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말이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꽃과 같지 않게 하소서.
비록 그 꽃의 화려함이
솔로몬의 영광을 능가한다 할지라도,
그 꽃과 같지 않게 하소서.
—3367, II A 308 n.d., 1838년 12월 24일, NB DD:182
키르케고르는 이 기도를 쓴 것은 183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마태복음 6장 29~30절을 묵상하며, 이 기도를 일기에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주일날 교회에 오면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적으로 전하는 설교자를 보고 찬사를 보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전할 수 있는지 그 설교자를 칭찬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보라고 권유하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작, 그 말씀을 행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때, 그리하여 그 설교자의 설교가 찬사로 끝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망각하고 맙니다. 그때, 이 1연의 기도는 무엇보다 강렬합니다. 이 기도는 이 설교자의 설교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꽃과 같지 않게 해달라고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기도의 2연은 더 충격적입니다. 그 설교자의 설교가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설교자의 감동이 심지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욱 크다 해도, 그런 꽃과 같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설교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화려한 말은 무엇이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이 기도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읽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의 작품을 읽고 수많은 찬사를 쏟아내는 사람, 그리하여 그의 작품을 읽고 감동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염려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읽고 감탄만 하고 끝난다면, 그때 그의 작품은 내일 아궁이에 던지지는 꽃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이 기도에 감탄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결국 이 기도는 말의 순간적 화려함을 경계하고, 그것이 참된 영원성과 연결되기를 소망하는 키르케고르의 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 신학, 심지어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조차도 진리와 연결되지 않으면 단명하는 꽃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으며, 인간의 말과 행위가 진정성 있는 신앙과 연결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창우 목사
카리스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