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아끼는 것은 곧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기억하라,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로 시간을 중시해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이치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당장 지금과 오늘을 값지게 살아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과 관련한 신이 둘이 있다. 첫째는 제우스의 아버지와도 이름이 같은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자연적인 시간, 물리적인 시간, 일상적인 시간, 해가 뜨고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고, 2024년이 가고 2025년 새해가 오고, 태어나고 죽고 하는 생로병사의 시간,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그저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시간, 캘린더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그게 다 ‘크로노스’이다. 즉 크로노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가 있다.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즉 카이로스라는 신이 관장하는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같은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고 특별한 시간을 말한다. 의미 있는 시간, 결정적
성경의 현장에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다.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 속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언급된 우슬초는 신앙인들에게 익숙한 식물 가운데 하나이다. 히브리어로 ‘에조브’, 아랍어는 ‘자아타르’라고 부르며, 헬라어로 ‘히솝’이라 불리는 것을 우리말로 ‘우슬초’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사실은 ‘우슬초’는 실제와 전혀 다른 오역이다. 한국의 식물사전에서 우슬초를 찾아보면 ‘그 생김새가 마치 소의 무릎처럼 생겼다 하여 우슬초(牛膝草) 또는 쇠무릎 풀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는 성경에 언급된 ‘에조브라’는 식물 자체가 없다. 그러니 ‘우슬초’로 번역해 부르기 보다는 ‘에조브’라고 그대로 써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우슬초(에조브)라는 실체를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성경을 기록한 그 땅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우슬초(에조브)가 어떤 의미로 인식되고, 또 어떻게 그들의 생각이 식물에 투영돼 성경에 나타났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들에게 우슬초(에조브)는 ‘겸손’ 또는 ‘비천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이었다. 그 단
6·25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한교총)은 6월 25일 성명을 발표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참된 평화와 통일, 생명과 정의의 회복을 한국교회가 함께 이뤄가야 한다고 밝혔다. 한교총은 성명에서 “대한민국을 인권과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공화국으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참전용사들과 순국선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전했다. 또한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사 32:17)이란 말씀을 인용하며,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정의 위에 세워질 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했다. 성명은 특히, 최근 출범한 국민주권정부가 헌법 정신에 따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민통합과 민생경제 회복에 힘쓰는 정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아울러 한교총은 “정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을 적극 추진해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한교총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으며,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사용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죄악”이라며
백남조 목사는 평소 동료들로부터 “꼬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요 진리에 관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공과 사가 분명했고,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었다. 본 교단의 교규집 제13조 벌칙 43조에 “교역자 및 교우 중 성경에 교유된 점에 배이된 중대실태 또는 위반행위가 있을 경우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교훈과 같이 개인적으로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치 않을 경우는 2~3명 교우를 위원으로 하여 권고토록 하고 또 이에도 불순종할 경우에는 개교회에 있어서 공개 권고토록 하고 그 때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44조에 벌칙의 종류는 출교, 정권, 권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단의 교칙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규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 교회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히 시행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법집행을 통해 교단 행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올바로 잡히는데 크
기독교로 개종한 후, 피터스(이삭)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자 지도자인 알버터스(피터스) 선교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알버터스 선교사는 단순한 신학적 교리 교육을 넘어, 성경 해석과 설교, 교회사, 선교학의 기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지도를 통해 피터스의 신앙과 지식을 세심하게 다듬어 줬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몇몇 개신교 선교사들이 함께 운영하는 소규모 성경학교가 있었고, 피터스는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으며 신학적 기반을 쌓아갔다. 정통파 유대인 청년이 침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됐다는 소식은 나가사키를 넘어 규슈 전역, 더 나아가 일본 전체에 복음을 전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혼슈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사역하던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피터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ty) 일본 담당 총무로, 후에 일본 최초의 장로교회인 요코하마 제일장로교회(요코하마 시로 교회)의 초대 목사로 섬기게 되는 인물이다. 루미스는 피터스를 만나기 위해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
롯과 아브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롯이 눈에 보이는 이익을 따랐다면 아브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약속을 택했죠. 신앙으로만 판단하면 아브람 선택이 당연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정말로 어려운 선택입니다. 이 선택으로 아브람이 얻은 이익이 조금도 없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언제 가지게 될지,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그의 땅이 되는 건지, 어떤 방법으로 성취될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거든요. 후손에게 주신다는 축복도 자신과 사래의 나이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아브람 생전에는 주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 축복이라기보다는 기만에 가깝다고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브람에게는 몰라보게 강해진 신앙이 있었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믿음으로 극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 13:18) 아브람은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았던 축복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상수리나무가 많이 있던 헤브론 마므레로 이주했고,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
성령을 따라 행하자(갈라디아서 5:16~26)
골고다의 언덕길을 따라간 여인의 숨가뿐 비명 고통에 울부짖던 그녀는 피멍이 들도록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어느 누가 그녀의 고통을 알겠는가? 그러나 골고다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가 내쉰 고통의 비명이 잦아들어 평화가 찾아올 때 이제 새 길이 열렸다 아무도 열지 못하는 길이 열렸다 그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이 세상의 숨결이 아닌 본질로 나아간 그녀에게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에 생명의 열쇠를 선물하기 위해 용감해졌다.
과학의 많은 영광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허락신다 해도, 그 이유로 필요한 한 가지를 잊지 말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의 정신력을 소멸시키거나, 이 땅에서 너무 늙어 우리의 정신이 무뎌지도록 하신다 해도, 아!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잊는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아들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소서. 183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키르케고르가 남긴 일기의 여백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이 기도입니다. 저는 이 기도 역시 ‘솔로몬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누가복음 2장 14절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크리스마스 이브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누구나 생각하는 날입니다. 즉,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날인지요! 아마도 키르케고르는 이 날의 영광과 솔로몬의 영광을 생각함과 동시에,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영광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키르케고르가 살았던 1800년대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엄청난 과학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런 과학 발전을 목도하였을
바울의 종말론의 일관성 바울의 종말론이 그의 사역기간을 통해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즉 바울은 미래의 재림에만 강조점을 두었고, 묵시사상(默示思想)에서부터 성장하여 구원의 현재적인 완성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강조점을 둔 소위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견해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서신을 통해 볼 때 대조가 된다기 보다는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의 초기 서신을 보면 바울은전도설교에서 성도들에게 미래를 환기시켜 주면서(살전 1:10) 유대 묵시사상과 거의 유사한 재림론을 펴는 한편(살전 4:13~5:11, 살후 2:1~12) 믿는자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특정지워진 성도의 행위에 대해서도 말했다(갈 2:20). 또한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죽음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고후 5:1~10) 재림시에 완성될 종말을 강하게 강조하고 (롬 8:8~15, 고전 15:12~58) 주님의 기도문처럼 “주께서 임하옵소서”라고 말했다(고전 16:22). 로마의 옥중서신에서 쓴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