뎌 내게 해 준다. 유명한 강철왕인 ‘앤드류 카네기’는 세일즈맨으로 가정을 방문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어느 날 한 노인 댁을 방문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카네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집의 거실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황량하고 쓸쓸한 해변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 옛날이야기에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과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 날씨가 좋은 날이면 우산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가 와도 허허 날씨가 좋아도 허허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이렇게 비가 오면 작은아들 짚신이 안 팔릴까봐 걱정이구만 당신은 뭐가 그리 좋아서 실없는 사람처럼 허허하는 거요?” 하자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다. “비오는 날은 큰아들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날 좋은 날은 작은 아들 짚신이 잘 팔려서 좋으니 다 좋지 않소.” 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같은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느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교훈한다. 성경에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이기 때문에 말씀에 불순종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사망이지만 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