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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선교 : 가정교회가 힘이다! -1

어디에서 모였나?

 

초대교회가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헬라 전 지역에 선교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로마의 3백년간의 평화 시기, 도로 발달, 헬라어 통용, 박해, 순교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러한 일반적 요인이 초대교회를 확장시키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주장한 학자로는 허버트 케인(Herbert Kane), 후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s)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데 소위 가정교회 요인이다.

 

대표 학자로는 로저 게링(Roger W. Gehring), 브래들리 블루(Bradley B. Blue), 빈센트 브라닉(Vincent Branick), 델 버키(Del Birkey)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종전의 일반적 요인도 초대교회의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이와 함께 가정교회가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그토록 파워가 넘쳤는지 궁금하다.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로 에서 모임을 가졌다. 예를 들어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12:12), 루디아의 집(16:15),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16:5),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같은 곳이다. 골로새서 415절에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를 보면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이라는 말은 헬라어 오이코스(oikos)를 말한다. , “집에 있는 교회는 요즘 말로 가정교회(house church)를 말한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때 모였던 집은 어떤 형태일까? 집의 형태는 다양한데 당시 대다수의 로마 주민들은 아파트나 빌딩 형식의 인술라(insula)에서 살았다고 한다.

 

좁은 땅에 인구가 많다보니 약 90%가 인술라에서 살았다. 반면에 단독 주택의 도머스(domus)에는 10%만이 생활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모임 장소가 인술라가 아닌 도머스에서 모였다. 왜 그럴까? 그 이유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가정교회는 초대교회의 선교허브가 되어 헬라 전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사실 1세기까지만 해도 사도 바울의 1, 2, 3차 전도 여행으로 형성된 교회들이 헬라 지역에 간간히 세워졌다.

 

이 당시 복음은 로마까지 확장됐다. 2세기는 복음이 좀 더 확장되어 소아시아(현 터키)에서 교회가 많이 생겨났고 유럽까지 확산되었는데 로마 북쪽인 프랑스 일부 지역과 북부 아프리카까지 교회가 세워졌다. 3세기 즈음에는 교회가 가장 폭발적으로 확장된 시기로 소아시아 전 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스페인, 프랑스, 독일 지역을 뛰어 넘어 영국까지 교회가 확장됐고, 더욱이 북부 아프리카에서의 교회 증가가 폭발적이었다.

 

로마로부터 엄청난 박해와 핍박 가운데 가정교회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복음 확장의 불씨가 되어 헬라 전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일등 공신이 됐다. 왜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오이코스(가정교회)의 정신 때문이었다.

 

사실 초대교회란 신약교회라고도 불리는데 제국교회와는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초대교회는 AD 30년 교회가 시작한 때부터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를 말한다. 그 이후는 제국교회이다.

 

초대교회 시절 기독교인의 모임은 주로 두 군데서 이뤄졌는데 회당과 가정교회이다. 회당은 원래 토라를 연구하는 곳이었지만 기독교 유대인들은 점차 회당을 사도들의 말씀을 듣는 장소로 사용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곳이기에 늘 사용됐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 시 기도시간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만난 곳도 성전이었고(3:1~2), 두 사도들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전하는 곳도 유대인의 회당’(14:1)이었다.

 

회당은 오늘날 지역교회를 의미하는데 유대인 중심이요, 남성 중심의 모임이다. 이곳은 주로 설교와 성경공부가 있어 복음 전파에도 영향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가정교회보다 약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회당과는 달리 ’(오이코스)에서의 모임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다. 가정교회의 파급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당시 가정교회는 비공식적 모임으로 두 가지가 이뤄졌는데 1부 말씀과 2부 주의 만찬이다. 1부 말씀은 회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차이점은 바로 2부 주의 만찬이었다. 회당은 유대인과 남성 중심적이어서 폐쇄적이요 차별적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들, 종들, 이방인들은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집에서 모였던 가정교회는 처음부터 차원이 달랐다.

 

이곳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 여성, 종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 그만큼 문호가 개방됐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 때 가정교회는 성차별, 종족차별, 신분차별 없이 누구든지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것이 초대 가정교회가 회당과 다른 경쟁력이었다.

 

이것뿐인가? 초대 가정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며 누구든지 침례를 받으면 성(), 직위, 종족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진리를 배웠다. 신분 차별이 심한 시대에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여성들, 종들이 침례를 받고 난 후 아무런 차별 없이 서로 하나라고 하는 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당시 초대 가정교회는 차별이 없는 모임이 집(오이코스)에서 열리다보니 회당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27~28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정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됐다.

 

초대교회의 가정교회는 자연적 증가였다. 어떤 인위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장한 것인 아니라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지역은 오늘날 미전도종족, 이슬람권, 사회주의권, 전방개척지역에 해당된다. 이런 곳에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접근해야 할까? 그 답은 초대교회에서 찾으면 된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회당이 아니라 바로 집(오이코스)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이다. 초대 가정교회는 오늘날 선교지에서 성공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주로 중국의 가정교회(처소교회)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사 23천 명 이상을 파송하는 선교강대국이 되었는데 우리가 앞으로 집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곳은 전방개척지역이다. 주로 근본주의 이슬람권이 많은 지역이다. 지금까지 이곳에 많은 문을 두들겨 왔는데 다시 한 번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예일(Yale) 대학교의 웨인 믹스(Wayne A. Meeks) 교수는 오이코스는 초대교회를 확장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믹스가 주장한 오이코스가 바로 가정교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모임이 있어야 한다.

 

회당처럼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모임으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힘들다. 물론 말씀으로 사람들을 깨우칠 수는 있다. 하지만 집에서 주인이 섬기는 따뜻한 사랑은 참여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다 준다. 그래서 고린도 기자는 사랑은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섬김, 희생, 사랑이 듬뿍 묻어난 오이코스(가정교회)는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들, 여성들, 종들의 마음을 뒤 흔드는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로저 게링(Roger W. Gehring)초대교회 집주인들의 섬김이 복음전파에 일등공신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영적 모임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와 선교지에서 회복되길 소망해 본다.

 

안희열 교수 / 침신대 신학과(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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