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는 사무엘(Samuel), 사울(Saul), 다윗 (David)에 이르는 통일왕국의 건설 과정을 서술한 책이고, 핵심인물은 다윗이다. 그래서 제목이 ‘다윗 사’나 ‘이스라엘 왕국사’가더 어울릴 것 같지만 히브리 성경이 제목을 ‘사무엘 서’라고 한 것은 핵심인물 다윗마저도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는 한 수단일 뿐이며, 다윗이라는 통일왕국의 절대 왕도 사무엘이라는 예언자의 시각을 통해 그 인생 또는 역사적 의미가 조명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 같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는 한 사람이 받은 은혜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 선택이 늙고 무자한(자식이 없는) 아브라함 (Abraham)으로부터 시작되고, 출애굽의 역사도 갈대 상자에 태워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Moses)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며, 통일왕국을 이루는 이스라엘 역사도 마찬가지, 자녀가 없어 한 맺힌 한 여인의 탄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찌보면 한 집안의 일상사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당신의 구원사를 진행시키신다. 그저 아이 하나를 낳고 싶다는 부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상사가 구원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Ephraim) 산지 라마다임 (
기적은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곧 자연과 과학의 질서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법칙이다. 국가에도 일반법이 있지만 특별법이 능가하듯이 더 높은 차원의 법칙인 기적, 이적은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을 수 있다. 세상의 왕권도 자의대로 하는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원하신다면 자연법칙을 잠시 묶고 기적을 시행하실 수 없으시겠는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수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자연법칙을 중단하고 얼마든지 초자연적 법칙인 기적으로 대치하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만난 조직신학 교수였던 모 박사는 기적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계시하신 구약 및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라졌다고 했고,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나 오늘날에는 기적과 표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의했다. 이에 나를 포함해 많은 신학생들이 의구심을 갖고 질문을 쏘아 붙였다. 그러나 교수님의 신학적 주장 (dogma)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난 70년간의 삶을 돌아볼 때, 주님의 손길 안에 일어난 기적 들을 부인할 수 없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TV를 켰더니 가령 아래의 뉴스가 울려 나왔다 하자. “온 세계의 식물(植物)이 자리를 떠나 움직이고 온 세계의 동물(動物)이 꼼작 못하고 제자리에 박혀있다.” 이것은 이변이 아니라 재앙(災殃)이다. 모든 식물들이 뿌리를 지닌 채 뜰로 거실로 침입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왜 이런 현상이 재앙인가? 그것은 아름다운 질서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식물이란 심어놓은 물건이라서 언제나그 자리에 박혀있어야 아름답고 질서적인 것이다. 동물이란 움직이는 물건 이니 물건은 소용되어지는 대로 사용 되어졌는데 그냥 한곳에 말뚝 박히듯 박혀있으면 이것 또한 꼴사나운 것이다. 밭갈이 갈 소를 보고 “이랴, 밭갈이 가자”고 농사 주인이 아무리 사정해도 그 자리에 박혀있는 소라면 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어떤 산장 커피숍에 후배 동역자와 함께 가서 커피를 즐기다가 우연히 벽에 쓰인 영문을 보았다. “He has made everytime beautiful in its time.” 우리말로 옮기니 이런 말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있을때 아름답게 만들어 오셨다.” 이 자리에서 모두가 그게 진리라고 이구동성 했다. 성경에 분수(分數)를 알라고 했었다. 분수란
예수님께서는 하나, 한사람, 한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마 5:19), 한 므나 (눅 19:16), 그 중에 하나(눅 17:15), 예복을 입지 않은(마 22:12) 한 사람 ,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0),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렘 5:1)을 언급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각각 만나 주신 사람들이 나온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요 4장),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요 8장),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요 12장),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요 3장), 삼십팔 년 된 병자(요 5장),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요 9장)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요 11장),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보여주셨다. 미네소타(Minesota) 주의 스카치맨 (Scotchman)의 보고서를 보면, 1881년한 알의 밀을 심었더니, 가을에 560알이 됐으며, 1882년 그 560개의 밀알을 심어 1/5부쉘(3되)을 거뒀고, 이듬해 그 1/5부쉘을 심었더니 17부쉘(85되)을 수확했으며, 1884년에는 17부쉘을 17에어커(약 2만
세상에 자식을 앞세워 천국행으로 보내놓고 왜 슬픔이 없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감사로 숙성시키는 목사가 있다. ‘별세한 부모는 발밑에 묻고 죽어간 자신은 부모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떠나간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서 보화인양 변모시킨다는 것은 범상(凡 常) 초월신앙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뭇사람의 위로를 받아야할 장본인 같은데 도리어 뭇사람을 위로하고 있으니 삶의 도치법(倒置法)치고는 과연 희귀한 일이로다. 그 장본인은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목회자이며 더욱 명설교 목사로 인정 받는 이름 있는 목사였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목사의 41세 청춘아들이 암투병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부모와 처자식 곁을 떠나게 됐을까! 세상적인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불행일 것 같기만한데 왜 하나님은 그목사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이렇게 인간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하늘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때문에 악고론이라는 신학이 나왔던 것이다. 아비 목사는 아들의 죽음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했다. 가을이 오는 산책길에서 “코로나의 안개가 아직도 자욱하여 걷는 이 길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걷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방언으로 설교함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행2:13)고 비방했다. 바울 사도는 옥중서신 에베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권면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15개국 이상의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제자들의 성령충만의 모습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자들로 보였다. 세상 술에 취하여 살아온 저들이 주예수님의 유언대로 과연 성령의 새술에 잔뜩 취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전혀 다른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으로 세상과 짝하며 살았으나 오순절 후에 변화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세상이 보기에 성령충만으로 새 술에 취한 자로 주님의 복음 전도자로 변화됐다. 오순절 이전에는 모두를 자기가 더욱 잘난 사람으로 말에나 일에나 모두가 교만한 자들이었고 반목질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으나, 성령충만받은 저들은 보다 높은 자리나 좋은 자리, 보다 인기있고 유익한 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언어 생활의 변화에서 인격과 생활이 변화되어 역동적 대담성과 성령의 은사로 원수
제주도에서 막내 딸 내외가 상경한 것은 그의 첫 아들이 미군으로 한국에 파견해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들리고, 또 그의 둘째 아들이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서 주말이면 외갓집에 오는 지라딸 내외는 친아비어미보다 자기 지식 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나와 할멈 그리고 저들 식구 네 사람 합해서 여섯 식구가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모두 조용하게 식사를 하는데 그들의 외할머니 측 나의 할멈이 이 식탁에서 좌장(座長)이 되어 시사이야기를 비롯해서 약간의 성경이야기 그리고 딸을 키웠을 때의 에피소드까지 겹쳐 할멈은 명강사가 되는 아침식탁이었다. 모든 식탁 식구들이 할멈을 향해 눈을 주목하고 또 할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따금 고개도 끄덕였다. 할멈의 장광설(長廣說)에 무반응자 세를 취하는 자손은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할멈의 강의(?)중에 식탁 식구들에 대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학벌문제였다. 밥이나 먹지 무슨 때늦은 학벌생각인가. 정말 본의 아니게 조금은 쑥스럽지만 실토하자니, 사위도 서울의 일류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좋은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를 했다. 딸도 서울 명문여대 미술학과를 나왔고, 미군으로 복무하는 첫 외손자도 미국의 조지 메이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중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던 중 에돔 땅을 둘러 행하므로 저들의 마음의 불안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므로 백성 중에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니 죽은 자가 많게 되자 모세는 백성을 위해 회개의 기도를 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민21:8)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16)고 증거하 시고 구원의 요절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율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 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니라”(출16:26)라고 첫 번째 여호와 라파(치료자)임을 선
석탄광산지대가 석탄산업의 하락으로 폐광산촌이 되어버렸다. 지금 우리 부부가 그곳들을 방문했을 때 그 옛날 시커먼 광부의 퇴근하는 모습이나 쌀가게 선술집 가게에 들리던 광촌민이 생각난다. 그런데 광산업 하락으로 쓸쓸한 공허촌이 되자 정부가 지역경제 살리자는 차원에서 적극 지원책을 펴서 광촌을 살리자고 했었다. 정선읍 사북과고한 폐광촌과 삼척군 도계읍 광촌을 향해 정부가 지원할 테니 남은 지방민의 소원을 말하라고 했겠다. 두 폐광촌민이 흥분했다. 사북고한 사람들은 카지노를 요구했고 도계사람들은 대학촌을 요구했다. 정부는 그들의 요구대로 했었다. 사북 고한에는 도박학교가 세워지고 도계 에는 국립대학분교가 세워졌다. 이런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가. 사북 고관의 강원랜드지역의 참상을 신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국내 유일의 카지노 강원랜드는 석탄 산업 몰락 후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 아래 1998 년 설립됐다. 연평균 1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리지만 설리 취지와 달리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유했던 이 마을은 강원 랜드가 들어선 뒤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자살자는 연 초
흰옷을 입고 인물이 훌륭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무엇인가 집어내어 손바닥에 놓고 나에게 보이는데 동그란 은전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500원짜리 보다 조금 더 컸다. 그를 쳐다보니 모퉁이가 조금 찌그러진 것이지만 ‘고쳐서 사용하라’는 뜻으로 나의 손바닥에 놓고 사라지는 꿈늘 꾸고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는데 이상한 꿈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영몽(영적인 꿈)이라서 무슨 뜻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다.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은화로 데나리온과 그리스의 은화가 생각났다(마 22:19). 예수께서 무리에게 가르치신 후에 연보궤를 향해 앉으셨는데 부자는 많이 넣었으나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12:43)라고 칭찬하신 것은 생활비 전부였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두 렙돈은 그리스 도의 동전이고 한 고드란트는 로마의 은전으로 같은 값어치였다. 예수님은 작은 빚으로 호리라도 다 갚을 것을(눅 12:59) 말씀하셨는데 무게는 1.7g으로 앗사리온의 1/8이요 고드란트의 1/2에 해당된다(막12:42).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