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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방회와 함께 한 기독교유적지 탐방(2)

사도 바울 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지하 동굴교회

(파묵칼레)


늦은 저녁 카이세리공항을 나서자 투어버스는 우리를 에바노스의 에브라시아호텔에 풀어놓았다. 드디어 터키중부의 갑바도기아에 온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파사바, 젤베, 괴레메, 우치히사르 계곡을 둘러봤다. 이 계곡들은 오래전에 에스시에르산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기묘한 지형이 특징이다.

우연히 이곳을 여행하던 벨기에 작가 피에르 클리프드는 버섯모양의 원추형 봉우리들과 토굴속의 집단거주지를 보고 만화영화 스머프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특히 괴레메계곡에는 크고 작은 365개의 동굴교회가 있었다. 오랜 세월로 인해 훼손을 피할 수 없었으나 일부 예배당은 여전히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기법의 성화로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의 눈을 복되게 하였다.

본래 이들 예배당과 주거지는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았으나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허물어지고 훼손되어 지금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괴레메동굴교회를 둘러보고 차로 30여분 떨어진 데린구유로 갔다. 데린구유는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지하도시다. 깊이가 55m8층 높이의 지하도시로 7천명은 충분히 살 수 있는 규모다. 동굴은 지하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데 통로마다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돌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하도시에는 생활에 필수적인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특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와 교회당이 있었다. 교회당 옆에는 지하의 물을 받아 침례를 주던 침례탕이 있었다. 한 때 핍박이 심하던 시절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토굴을 파고 숨어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뜨거운 신앙이 몸으로 느껴졌다.

경제이론에 의하면 도시에 초고층빌딩이 들어서면 불경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신앙세계에도 비슷하다.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를 비롯해서 지상에 거대한 교회당이 들어설 때는 이미 순수하고 뜨거운 신앙은 사라지고 종교가 주는 권력과 유익에 취한 사람들이 득세하던 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괴레메나 데린구유의 동굴교회는 지상의 높고 하려한 교회당보다 지하의 낮고 불편한 교회당이 우리의 신앙을 더 단단하고 거룩하게 한다는 사실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괴레메 동굴교회들)


설산에 기가 질린 마가처럼

사도 바울은 제 1차 선교여행 때 구브로의 바보항에서 배를 타고 버가에 내려 내륙 깊숙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른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다시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를 왕복하였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나그네였지만 불편과 고단함을 마다하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걷고 또 걸으며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도중에 수행원인 마가가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생겼다.

왜 그랬을까, 도저히 이해가 안됐지만 3m급 만년설의 고산준령을 바라보니 저절로 이해가 됐다. 누구라도 마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을 지금 우리는 편안한 리무진버스를 타고 두어 주마간산 격으로 방문하고 있다. 바울일행처럼 한 코스라도 걷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일정이 허락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마음으로 걷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리는 갑바도기아를 떠나 코냐에서 일박을 한 다음 얄바체로 이동하였다. 얄바체는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코냐와 약 160km 떨어져있는 소도시였다. 특별히 코냐는 이고니온인데 지금은 터키 내에서도 이슬람보수세력의 중심도시로 변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얄바체 외곽 언덕에는 극장이나 신전과 상점 등 고대 유물들이 폐허로 남아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바울기념교회 역시 너른 터 위에 돌조각 몇 개만 지나가는 바람과 놀고 있었다.

 

파묵칼레와 일곱 교회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기록한 편지를 가장 먼저 받아봤던 일곱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터키 서쪽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를 지척에 둔 교회다.

히에라볼리는 석회석지대에 솟아나는 온천물로 인해 멀리서 보면 목화처럼 하얀 벽 같다고 해서 파묵칼레라 불렸다. 파묵칼레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온천수는 수로를 통해 9km정도 떨어진 라오디게아로 가는 동안에 식었다.

또 설산 밑에 자리 잡은 골로새에서 공급되는 차가운 물이 수로를 통해 16km 떨어진 라오디게아로 가는 동안 식어 미지근한 물이 됐다.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아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한 것은 이런 배경을 두고 한 말씀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파묵칼레에서 일박한 후에 빌레델비아와 사데를 거쳐 에베소로 갔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변에 포도밭이 많은 알라세힐이라는 소도시에 있었다. 도시 복판에 있는 사도요한기념교회는 두 기둥만 외롭게 서 있어 이곳이 예전에 교회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데교회는 거대한 규모의 아데미신전 기둥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 금이 발견되어 부유했던 도시로 미다스의 손이라는 신화의 배경이 된 곳이다.

에베소는 에게해 연안의 큰 도시답게 숱한 유적들이 즐비했다. 대형연극장과 셀수스도서관도 볼만했지만 사도요한기념교회가 인상 깊었다. 사도요한기념교회는 야야수룩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폐허가 됐지만 규모가 큰 교회당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으며 교회당 중앙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 마리아기념교회는 주후 431년에 200명의 주교들이 모여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공인한 곳이다.

서머나교회는 터키 제3의 도시인 이즈미르 한복판에 있었다. 정식명칭은 성 폴리갑순교기념교회. 계시록에 예언되어진 것처럼 서머나의 주교였던 폴리갑은 주를 향한 신앙을 지키다 86세에 순교당했다. 다른 교회들은 다 폐허뿐인데 이 교회만은 주변이 온통 모슬렘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두아디라와 버가모 역시 흔적만 남아있었다.

순례 7일째, 우리는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아이빌릭에서 일박을 하고 드로아로 향했다. 드로아는 호머의 서서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무대다. 유적지 입구에는 커다란 트로이목마가 서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목마의 배에서 문이 열리고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나를 쟁취하기 위한 영웅들의 함성이 에게해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내 귀에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아무래도 사도바울의 환상 속에 마게도니아인의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에 더 끌렸다. 그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카페리호를 타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마침내 유럽에 발을 디디게 했다.

 

이병구 목사

세종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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