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현승건 선교사와 함께 하는 나가사키 땅 밟기 (10)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지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지)

 

나가사키시 니시자카 순교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교지이다. 금교령 하에서 정확한 장소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사료를 통해 이전부터 바테렌 부정지(선교사 처형지)로 알려져 온 현재의 니시자카 언덕으로 추정되고 있다. 26인의 순교자가 처형된 것은 159725일로, 1962년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니시자카 공원으로 조성됐다.

 

토쿠카와의 에도 막부는 종문개역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몇 가지의 제도를 실시했는데 현상소인제도와 오인조연좌제 그리고 에부미와 사청제도 및 종문인별개제도였다. 현상소인제도는 키리스탄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제도였다.

 

(키리스탄 적발 포고문[인본 26순교자기념관])

 

에도 막부와 각 번은 크리스천의 적발을 위한 목적으로 정보제공자에게 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여, 1618년 나가사키에서는 은봉30개를 상금으로 준다는 포고문도 걸렸다. “선교사, 수도사, 그리고 신도를 신고하는 자에게는 즉시 은을 수여한다는 포고문이었다.

 

5인조연좌제는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였다. 원래는 다섯 가구씩을 한 조로 편성하여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였으나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이용된 감시제도였다. 같은 조 안에서 크리스천이 적발될 경우 소속된 전원이 연대책임으로 사형까지 처해지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후미에[밟는 그림])

에부미(성화 밟기)는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큐슈 내에서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시행된 정신적 고문제도로서 1626년에 나가사키에서 시작됐다고 전해지는데 나가사키 봉행은 각 번에 후미에(밟는 그림)를 대출해주어 키리스탄 적발을 강화했다.

 

처음에는 배교한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크리스천으로부터 몰수한 성화나 동판 성화 등을 사용하여 발로 밟고 지나가게 했다. 1660년대에 이르러는 전 영민을 대상으로 하여 금속제의 판으로 된 성화를 길이 25센티에 폭 18센티 정도의 나무판자에 붙인 에타 후미에(판자로 만든 밟는 그림) 10여 매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제도화에 따라 후미에가 부족하게 되자 1669년 나가사키의 주물사에게 명하여 새롭게 모조품 20매를 만들게 했다. 현재 19매가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한 개는 아마쿠사에 운반하여 가던 중 바다에 빠뜨려 잃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적발된 키리스탄을 가두는 석자 감옥[인본 26순교지기념관])

 

나가사키에서는 에부미를 정월의 연례행사로서 각 마을마다 순차적으로 행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에부미는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250여 년간 계속됐다. 에부미를 하는 날은 키리스탄들이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날이었다. 그림을 밟으면 자신의 양심은 진흙탕이 되고 밟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된다.

 

생명을 버리고 양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버리고 육체의 생명을 연장할 것인가. 엄한 선택의 길에 서서 고통당하는 키리스탄들이었다. 에부미를 하는 날은 될 수 있는 대로 발을 깨끗이 씻고 그림의 머리부분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살짝 밟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에부미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그림을 밟은 발을 씻어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완전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 에부미는 배교행위임을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매년 배교행위를 계속하면서도 신앙을 지켜온 키리스탄들의 마음에 한가닥의 위로는 완전 통회 기도였다. 이 기도는 잠복 키리스탄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됐다.

 

키리스탄들은 매년 에후미를 하며 생명을 이어가서 250년 동안 신앙을 전승해 왔다는 것이다.

(박양자, [일본내 조선인 선교사])

 

현승건 선교사와 함께 하는 나가사키 땅밟기 순교지 탐방

문의) 02-753-8585 서울항공

 

현승건 선교사

나가사키순교기념교회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