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서로의 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덕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 가정의 자녀들의 외모를 칭찬하며 관례적으로 하는 말들 중에 “야,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잘 생겼구먼” 하는 농담이 있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부모들은 오히려 마음 뿌듯해 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분들은 이러한 농담을 불쾌해 한다. 심지어 정색하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임의 분위기가 자못 썰렁해지는 부작용이 따라오곤 한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대단히 기뻐하기 마련이다. 자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그 자녀들을 낳고 키운 부모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제 간에도 이러한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노래를 잘 불러서 각종 음악콩쿠르의 대상이라도 탄다면 스승은 누구보다도 이를 기뻐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간혹 이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못난 스승들도 있긴 하다. 제자가 너무 잘 해서 혹시 자신의 영역이나 자리까지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제
간증은사집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믿음 속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하나님 체험들을 다른 성도들과 공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 하나님을 맛보아 체험하라고 하신 시편 34편의 찬송과 같이, 간접적으로나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려할만한 간증은사집회들과도 자주 만난다. 예컨대 천국을 보았다는 강사들이 나서서 천국을 비성경적으로 홍보한다든지, 무당 냄새가 나는 강사를 강단에 세워놓고, 문제 있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언기도를 받게 하면서, 헌금 얼마를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위험한 발언들을 쏟아놓는 집회들도 있다. 이러한 집회들이 일시적으로는 불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등 교회에 유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연예인들과 같이 대중인지도가 높은 강사들이 등장하는 간증집회는 무슨 목적으로 집회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할 때가 많다. 물론 강사들 중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믿음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신앙인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간증집회를 하는 것인지,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영적 혼란을 주는 사례도 많이 있다. 이러한 부류
얼마 전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의 배다른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테러를 당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많이 회자된 말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다. 스탠딩 오더란 명령권자가 특정 명령을 내린 후 또 다른 취소 명령을 거론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유효한 명령을 뜻한다. 과거 김정은은 김정남의 살해 숙청을 지시한 이후 따로 취소 명령을 내린 바 없기 때문에 수년간 북한 정보당국 등이 끊임없이 살해를 기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의 복심을 실천하며 성취하기 위해서 그의 부하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이러한 테러사건으로 표출됐다고 한다. 흔히들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 보다 높은 서열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을 “충성경쟁”이라고 한다.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자신을 어필해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김일성 동상에 쌓인 눈을 맨손으로 닦아내는 사람들, 관제데모에 참여한 실적에 따라 예산을 조정하겠다는 지침을 내렸다는 청와대 권력자들의 소문, 시진핑의 눈에 들기 위해서 사드보복의 일환으로 한국 기업들을 자발적으로 괴롭
남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과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당시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외적들의 침략에 의한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했다. 특히 이사야는 외부로부터 오는 징계 외에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징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사야 29장에 기록된 ‘봉한 책’과 ‘사람의 계명’은 패역한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내적인 징계의 기이한 방식이었다(사29:14). ‘사람의 계명’으로 인한 징계는,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이 가려지게 함으로써, 영적인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암흑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탄생 전까지 약 40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이른 바 ‘영적 암흑기’와, 지금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바라보지 못하는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아둔함의 징계 속에 이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고 있다. ‘사람의 계명’은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심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사야 29:13에 기록된 ‘사람의 계명’이 마태복음 15:2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의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말로…
구약성경에는 여전사들에 관한 기록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사기4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가나안왕 야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사 겸 여전사 드보라, 적장 시스라를 천막 말뚝으로 처리했던 야엘, 사사기9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자기 형제 70명을 척살하고 스스로 왕이 된 패륜아 아비멜렉을 맷돌로 응징했던 세겜 망대의 여인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사무엘하 20장에 기록된 아벨성의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 당시 압살롬의 반란이 겨우 진압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정치화합을 이루어내지 못한 다윗의 실정이 기폭제가 되어 이스라엘에는 내분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괴수는 사울왕조를 배출했던 베냐민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였다. 그는 유다지파 우대정책을 빙자하여 왕권회복을 꿈꾸었다. 대체로 권력자들은 거짓말과 선동정치에 능한 사람들이다. 많은 역사들 속에서 히틀러와 같은 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 전략들 중에서도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유언비어선동정치가 가장 잘 먹힌다. 몇 년 전 집권세력을 흔들어 권력을 빼
보통 드라마나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은 마음에 큰 위로를 받는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극복한 주인공들이 마침내 큰 행복으로 보상받는 것을 마치 시청자들이나 관객들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으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 잠자는 백설공주를 깨워 결혼한 왕자가 왕이 되어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게 됐다면, 백설공주에 관한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 알렉산더대왕이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날 때에는 해피엔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30대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는 알렉산더의 죽음과 그의 죽음 이후 제국이 세 조각으로 찢어지는 역사적 비극까지 영화가 계속된다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포함한 약 90명에 달하는 왕족들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해피엔딩을 이뤘지만, 무려 3,000명에 달하는 남창들과 놀아나다가 측근들의 돌아섬으로 인하여 15년 만에 본의 아니게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던 역사는 본인에게 있어서는 해피엔딩이 아닐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경량화하고, 사거리를 확대하고, 추적이 어려운 이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예수님 이전의 구원의 문제, 인간의 불순종을 미리 아신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설치한 이유, 네피림의 정체,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 사탄의 배반의 죄의 출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 및 사울왕의 구원의 여부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때때로 지명도 높은 신학자들의 견해를 빌려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곤 하지만, 그 신학자들 역시 유한한 인간의 한 사람에 불과하므로 그들의 주장이 곧 바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역사상 가장 머리가 비상한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받는 ‘어거스틴(Augustinus)’ 조차도 성경에는 사람의 머리로 풀 수 없는 난제들이 많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난제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려고 성경에 신비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므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놓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이다. 히브리서 6장에 이미 받은 구원도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듯한 구절이 있어서,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최고의 전략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물리치고, 위장 잠입한 후새의 거짓전략을 수용함으로써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은 쿠데타에 실패하였다. 반란에 실패한 압살롬은 반란괴수로서의 책임을 죽음으로써 마감해야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아들인지라, 자식에 대한 인정을 과감하게 끊지 못한 다윗은, 요압을 비롯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반란은 진압하되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다.그런데 군사령관 요압의 생각은 다윗의 그것과 달랐다. 다윗왕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윗왕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 모든 사건들의 진원지가 압살롬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를 살려두면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압살롬이 패전하여 도주하다가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나뭇가지에 걸려 대롱거릴 때 요압은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다윗은“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는 비가로 울부짖으며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그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울부짖음은 요압이 왕궁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
민주주의의 핵심요소 중의 하나인‘다수결주의’의 단점을 논할 때 으레 등장하는 단어가 중우정치(ochlocracy, Mobocracy)라는 단어다.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라고 개념 지을 수 있다. 플라톤은 다수의 난폭한 민중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으로‘폭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으로 부족한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으로 ‘빈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플라톤은‘배의 비유’에서 선주, 선원, 키의 조종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선주’를 민주정체의 주인인 민중 ‘선원’은 민중 선동가인 현실정치인 ,‘키의 조종’은 나라의 경영을 의미한다.민중을 상징하는 ‘선주’를 “덩치나 힘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약간 귀가 멀고 눈도 어두운 근시안이라, 항해와 관련한 다른 것들에 대해 아는 수준도 평범하다”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민중선동가를 포함한 현실정치인을 상징하는 ‘선원’은 “점잖은 선주를 최면제나 술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 세뇌함으로써 판단이성을 마비시킨 다음,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실질적으로 배를 지휘하는”존재들이라고 비판한다.그런데 항해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은 선원이
며칠 전 TV를 보다가 정말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보았다. 전라도 전주에서 새벽 5시쯤 산책을 가던 70세 노인을 20세 청년이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다. 서로 길을 가다가 어깨가 조금 부딪쳤는데, 청년이 기분 나쁘다고 술김에 3분 이상이나 방어능력이 없는 어르신을 폭행한 것이다. 그 청년은 정말 비겁하다. 자신보다 확실하게 약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약자 앞에서 갑질하고, 조금 강한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사회는 저주 받은 사회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병든 영혼에서 비롯된다. 육신은 마음의 지배를 받고 마음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성령을 거부하고 악령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패륜으로 치닫는다. 창궐하는 동성애의 패륜도, 별 거리낌도 없이 벌어지는 불륜도, 싸이코패쓰적인 묻지마 살인도, 부자관계를 망각한 경영권다툼도, 악랄하게 조교를 괴롭히는 어느 교수의 행패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빚어지고 있다. 기독교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악한 행동들 역시 그 근원이 악한 마귀의 영에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이 사회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으리라.…
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91)전적으로 의뢰의 노래찬송가 중에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하는 노래가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찬송가의 선율은 인도의 민요에서 차용된 것이고, 가사를 쓴 작사자는 ‘썬다씽(Sundar Singh, 1889~1929)’이라고 한다. 썬다씽은 힌두교의 귀족계급에서 태어났지만, 그 당시 그 근처에 다닐 공립학교가 없어서 영국 사람들이 세운 사립 미션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성경공부시간마다 성경을 찢어버리는 등의 반항의 세월을 보내다가 14세 때 모친이 별세한 이후부터 급격히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도마에게 보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16세 때부터 이슬람국가인 아프가니스탄, 티벳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20세 때 사도요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신학공부를 마친 이후, 실종된 40세가 될 때까지 티벳선교에 자신의 황금기를 아낌없이 바쳤다.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힘들게 업고 가다가, 자신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동행인이 오히려 먼저 눈 속에 얼어 죽어 있음을 발견했다는 일화는 대단히 유명하다. 젊
하나님을 빙자한 사기꾼의 노래몇 년 전 어떤 교회에 모 호텔 지배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깔끔한 양복차람에 키도 훤칠한 잘 생긴 남성이었다. 자기도 모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고 했다. 용모단정하고 성실한 여자 청년을 소개해 주시면 취업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취업하기 힘든 현실을 감안할 때 명함까지 내밀며 정중하게 부탁하는 그 젊은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당장 마음에 떠오르는 여자 청년을 소개했다. 그리고 곧 바로 그 청년의 집으로 연락을 취했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잠시 출타중인데 곧 돌아온다는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휴대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단 부사역자를 청년의 집으로 보냈다. 그 동안 목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가서 그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 지배인은 없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소름이 돋은 그는 즉시 자칭 호텔 지배인에게 와서 따졌다. 낌새를 눈치 챈 그는 손쓸 틈도 없이 큰 걸음으로 도망 가버렸다. 유괴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 사건을 접한 모든 교인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2014.3.21. 헌금하면 천국에 보내주겠다고 사기를 친 이모 여인이 경찰에 붙잡혔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사건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까지 살인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하셨다. 나단은 다윗이 저지른 범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 예화를 활용한다. 많은 양과 소를 소유한 부자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가축을 잡는데, 자신의 양을 잡지 않고 겨우 한 마리의 양을 애지중지하는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접대에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아내와 첩들을 거느린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았음을 고발한 예화이다. 몇 년 후 다윗은 또 하나의 예화와 접하게 된다. 드고아에서 온 여인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다투다가 어느 날 형이 동생을 폭행치사 했고, 마을 사람들은 살인죄를 저지른 형마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상황이라 왕께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실화로 시작되었지만, 다윗이 여인의 큰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자신이 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암논을 쳐 죽이고 외국으로 도망간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에 관한…
1621년 ‘유몽인’이 저술한 ‘어유야담’에 실린 논개에 관한 내용이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군사들은 패배했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곱게 몸단장을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남강의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그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면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차,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가 미소를 띠고 그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지만, 오히려 논개에 붙잡혀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그의 소실 논개는 의병 훈련을 뒷바라지했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에도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강가에 서서 술에 잔뜩 취한 왜장을 유인해 그를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술에 취해 호기를 부리다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린 불쌍한 인간, ‘게야무라 로쿠스케’. 잡다
‘엔하위키미러’에 실린 설명이다. 과거에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하던 ‘동무’라는 단어는 ‘친구’의 의미로서 본래 한국 전역에서 쓰이던 말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공산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의미변형을 시켰기 때문에 강한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해왔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거의 죽은 말이 되다시피 하였고, 이 단어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춘천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했던 정원섭 목사에 따르면,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서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현수막을 교회 앞에 내걸었다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적인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70년대에 제주도에 살던 고교교사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동무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전기고문까지 당해서 정신병자가 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동무가 ‘친구’로 대체되었다. 순 한국말로 대체하고 싶을 때는 ‘벗’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만 ‘어깨동무’, ‘길동무’, ‘말동무’ 등과 같이 합성어로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문제 청소년이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그만큼 역사란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침례교의 역사는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침례파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개혁 시기였던 16세기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됐다. 침례교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Charles Spurgeon)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됐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인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침례회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William Carey)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됐다. 한국 침례교의 기원은 1889년 12월 펜윅 선교사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로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
5월은 가정의 달인 만큼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다양한 행사와 집회들이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5월 첫째 주일은 각 교회마다 예배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많은 성도들이 주일 영상예배가 아닌 현장예배로 함께 했으며 특별히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다음세대를 위한 섬김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둘째 주는 목회자 주일로 준비하며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한편, 침례교회에서 있어 5월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달이다. 바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일이다. 우리교단은 1889년 12월 8일 한반도 땅을 밟은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의 선교로 시작됐다. 지금의 북한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전역은 물론 해외선교에 주력하며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생명을 걸고 자비량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1944년 5월 10일 일왕에 의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고 교회가 폐쇄를 당하며 수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는 좌절을 겪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말씀과 복음으로 세워진 침례교회의 정체성이자 성경적 신앙을 표방했던 선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3년 만에 정확히는 757일 만에 일상을 회복했다. 정부는 2020년 3월 22일 도입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2년 1개월 만인 지난 4월 18일 종료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 체제로 전환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일상회복은 세상과 교회, 특별히 한국교회가 크게 환영하면서 엔데믹 이후의 교회 사역들을 본격적으로 점검하고 대비하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 오미크론 대유행은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역당국은 어느 정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아래 거리두기 체제를 전격 해제하고 나섰다. 그동안 교회는 코로나로 인한 적잖은 고통과 사회로부터 따가운 비난을 함께 받았다. 집단감염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지만 선제적 방역체계를 구축하고 자발적으로 예배 인원을 축소하거나 비대면으로 전환하는데 협력했다. 교회 내에서 이뤄지는 방역체계는 내부에서 집단으로 발생하는 코로나 확진자를 막는데 주력했으며 성도들에게도 교회 시설 이용을 최대한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며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해 나갔다. 방역기관과 코로나 의료기관을 응원하고 응급 물품들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지역사회에서 돌보기 힘든 소외계층과 이웃을 향해 방역물품과 긴급구호물품들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섬겨왔다.
우리교단 총회(총회장 고명진 목사)는 전국교회들 대상으로 조사한 교세 분석 통계를 2주에 걸쳐 본보에 게재했다. 이번에 발표한 총회 교세보고서는 전체 3098개 교회 중 83.1%인 2575개 교회 지역 분포, 전체 목회자 통계와 교인 통계, 연령별 분포, 재정 현황, 자립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교단 안팎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세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단의 미래를 구성하는 목회자와 다음세대이다. 현역 목회자의 55.2%인 2625명이 50~60대에 집중돼 있고 30대 이하 목회자는 16.9%인 803명으로 나타나 목회자의 고령화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학령인구로 인해 신학교의 정원이 줄어들었고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 목회 사역으로 전환하는 인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교단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담임목회자가 후진을 양성하고 사역자를 키워나가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후진 양성보다는 교회 사역에 집중하고 교회 부흥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차기 리더십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총회와 신학교 등 기관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 다가왔다.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게 된 지 3년째다. 매번 코로나19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아프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꿈꾸는 것은 일상의 회복이자 모이는 예배의 회복이기에 다시금 단어들을 꺼내든다. 지난 3년간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다. 사실 단순히 코로나19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여러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장기간에 걸쳐 이어온 비대면 온라인 예배로 인해 엔데믹으로 현재의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교회의 대면 예배로 모두가 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한 그 사이 희생을 강요당한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천지를 비롯한 수많은 이단들이 한국교회를 향한 마수를 거두지 않고 있어 한국교회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고 있다. 문제는 교회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또한 국민통합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6월 지방선거일까지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20대 대통령 선거는 현 정권과 새로운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