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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춤추는 예배자 (삼하 6:1~23)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31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치권 확립 작업을 끝낸 다윗은 수도에 법궤를 모셔야겠다고 결심한다. 시온을 그저 자신이 통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배받으시는 곳으로 삼고 싶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중대한 사명이자 거룩한 임무로 여겼다. 그만큼 예배를 기뻐한 것이다. 


사고로 운반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다시 추진해 결국 법궤를 모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법궤가 도착했을 때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14). 그는 춤꾼이 아니다. 평생 춤을 춘 기록이 여기밖에 없다. 골리앗을 죽였을 때도, 왕이 되었을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도 춤을 추지는 않았다. 그런 다윗이 춤을 춘 것, 그는 온 몸으로 예배한 춤추는 예배자였다. 


법궤 방치? 다윗성으로 모셔라
사무엘상 7장 이래 실종된 법궤, 사울 왕 통치 기간에 법궤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의 상징인데 사울 왕은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루살렘 서쪽 11km쯤 떨어진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사울은 30년 이상 법궤를 방치했다. 그만큼 예배에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법궤를 국가의 최고 보물로 여긴다. 그래서 법궤 모셔오는 것을 하나님 모셔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길이가 2규빗 반(1.2m 정도), 너비와 높이가 1규빗 반(70㎝ 정도)인 직사각형 모양, 조각목으로 만든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계명을 주신 하나님)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 싹 난 아론의 지팡이(구원해 주신 하나님)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시켜 주는 증거들이다. 속죄소, 시은좌라고 부른 덮개도 중요하다. 은혜의 보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법궤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많은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군대를 사열하거나 지휘하시는 분, 주로 전쟁과 관련되어 불린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싸워주시는 분, 그래서 그들은 법궤가 높이 들릴 때 “쿰마 야훼!(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를 외쳤다. 이는 “슈바 야훼)”(하나님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소서)와 함께 선지자나 경건한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외쳐야 할 부르짖음일 것이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들이는 장면은 군사 3만 명이 동원된다. 악기도 동원된다. 마치 승리한 군대가 개선하는 시가행진과 같다. 이제 예루살렘은 성도가 되고 정통성이 유다 왕국에 있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예배, 다윗은 예배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자기 방식대로? 웃사가 죽었다
법궤를 가져오는 다윗의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의 마음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끌어들여 자기 통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신다. 그래서 하늘에서 고고하게 다스리지 않고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잘 따르면 복 받는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신다. 


여하튼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 가는데 거룩한 순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갑자기 날뛰면서 수레를 몰던 아비나답의 아들 제사장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잡았다가 그만 즉사하고 만 것이다. 


성경은 웃사의 잘못으로 다루지만 법궤가 떨어질까봐 반사적으로 손으로 잡은 것이 죽을 만큼 잘못한 일인가? 선한 의도나 열정 아닌가?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4:15)는 말씀을 몰라서 그랬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잡은 것 아닌가?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 이야기처럼 좀 당황스럽다(사도행전 5장). 율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또 법궤는 수레에 싣는 게 아니고, 네 개의 고리가 있으니 제사장들이 메고 가야 한다는 원칙을 몰라서도 아니다. 


물론 율법에 따르지 않고 법궤를 수레에 실었다가 사고가 난 건 맞다. 자기 방식대로 한 게 문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생명 주시고, 죄를 지어도 회개할 기회 주시며, 오래 참고,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를 찾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않나? 그래서 당황스럽다는 말이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30년간 목회하고 캐나다 벤쿠버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친 유진 피터슨은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이라는 책에서 수세기 동안 웃사의 죽음에 대한 상상력들이 발휘되었지만 반복해서 다뤄진 것이라며 이런 상상력을 소개했다.


수레가 휘청할 때 웃사의 반사적인 행동은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라 자신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오랜 망상의 표출이며 주제넘게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면 죽는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30년 넘게 아버지 집에 보관된 것을 고려한 것 같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는 심정이었을까? 웃사가 모세의 지시를 무시하고, 블레셋식 최신 혁신 기술인 소가 이끄는 수레를 이용했다. 쉽고 효율적인 방법인 것은 맞다. 하지만 거룩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인간적인 방법이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어리석음이었다.


다윗은 이곳 지명을 ‘베레스 웃사’라 했다. ‘웃사를 쳤다, 찢었다’는 의미다. 8절의 “다윗이 분하여”라고 한 부분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법궤를 모시고 싶은 급한 마음에 실수하기는 했지만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 것인지 원칙대로 하지 않아 큰일을 망친 자신이나 웃사에 대한 분노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결과는 두려움이었다(9).


웃사는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위험 표지판, 자기 방식대로 진행한 다윗에게 날린 하나님의 경고다. 하나님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원칙을 중시하시는 분, 자기 방식대로 하면 안 된다. 다윗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수 있다. 아마 지금까지 동행해 주신 하나님과 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다윗에게도 경고가 많아진다. 밧세바 사건 때 혼나고,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 혼나고, 인구 조사하다가 혼나고…. 그만큼 하나님은 죄와 교만을 싫어하신다. 다윗도 경계심이 많이 약해졌던 것, 익숙해진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안 드리는 게 익숙해지면 안 된다. 자기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안 된다. 웃사를 보면서 주제넘은 태도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다윗은 경고를 받아들이고 방법을 바꾼다.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거나 변명으로 일관한 사울과는 사뭇 다르다. 또 웃사와도 다르다. 이게 다윗의 장점이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다윗은 행복했다
다윗은 한동안 법궤를 옮겨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둔다.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3개월 동안 하나님은 그 집에 복을 주신다(11). 진노하셨던 하나님이 복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고 다윗은 다시 법궤를 향한 열심이 솟구친다. 이번에는 자기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 수레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직접 메고 여섯 걸음을 걸을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 다 모신 다음에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예배를 드린 것이다.


예배와 더불어 또 중요한 것은 다윗의 태도다. 그는 정략적인 행사로 여기지 않고 정말 기뻐했다. 기쁨으로 충만해 에봇이 나풀거려 속옷이 삐져나올 정도로 춤을 춘다. 수준 높은 춤이 아니었을 것이다. 탱고도 재즈도 발레도 블루스도 왈츠도 삼바도 아니다. 에봇이 나풀거렸으니 배꼽춤, 벨리댄스였을까? 안 봐도 비디오, 족보도 없는 막춤, 그냥 껑충껑충 뛰었을 것이다. 만일 춤을 좀 잘 췄으면 미갈이 “오빠! 너무 멋져!” 했을 텐데…. 사무엘상을 보면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두 번 나온다. 그런데 공주 출신 미갈의 엘리트 의식 때문일까? 춤추는 다윗을 싫어한다. 예배가 축제라는 예배의 본질을 모른 것이다.


빈말이라도 “대단해요. 멋져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저 당황하고 삐딱한 눈으로 보며 경멸한다. 다윗 입장에서는 진실의 춤인데, 너무 감격스러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춤을 추고 있는데 왕답게 품위를 지키지 않는다고 왕을 업신여긴다. 남 부끄럽다고 야유한다. 이것 때문에 미갈은 징계를 받는다.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


반면 미갈의 경멸에도 다윗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춤춘 것이라 한다(21). 꼭 어린아이 같다.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푸른 초장을 이리저리 뛰노는 어린 양 같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기뻐했다. 사자와 곰, 깔보는 거인과 살기 어린 왕, 약탈을 일삼는 블레셋인들과 교활한 아말렉인들과 함께 지내고, 황량한 광야의 동굴과 오아시스에서 살 때 구원자가 되어 주시고 주권자요 목자와 바위가 되셨던 하나님이 너무 좋다. 다윗에게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었다.


다윗 같은 예배자가 돼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예배자는 하나님을 기뻐해야 가능할 것이다. 웃사는 죽었고, 다윗은 춤췄다. 어떤 영성학자는 웃사는 하나님께 화를 낸 적도 없고 예의 바르고 깍듯했지만 죽었고,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냈어도 죽지 않았다고 했다. 사는 길을 알아야 한다. 사울의 길, 웃사의 길은 죽음의 길이지만 다윗의 길은 사는 길,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살아난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고, 춤추는 예배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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