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에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 초대해 여우는 접시를, 두루미는 호리병을 내놓아 서로 먹기가 어렵다. 사람들의 대화를 보면 서로 비난하는 교차 교류로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본 뜻은 감춘 채 암묵적 교류로 더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대화는 서로가 진실을 만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수평적인 대화법이 가장 좋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자아상을 그려 낼 수 있다. 자아는 크게 어버이 자아, 어른 자아, 아이 자아가 있고 어버이 자아는 양육적이냐, 비판적이냐로 나뉘며, 어린이 자아는 자유적이냐, 적응적이냐, 부모를 조종하는 교수(꾀돌이)적이냐로 나뉜다. 적응적인 것은 다시 반항적으로 적응하냐, 순응적으로 적응하냐로 나뉜다.
인생패턴에서도 1. I am OK, You are not OK(비난형). 2. I am not OK. You are not OK(회뮤형). 3. I am not OK, You are not OK(산만형). 4. I am OK,. You are OK(일치형). 등 이렇게 4가지의 인생패턴으로 나뉜다.
자세히 설명은 못하지만 어린 자녀가 실수로 꿀단지를 깼을 때 엄마의 양육적인 어버이 자아가 기능하는 말은 "어디 다치지 않았냐?"이며 꿀단지보다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준다(I am OK). 비판적인 어버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아이 이마에 꿀밤을 주며 "이게 얼마짜린데 깼어?"라며 잘잘못을 따질 때 아이는 자신보다 꿀단지가 더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기에 대상과의 관계에서 아이는 I am not OK의 인생패턴이 형성된다.
인생패턴도 건강한 인격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사랑할 줄 아는 인생패턴은 4번 일치형이다. 나도 중요하고 상대방도 중요한 존재로 안다. 이들은 대부분 서로 사랑하는 부모를 두었으며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일치형의 인생패턴을 갖게 된다. 서로 싸우는 부모를 밑에서 상처를 받는 자녀는 거짓 자아로 형성되는 모범생이나 반항아로 적응하기 쉽다.
그러므로 역기능 가족체계에서는 부모나 자녀들이 1, 2, 3번의 인생패턴을 가지되 상처가 많은 경우 3번이 될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소통함에 있어서 4가지 인생패턴과 거짓자아가 뒤섞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상처의 자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무슨 대화를 왜,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쏟아냄으로 상대와 상처를 주고 받는다. 더구나 개인의 무의식의 깊이로 들어가면 감정, 가치관, 열망, 사랑, 영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일치형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장 깊숙한 영에 해당되는 것을 사랑, 열망, 가치관을 거쳐 건강한 감정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반면 1, 2, 3번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무의식과 내면의 세계가 역기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면의 깊이를 모르며, 안다고 한들 내면이 서로 기능을 못하기에 참자기를 표현하지 못한다. 또한 순기능의 내면 중 가장 깊이 있는 영적 세계와는 소통하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육신의 생각대로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살고, 죽을 때 편안히 죽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기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과의 차이와도 같다. 물론 어린아이의 믿음(고전 3:1)과 성숙한 사람의 믿음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아버지요, 목사의 위치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육신의 일을 도모한다면 이처럼 난감한 일은 없을 것이다(롬 8:6~7).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자기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자기가 지배하는 것이 거짓자기(상처입은 내면아이, 죄)임을 깨달아(직면) 십자가에서 죽고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난 참자기로서의 선언이 중요하다. 고통스럽겠지만 삶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주님을 따르는 일이다. 이 사람은 자녀나 성도들에게 참 신앙을 물려준다. 또한 자기가 가진 것 전부(자기)를 주를 위해 사용하고 가족이나 성도를 주님께 의탁하는 자다. 자기 소유의 일부분이 아닌 자기를 드림(자기를 부인)으로 길 되신 주의 길을 걷는다. 순간 순간 그리스도의 영으로 자기가 반응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일들을 이루는 모습이다(마 16:24, 막 8:32, 눅 9:23). 특히 눅 9:23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했다. 우리가 실제적인 삶에 있어 구원 받은 자라도 육신과 영의 싸움이 있다. 그 삶에서 겪는 영적 갈등과 어려움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기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날마다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지체를 의에(주님께) 드리는 것이다(롬 6:19).
어렵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고,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롬 8:9). 그러므로 내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비록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서로 내 안에서 싸우고 있고, 참으로 내가 곤고한 자인 것 같으나(롬 7:24~25) 믿음을 통하여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됐기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고 이를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롬 8:1~2).
구원받은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영원토록 나와 함께 있어서 가르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에 성화되는 과정을 거친다(요 14:16, 14:26). 성화되는 과정인 주님을 따르는 일을 두려워 말자. 구원 받은 자는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자기십자가를 질 수 있기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롬 8:18).
자녀가 부모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처럼 목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성도들도 그 시각으로 자신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정직한 영으로 세상이 아닌 주님 우선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마 6:33). 성도는 목사란 거울로 자신을 본다.
내면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방법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중심 단어는 사랑이다. 정확하게는 십자가 사랑이며 말씀을 깨닫고 믿을 때 알게 된다(롬 10:10). 예수님은 인생들이 못 알아 들어도 사랑하신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롬 5:8)은 우리를 치유하고 순기능으로 돌아오게 하는 생명의 힘이 있다(눅 10:27). 주님의 사랑은 목사가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고(믿음과 더불어 부모나 신앙의 선진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생명으로 사랑하면, 그 거울로 성도들은 자신들을 볼 수 있다(요 21:15~17). 아버지나 목사가 스스로 권세나 권위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똑같은 피조물이며 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딤전 1:16).
겸손하게 내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녀와 성도에게 주어야 하는데 젖먹이인 아들과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자기도 자신을 내어 줌으로 내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증하는 것이 참 믿음이요, 복음이다.
자녀가 어떠하든 죽기까지 사랑하는 아버지가 참 좋은 아버지다. 생명은 위로부터 나는데 자녀가 먼저가 아니고 아버지가 먼저이기에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자녀를 생명으로 사랑하기 전에 순종을 강요하지 말자. 그렇게 목사는 성도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사랑을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