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한 친구와 함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때 대학진학을 앞에 두고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작정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해 안타깝던 차에 친구가 응답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 뭐라고 응답하시더냐고 물으니 그 친구 왈, 하나님은 내가 어느 학과를 선택하든 개의치 않으신단다. 뭐 그게 응답이냐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주 정확한 응답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영문학과를, 나는 신학과를 선택했고 결국은 둘 다 목사가 되어 각각 일선과 학교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과정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면 족집게 같은 응답을 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기도할 때 정확히 이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지만 실상 그런 응답은 흔치 않다.
사역을 하다보면 답답한 현실 때문에 고민하는 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한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결정을 못하기 때문에 명쾌한 목사의 답을 듣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답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다. 단지 정답대로 사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암으로 투병하던 성도를 찾았다. 손을 잡은 내게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내 대답은 당연히 “예”였다. 하지만 그 다음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하나님은 집사님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사실 이 말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비겁하게도 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 말을 해주는 순간 믿음 없는 목사가 되는 것이 풍토이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우리의 뜻대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 성도가 원하는 답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 병이 낫겠는지 안 낫겠는지를 묻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기에 애매모호한 답을 주고 말았다.
한 성도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목양실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인데 해도 될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지 기도해 달라고 찾아왔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어쩌나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물으러 온 것이다. 용한 점쟁이를 찾듯이 말이다. 그런 그에게 다짜고짜로 왜 그 일을 하려 하느냐고, 그리고 물색한 장소는 어디이며 그곳을 선택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 내게서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단답형의 답을 원했는데 이건 논술보다 더 어려운 브리핑을 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업을 해야 할 이유부터 시작해서 시장조사와 유동인구 조사, 그리고 그 동네의 성향까지 면밀하게 파악해보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그 사업이 망해도 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안 되는 이유 하나를 알게 된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해 보라고.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정답을 알기를 원하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수고를 하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사업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면 복채를 많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업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인데 우리의 모든 초점이 주님의 시선과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문제다.
이천 년 전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은 즉시 풍랑을 잠재우지 않으셨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시냐는 제자들의 원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바람을 잠재우시고는 한 마디 덧붙였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고. 만일 풍랑을 잠재우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더라면 아예 풍랑이 일지 않도록 하셨거나, 풍랑이 이는 즉시 잠잠케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풍랑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이 강해지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기에 그 풍랑은 오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도 그 풍랑은 여전히 제자들을 위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풍랑은 그대로인데 제자들이 타던 배가 달라졌다. 이제는 노를 젓는 배가 아닌 커다란 동력선으로 어렵지 않게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날의 풍랑은 복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해답을 구하러 오는 이들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충고한다. 인생에 왕도는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방황조차도 아름다운 것이다. 야곱의 하란에서의 20년이나, 모세의 미디안 광야의 40년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결코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훈련하는 귀한 시간이었고, 인생이란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이루기 위한 과정들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으니까.
정답을 요구하지 말고 정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을 사랑하자. 비록 방황의 시간이 있을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그 방황조차도 아름다운 것이니까.
조범준 목사 / 영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