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에 큰 공황이 찾아왔을 당시, 법률가 출신이자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인 클래런스 대로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이 경제 공황에 들어가자 자기의 무신론을 선전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강연을 할때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를 비판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자기의 신념을 선전했다. 하루는 흑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가 무신론 강연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재산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소리치니까 갑자기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할 머니가 손을 번쩍 들면서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그는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했더니, 그 할머니는 큰소리로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할머니 한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라고 동조의 목소리 를 높이기 시작했다. 금새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강연장의 분위기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는 군중들로 인해 바뀌었고, 그는 이런 군중 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은 희망이 없는 이 시대의 희망이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환경이, 상황이 이것을 증명한다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과감하게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누구일까?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의 생각과 이상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해도 동조하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비웃기만 할 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좇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인데 그 동안 우리는 허상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과 부, 성장과 물질을 좇아왔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했었지만 이제는 속일래야 더 이상 속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금 교회는 위기에 처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연일 대중매체에서 교회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고, 여러 교회들이 갈등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사람의 성추문 사건이나 논문표절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기독교는 또 한 번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거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인 것 같다.
여기서 잘 잘못을 가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바르게 걸어왔는지 한 번 뒤를 돌아보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반성의 시간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의 외침이 세상에 들려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 노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노래는 중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방법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입술로 노래할 것이고, 어떤 이는 행동으로 노래할 것이다. 어떤 이는 책을 통해, 어떤 이는 삶의 관계 속에서 노래할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가면 꽃들이 많이 있는 로스 알토힐이라는 꽃마을이 있다. 그 거리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데 그 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게된 사연은 이렇다. 오래 전에 이 도시에 는 요한이라는 우편 배달원이 있었는데 그는 매일 똑같은 자전거를 타고 항상 똑같은 길로 “편지 왔어요, 소포 왔어요”라고 외치며 우편물을 배달했다. 그는 열심히 쳇바퀴처럼 순환되는 삶을 15 년 동안 살았다.
그러나 서서히 중년이 되면서 인생과 직업에 대한 회의와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에 싫증이 났던 것이다. 그는 이 우편배달 일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매일 고민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께 그 일이 너무나 지겹고 지루 한데 어떻 게 계속하느냐고 묻자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면서 보람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계속 이 문제로 기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것 참 좋은 방법이로구나. 자, 이제부터 다르게 살아보는 거야.’
그는 여전히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자전거로 똑같은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우체부 가방 안에 꽃씨를 넣고 다니며 지나가는 집집마다 계속해서 꽃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어떤 꽃씨는 죽기도 했지만 어떤 꽃씨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가 지나가는 길에 아름 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는 거리는 꽃의 거리가 되었고 그가 다닌 마을은 꽃마을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편 배달부 요한이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 그는 단지 편지만 배달하는 자가 아닌 희망을 배달하는 자였다. 황무지에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꽃씨를 뿌렸다. 이제는 우리가 꽃씨를 뿌려야 할 때이다. 세상이 악하다, 교회가 변질되었다, 갱신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말하는 말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대신 꽃씨를 뿌리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강단부터 새로워졌으면 한다. 맘몬이 주인이 되어버린 강단에 예수님이 오셔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어떻게 하면 부를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야 한다.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강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강단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씨를 뿌리면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마음 밭에도 복음의 꽃이 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창조되었으니까.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3)
조범준 목사 / 영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