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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건 선교사와 함께 하는 나가사키 땅 밟기 (5)

시마바라 순교지

(시마바라 성)

 

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7년간의 혹독한 공사를 벌여 1624년 시마바라 성을 축성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시마바라성 건설을 위한 과중한 부담으로 영민을 괴롭게 한 아버지 시게마사 이상으로 중세를 부과하고 금교의 이름으로 크리스천 영민들을 위협했다. 당시 이상기후로 인해 해마다 흉작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카츠이에는 혹독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고 납부하지 못한 영민들의 등에 짚을 지게 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등 잔혹한 형벌을 시행했다.

 

16378월경 기아와 흉작 그리고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 받는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2월경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쿠치노츠의 임신부를 물고문하여 임신부와 태내 아이까지 살해한 것에 영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시마바라 반도 남부 지역의 대관들을 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하라성 혼마루에 세워진 소년장수 야마쿠사 시로 동상)

 

16371212일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하여 크리스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농민군 약 37천여 명이 시마바라성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시마바라성을 포위하고 무사들의 저택들을 불태우며 치열하게 공격했으나 결국 시마바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16381월 당시 폐성이었던 하라성에 들어가 농성하게 됐다.

 

하라성을 점거하고 막부군에 대항하는 크리스천 농민군을 겨우 백성의 반항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막부군도 지휘자인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전사할 정도로 서전의 참패를 겪은 뒤에는 직접공격으로부터 병량공격으로 방침을 전환하여 12만의 큐슈제번 병력으로 포위하는 한편 하라성 전면의 해상으로부터 네덜란드선 및 중국선의 응원을 받아 무성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하라성은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어서 직선탄도를 갖는 캐논포는 탄환이 성 위를 지나 반대편의 막부군 진영에 떨어지거나 설령 명중한다고 하더라도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것뿐으로 파괴가 불가능해 거의 효과가 없었다. 또한 육지에서 공격해 들어가도 성 위에서 조준해 사격하는 철포에 의해 피해가 커질 뿐이었다. 따라서 농민군의 식량과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쓰디쓴 경험이 막부로 하여금 광적이라고도 할 만한 크리스천 탄압으로 몰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라성 터에서 발굴 된 크리스천 영님들의 유골)

 

토쿠가와 막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이타쿠라 시게마사를 상사로 파견했고 나베시마 번, 호소카와 번, 쿠로가와 번 등 서 일본의 모든 번을 출동시켜 약 12만 명의 막부군으로 하라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격렬히 방어하는 농민군의 하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재차 상사로 파견된 마츠타이라 노부츠나는 병량공격(장기포위전)으로 전환했다. 장장 88일간에 걸친 농성 끝에 잇키군(크리스천 농민군)의 하라성은 1638412일에 마침내 함락되어 여자와 어린이까지도 모두 학살당했다.

 

(격전이 벌어진 하라성 유적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난에서 잇키군크리스천(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아마쿠사 시로의 머리는 1만인의 농민군의 머리와 함께 하라성의 오오테몬(정문) 앞에 매장됐다고 전하는데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이사하야에서 운젠으로 들어가는 아니오 마치의 국도 부근에 아마쿠사와 시마바라의 난에서 전멸한 크리스천 농민군의 머리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머리무덤이 남아있다. 하라성 문화센터에는 하라성 터에서 발굴된 크리스천 관련 출토품 및 크리스천 농민군의 유골과 성곽의 기와 등과 함께 발굴 당시의 상황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현승건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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