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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초대교회의 본고장 ‘터키’로!-2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된 ‘콘스탄티노플’

 

여기에서 잠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떻게 해서 도시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게 됐는지 살펴보자.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티우스는 오늘날의 영국과 북유럽 쪽의 정제였다(당시 로마는 정제 2, 부정제가 2명 있었다). 306년 그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영토로 가서 권력을 승계했다.

 

이때부터 그는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권력 다툼에 뛰어들었다. 313 막센티우스(와의 전쟁 중 로마 시 북쪽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의 전투를 앞두고 환상을 보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환상에서 봤다는 크리스토스의 그리스어 처음 두 개의 철자 XP를 교차시킨 상징을 자신들의 병사의 방패에 부착시키고 전투에 나가서 승리했다. 락탄츠는 하나님의 손이 전장에서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막센티우스 자신도 다리 위로 달려갔으며, 탈주병들의 무리들에 의해서 붙잡혀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그 신물나는 전쟁은 결국 끝이 났다고 말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칙령은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의 핍박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315년에는 십자가형 폐지, 321년에는 태양의 날을 법정공휴일 즉, 주일로 만들고, 주교들에게 교회의 사법권을 줬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솔 인딕투스’(Sol invictus, 이길 수 없는 태양)라는 아폴로의 태양예배 축제인 1225일이 성탄절로 지정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23년 제국의 동부를 차지하던 리키니우스를 크리소폴리스(현재 위스크다르)에서 물리치고,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됐다. 아울러 그는 한 하나님 - 한 황제 - 한 제국 - 한 교회 - 한 신앙이라는 도식을 요구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말씀(그리스도)은 성부이신 하나님과 달리 피조물에 불과하며, 성부에 의해 성자로 입양됐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는 즉각 반격에 나서 아리우스를 단죄하고 출교했으나 아리우스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의 지원을 받아 버티고 있었다.

 

결국 교회는 325년 황제의 명령으로 니키에 있는 황제의 별궁에서 회의를 하게 됐다. 이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신학적 논쟁을 핀다. 아타나시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미 니케아 회의 이전에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이라는 신학적인 저서를 냈을 정도의 학자였다. 이 저술을 통하여 그는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fully God & fully Man)이심을 주장하였다.

 

그는 아리우스 논쟁이 일어날 즈음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에 의해 부제(Deacon, 집사)로 안수를 받았고(319), 알렉산더의 비서가 되어다. 325년 알렉산더의 보조자의 자격으로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했으나 부제(deacon)의 신분이었으므로 발언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형태로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자신의 견해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견해는 절대 다수의 감독들로부터 정통신앙을 대표하는 교리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회의는 황제가 교회 대표자들을 소집해서 한 회의로서 제국 내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했다는 점에서 교회가 권력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황제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 독일 신학자 칼 라너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용인했다는 것은 300년간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행운이었으나 제국교회라는 불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대한 공헌으로 교회는 자유를 찾고, 신앙 안에서 본질을 찾는 듯 했지만, 교회가 권력을 통제와 비호를 받는 것은 교회의 법제화, 건물이 교회화, 성직자 제도 등을 낳으며 교회의 중대한 시험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콘스탄티누스는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되었고, 그가 핍박했던 아리우스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점이다.

<다음에 계속>

 

엄 폴 선교사 / 침례교해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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