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갭(gap)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처음 말씀이 선포됐던 현장의 언어, 생활, 자연환경, 즉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올바른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겨자씨의 진실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는 표현이다.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 성경 본문에 사용된 ‘씨’는 헬라어로 ‘스페르마(sperma)’인데 보리, 밀과 같은 곡식 알갱이 또는 견과류의 알맹이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다. 좁쌀만 한 겨자씨는 밭에 심는 곡식 알갱이들 가운데 작은 씨로 표현해도 1세기 청중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장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서 가장 극적인 강조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겨자씨가 ‘풀보다 크게 자라 나무’가 된다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결국 밭에 나무를 심고 그곳에 있는 풀(나물, 채소)과 어느 것이 더 크게 자라는지 비교하는 꼴이 된다. 나무의 크기를 말할 때 풀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다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요나 1:1~16
성령르로 분별하라 고린도전서 2:1~16
성경의 겨자씨 비유를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식물만큼 우리가 오해하는 것도 흔하지 않다. 겨자에 대한 오해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못 번역해서 일어난 문제도 아니고 그저 성경이 기록된 현장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에 벌어진 왜곡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예루살렘 대학에 수학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선교사 한 분을 만났다. 하루는 그분을 따라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를 방문하는 행운을 얻었다.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무덤을 방문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아랍 아이들이 손에 무엇인가 들고 나를 상대로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다. 난처해하는 나에게 선교사님은 그들이 파는 것이 겨자씨인데 한국에서 성지순례 오시는 분들이 많이 찾아서 이제는 기념상품으로 판매까지 한다고 말해줬다. 그때 내가 처음 보았던 겨자씨는 검고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작은 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갈피가 한국에서 최고 인기 있는 성지순례 기념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된 후 그 작은 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나무담배 씨(학명: Nicotiana glauca, 원산지 남미, 현재 지중해 지역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아끼는 것은 곧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억하라,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로 시간을 중시해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치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당장 지금과 오늘을 값지게 살아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과 관련한 신이 둘이 있다. 첫째는 제우스의 아버지와도 이름이 같은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자연적인 시간, 물리적인 시간, 일상적인 시간, 해가 뜨고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고, 2024년이 가고 2025년 새해가 오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생로병사의 시간,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시간, 캘린더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그게 다 ‘크로노스’이다. 즉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가 있다.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즉 카이로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같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고 특별한 시간을 말한다. 의미 있는 시간, 결정적
제자의 삶 누가복음 14장 25~35절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사람들 창세기 18:16~33절
택하심의 비밀 요한복음 15장 1~17절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장 1~11
바울의 종말론의 일관성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사역기간을 통해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즉 바울은 미래의 재림에만 강조점을 두었고, 묵시사상(默示思想)에서부터 성장하여 구원의 현재적인 완성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강조점을 둔 소위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견해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서신을 통해 볼 때 대조가 된다기 보다는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의 초기 서신을 보면 바울은전도설교에서 성도들에게 미래를 환기시켜 주면서(살전 1:10) 유대 묵시사상과 거의 유사한 재림론을 펴는 한편(살전 4:13~5:11, 살후 2:1~12) 믿는자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특정지워진 성도의 행위에 대해서도 말했다(갈 2:20). 또한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죽음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고후 5:1~10) 재림시에 완성될 종말을 강하게 강조하고 (롬 8:8~15, 고전 15:12~58) 주님의 기도문처럼 “주께서 임하옵소서”라고 말했다(고전 16:22). 로마의 옥중서신에서 쓴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