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침례교단을 창설하고 교단명을 여러 번 변경했다.1. “대한기독교회”1906년 제1회 대화회(大和會, 총회)를 강경교회에서 개최하고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라고 하고 펜윅 선교사를 초대 감목(총회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대화회는 선교본부를 원산에 두고 전도지역을 한국과 남북 만주,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으로 확장키로 했다. 2. “동아기독교회”1921년 제16회 대화회를 경북 광천교회에서 개최하고 교단 포교(전도)지역인 동아시아 지역을 확장됨에 따라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이유는 일본제국이 한국을 강제 침탈하고 대한은 소멸됐으니 사용하지 못하도록 온갖 핍박을 가했을 뿐 아니라 침례교회를 대한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여겨 일본의 강요로 부득이 교단명을 변경했다. 3. “동아기독대(隊)”1933년 제29회 대화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대(隊)로 변경하기로 가결했다. 이유는 교회라는 명칭을 기독교외 종교단체에서도 사용하고 또 교회가 날로 세속화되어 하나님의 성별 단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됨으로 성경상 양(洋) 무리라는 뜻을 따라 대(隊)라고 변경하기로 했다. 4. “동아기독교회”1940년 제35회 대화회를 원산에서
우리 교회가 위치한 지역(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은 어르신 혼자서 사시거나 혹은 노부부만 사시는 가정들이 많은 지역이다. 교회가 2009년 창립된 후 복음을 전해 첫 번째로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은 두 분이 바로 그런 노부부셨다. 침례를 받고 얼마 후에 할머니가 먼저 소천 하신 후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모시게 됐다. 그 때부터 매주 한 번씩 요양원을 방문하는 사역이 시작됐다. 얼마 후 할아버지도 소천하셨지만 요양원 방문 전도 사역은 4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해 오고 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지역의 어르신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그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중 가나안 정복 선교센터를 통해 실버처치를 접하게 됐다. 준비 기간을 가진 후 우리 교회에서 실버예배를 별도로 드리기 시작한 날은 2012년 7월 29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7월의 무더위와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속에서도 열일곱 분의 어르신이 첫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우리 교회 실버예배는 매 주일 오후 1시 30분에 드리는데 어르신들이 잘 부르실 수 있는 찬양을 부르고 어르신들이 잘 이해하실 수 있는 말씀 선포를 통해 그분들의 영혼구원을 목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춘천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 겨울 수련회가 무사히 마쳤다. 우리 모두에게 수련회가 끝이 아니라 복음 사역의 시작임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이번 수련회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부활 복음으로 새로이 마음을 다져본다. 이번 수련회에 219교회 905명이 참석했다. 겨울이기에 여름보다 참석율이 저조할 것이라는 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부활 복음에 대한 열정은 겨울 한파를 무색할 정도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내는 시도별 70개 지역에서 해외는 6개국에서 참여했다. 수련회 참여 동기는 ‘오직 주만이’ 등 간증영상과 교회 홈페이지, 국민일보 등 매체, 교단 소식을 통해 참석했다.특히 씨채널‘오직 주만이’의 위력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270명의 사진이 나온 전단지를 들고 한 명, 한 명 찾아 출연자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등 간증 자들과 함께 하는 특별한 추억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간증에 대한 자신들의 소감과 이를 통해 변화된 일을 또 간증하며 기적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대구에서 오신 모 장로님 부부는 수련회에 대한 부푼 기대로 참석했다고 한다. 수련회를 오게 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자기도 복음에 변화된 삶이 무엇인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14년을 뒤로 하고 2015년 을미년(乙未年) 한 해가 밝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14년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모두에게 가슴 아픈 사건들이 유독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세월호 사건을 필두로 한 각종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았고, 기독교 내부적으로도 교회 성장의 정체와 청년 복음화의 어려움, 또한 동성애 및 종교차별 법안 철폐를 위한 기나긴 싸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그 가운데 이번 신년을 맞이하여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정본청원”(正本淸源: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한다)이라는 한자성어가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하는 한국 교회와 우리 침례교단에도 꼭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근본인 복음을 올바로 붙잡고,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먼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3~14). 그러나 빛이 그 밝음을 잃고,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오히려 세상에 버리워 밟히게 될 것임을 또한 말씀하셨습니다(마5:13).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 한국 교회의 실상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초대교회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거센 파로 뒤로 뒤로 노저어가며겨우내 다다른 반쪽 하늘과 맞닿은 땅애써 돌린 등 한 손으로 악수청하며마주 잡은 양손은넘치는 서러움과 반가움으로온기를 뿜어낸다 비로봉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푸른바람저마다 가슴을 열고 들어서는 고성항에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듯정을 보듬고, 또 보듬고적송과 푸르름이 어우러진 금강산 풍경소리등산객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빛은술 한잔에 취하고,풍경의 신비로움에 또 한번 취하고. 잠시 무지의 시간,발길 닿은 곳마다 이어지는 격한 감동소리내 몸 근육이 쉽게 풀어져버린 까닭이여기에 있는 것일까?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흩뿌리는폭포수의 신비로움 속아홉 마리 용의 재주를 담아이 땅에 머무르는 모습을새겨두려는 흔적일까?아니면,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나의 외로움을 담아두려는 것일까? 몇천년 굳어 새겨진 물살 사이로둥지튼 금강산 바위석화처럼, 옛 흔적처럼 드리운저마다의 숨어있는 전설은현실을 바로 알지 못하는방랑자들에게 질책을 내리고살아남기 위한 방법을이렇게 어렵게도 전하고 있다.김현자 집사/ 성천교회
“인생성공 단십백”이라는 말이 있다. 한평생을 살면서 한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진정한 친구의 숫자를 열로 잡았지만, 서양에서는 그 숫자를 한참 낮추어 잡았다. 철학자 파스칼이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알게 된다면 누구든 이 세상에 네명 이상의 친구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프랑스 대문호 로망롤랑은 네명도 많고,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나와 뜻을 같이할 한둘은 있을 것인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창문하나로 족한 것처럼, 친구가 몇 명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영혼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친구가 단 하나라도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을 라디오에서 듣게 됐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난 기억할 수 있는 백 권의 책과 견줄 만할 한권의 성경과, 열 명을 대신할 수 있는 한명의 친구와 때마다 일마다 도움을 구하고 지혜를 얻는 선배들을 기억할 수 있으니 성공해가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더불어 날씨가 겨울로 직행하는 길목에서, 아주 추운 겨울 손이 꽁꽁 얼어있는 친구가 놀러왔을 때 가장 먼저
위대한 일들은 힘이 아니라 참는 것으로 성취된다. “하루 세 시간 힘차게 걷는 사람은 7년이 지나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은 거리를 걷게 된다”는 말이 있다. 영국의 작가요 사진편집인인 사우엘 존슨의 말이다.우리는 인내의 중요성에 관해 수없이 많이 들었으며 잘 알고 있다.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 반드시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 인내심을 결한 사람은 제반 여건이 완벽할지라도 성공이라는 목표에 이르게 되기가 어렵다 할 것이다.힘보다 중요한 요소가 인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시험 또한 모든 사람에게 고통스럽게 마련이다. 강도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시험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성경에서 환난을 참도록 권고함은 이를 견디기가 그 만큼 힘이 들고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불이 금이나 은 같은 보석을 단련하는 것처럼, 사람의 인격이라든지 신앙 등은 환난을 통해서 단련이 된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아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다.인내는 가장 쓰다고 생각하는 어떤 약보다 더 쓰지만, 인생을 성공
구원파는 유병언 교주의 잘못된 신학에 따라 기도와 금식, 예배를 전면 부정하며, 사도신경, 주기도, 축도를 거부한다. 찬송을 하되 찬양을 하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벧후 2:10)가 예언한대로 유병언은 당돌하고 고집이 세며 집요하게 목적을 추구한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양회정을 비롯해 김 엄마 등은 그 교주를 닮아 유병언 교주의 사망과 관련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기독교복음침례회 구원파는 기독교란 이름으로 위장하여 사회에 폐해를 끼친 사교집단”이라고 규정했다.구원파는 기독교도 아니며, 전혀 복음적이지 않으며, 침례교적이지도 않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딤전 6:3~5)이다. 이제는 전 국민이 알게 된 것처럼, 유병언은 자기 가족의 영화를 위해 몇 만 신도들의 재산을 착취하고 종교를 빙자해 상습사기를 치는데 성공한 희대의 사기군이었으며 유도, 태권도, 스쿠알렌 등을 통해 거짓 선지자로서의 미친 듯한 종교노름에 비극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4년간의 복역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반성과 회개를 부정하는 유병언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반대로 미행하고
10여 년 전 예기치 않게 어느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중에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하고 기관에서 사역하기도 했던 한 분이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교인은 자기 목회자를 따라가기 때문에 수준이 자기 목사 수준이다. 목사를 보고 교인을 보든 교인을 보고 목사를 보든 내가 겪어본 경험에 의하면 교인은 영락없이 자기 목사 수준, 딱 그만큼이다.” 그 분은 내가 목사인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만큼 확신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정말 그럴까?’하며 우리 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는 순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몇 안 되는 교인들이지만 개중에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교인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믿은 지 얼마 안 되지만 덕스러운 믿음 생활을 하는 이가 있는 반면 목사인 나로 하여금 자괴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변화되지 않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내가 우리 교회에서 목회한 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니 아무리 내가 열두 번째 목사라고 하더라도 교인들의 당시 신앙 수준에 내 책임이 상당히 있음을 부정하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의 말을 들어줄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인데 우리는 자주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셨고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은혜를 받았다고 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관용의 미덕에 무지한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내의 부족이다. 근본적인 치유가 요구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내심을 키워야 관용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향력이 크고 존경을 받던 위대한 지도자들이 지녔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마음이 온유했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 따뜻한 마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예수 운운할 것이 아니라 이런 마음을 보여야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요즘처럼 각박한 때일수록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가족 간에도 대화가 단절되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도 벽이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