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침례 사이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써의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침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침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봤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침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침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침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
김한순 목사 금마성산교회 침례교부흥사회 부회장 신학적 배경 토레이의 저서 ‘성령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의 핵심은 이 책 속에 계속 되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서는 이하나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즉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하였다” “위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다”“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등 이다. 둘째는 성령침례란 우리가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의 문제 라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침례란 성령의 중생케하는 사역과 별개의 것이요 구별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넷째는 성령침례란 언제나 증거와 봉사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토레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성령침례”는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 토레이는 그의 예일 대학 동료였으며 그의 목사 안수식 설교자였던 힐스(A. M. Hills)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첫 목회를 서로 밀접하게 도와줬으며 영적 탐구에 있어서도 서로 조력했다. 그러나 1900년경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성령침례론의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기도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기도도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어야 야베스처럼 기도의 “능력자”라고 칭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원리는, 기도할 때 기도자의 관점, 시선,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역대기의 저자가 의도를 갖고 족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으며, 유다 족속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유다 족속이 포로 후기 공동체의 중심으로 세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왜 야베스의 어머니가 고통 중에 야베스를 낳았다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 유다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유다 족속의 기록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는 야베스 삶의 기록이 부정적인 표현으로 얼룩지어진 것은 선 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본문은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을 분명하게 풀이까지 해주는데, 야베스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왔다라고 밝혀줍니다. 히브리어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자음 위치를 바꾸면 야베스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자음의 순서가 됩니다. 우리말로 정확히 묘사하기는 힘들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야베스의 기도”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2000년대 초반 애틀랜타의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의 야베스의 기도-내 삶을 채우는 기적의 원리라는 제목의 책이 세계적으로 천 만 부가 넘게 팔리게 되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나오고,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책을 비판하는 글들 또한 많이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기도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돼야 하는데, 야베스의 기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했으며,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불어 넣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윌킨스 목사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현상이나, 이것에 반응해 많은 비평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 것들을 돌아볼 때, 야베스의 기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많은 학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하는 본문의 해석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뿐이고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만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상징적 언어 또는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가 “나는 문이다”(요10:9)라고 선언할 때, 영생과 구원의 문이 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선언하실 때문이라는 물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본질이 변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문의 밑에, 함께, 또는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체험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선언에도 문은 문으로 남아 있지만 단지 그리스도가 문맥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처럼 예수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매개체를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 작용한다. 동일하게 주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의 기념설에 의하면,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징체의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은 과거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념
V. 침례교 전통의 주의 만찬의 이해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란 추상적 논쟁보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둔다.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을 열린 주의 만찬과 닫힌 주의 만찬으로 구분해 실행한다. 열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만찬에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의 회원들을 어떤 교리나 교회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한다. 반면에 닫힌 주의 만찬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한다. 어떤 의식 절차보다도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을 믿는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침례교 전통은 오직 침례(세례 또는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교회 전통과는 달리 열린 주의 만찬에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의 침례 의식을 행한 자들에게만 허용하는 닫힌 주의 만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이번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극적인 사역인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소위 ‘축귀’ 사역으로 알려진 ‘귀신축출’ 사역은 지금은 이단으로 인정된 어느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이사역에 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사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여러 차례 귀신들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들에는 대부분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마 4:24; 8:16; 막 1:34; 눅 6:18). 예수님이 그의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우신 목적 중 하나는 귀신축출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막 3:15).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며 재현하는 복음을 일꾼들로 훈련하기 위해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귀신축출의 권세를 주셨다(막 6:7; 마 10:1; 눅9:1;10:17).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은 그분이 행하신 첫 번째 공적 사역이었다(막 1:21~28; 참고, 눅 4:33~37).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의 공
인권과 기독교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권은 사회에서 교회가 책임져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단순한 대응이 아닌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을 성서에 근거해 적절하게 이해하는 작업과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인권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행을 바탕으로 인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 정립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권 실현에 대한 의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 개인적 차원에서만 인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간의 협력 등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에 대한 반성 양극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 하는 빈부격차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반목 현상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를 겪고 있는데, 이는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화체설은 떡과 피가 직접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적 실체로 바뀜으로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설명했다면,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심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가 공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루터는 삼위일체의 연합(일치)과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의 연합은 유사한 신적 신비로 이해했다. 그가 떡을 분배할 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먹도록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기술한 본문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것 위에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취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발생하거나 어떻게 그가 떡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박하거나 측정하는 것 없이 우리가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눈으로 그 떡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의 귀로 듣는다. 공재설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의 만찬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됐다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부수적인 성질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의 교환이 이뤄진다면, 역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실체는 외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껍질(accidents)이 떡과 포도주의 껍질로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오류를 인정하게 된다. 칼빈은 화체설의 이런 철학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떡과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그 백색을 그 본질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가톨릭교회 역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체설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있다. 아퀴나스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단죄하고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길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점들에 대해 유의하지 않고 그들은…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그만큼 역사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침례교의 역사는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침례파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기였던 16세기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됐다. 침례교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됐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William Carey)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침례교의 기원은 1889년 12월 펜윅 선교사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로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다양한 행사와 집회들이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5월 첫째 주일은 각 교회마다 예배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많은 성도들이 주일 영상예배가 아닌 현장예배로 함께 했으며 특별히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다음세대를 위한 섬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둘째 주는 목회자 주일로 준비하며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침례교회에서 있어 5월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달이다. 바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일이다. 우리교단은 1889년 12월 8일 한반도 땅을 밟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의 선교로 시작됐다. 지금의 북한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선교에 주력하며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생명을 걸고 자비량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1944년 5월 10일 일왕에 의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고 교회가 폐쇄를 당하며 수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말씀과 복음으로 세워진 침례교회의 정체성이자 성경적 신앙을 표방했던 선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3년 만에 정확히는 757일 만에 일상을 회복했다. 정부는 2020년 3월 22일 도입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2년 1개월 만인 지난 4월 18일 종료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 체제로 전환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일상회복은 세상과 교회, 특별히 한국교회가 크게 환영하면서 엔데믹 이후의 교회 사역들을 본격적으로 점검하고 대비하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은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역당국은 어느 정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아래 거리두기 체제를 전격 해제하고 나섰다. 그동안 교회는 코로나로 인한 적잖은 고통과 사회로부터 따가운 비난을 함께 받았다. 집단감염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지만 선제적 방역체계를 구축하고 자발적으로 예배 인원을 축소하거나 비대면으로 전환하는데 협력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방역체계는 내부에서 집단으로 발생하는 코로나 확진자를 막는데 주력했으며 성도들에게도 교회 시설 이용을 최대한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며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해 나갔다. 방역기관과 코로나 의료기관을 응원하고 응급 물품들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지역사회에서 돌보기 힘든 소외계층과 이웃을 향해 방역물품과 긴급구호물품들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섬겨왔다.
우리교단 총회(총회장 고명진 목사)는 전국교회들 대상으로 조사한 교세 분석 통계를 2주에 걸쳐 본보에 게재했다. 이번에 발표한 총회 교세보고서는 전체 3098개 교회 중 83.1%인 2575개 교회 지역 분포, 전체 목회자 통계와 교인 통계, 연령별 분포, 재정 현황, 자립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교단 안팎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세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단의 미래를 구성하는 목회자와 다음세대이다. 현역 목회자의 55.2%인 2625명이 50~60대에 집중돼 있고 30대 이하 목회자는 16.9%인 803명으로 나타나 목회자의 고령화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학령인구로 인해 신학교의 정원이 줄어들었고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 목회 사역으로 전환하는 인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교단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담임목회자가 후진을 양성하고 사역자를 키워나가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후진 양성보다는 교회 사역에 집중하고 교회 부흥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차기 리더십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총회와 신학교 등 기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 다가왔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게 된 지 3년째다. 매번 코로나19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아프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꿈꾸는 것은 일상의 회복이자 모이는 예배의 회복이기에 다시금 단어들을 꺼내든다. 지난 3년간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실 단순히 코로나19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여러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장기간에 걸쳐 이어온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인해 엔데믹으로 현재의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교회의 대면 예배로 모두가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한 그 사이 희생을 강요당한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천지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를 향한 마수를 거두지 않고 있어 한국교회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고 있다. 문제는 교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또한 국민통합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6월 지방선거일까지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현 정권과 새로운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