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성경은 하나님께 영감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됐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담고 있는 보물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것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고, 그 내용에 어떤 오류도 섞여 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구원받는 지식과 믿음과 순종의 유일하고 확실하며 권위 있는 규칙입니다. 성경은 지금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기독교적인 연합의 참된 중심이며, 모든 인간의 행동과 신조들과 종교적 견해들을 검증할 최고의 표준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초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 만물의 조성자이시며 보존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자신 안에 모든 완벽하고 무한한 속성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적이시며, 영적이시고, 인격적인 분이시며, 창조주요, 심판주요, 구원자요, 보호자이시며,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은 그의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미래의 결정들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까지 미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과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안성시 공도에 있는 함께하는교회의 김인환 목사입니다. 제112차 총회, 78대 총회장을 역임한 저는 저희 112차 총회 임원회를 통해서 “우리 규약위원회의 신앙 고백서를 연구해 주시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위원회에 연구 의뢰를 했고, 그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나왔습니다. 그동안 규약위원회에서 지난 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에 연구하시고 또 특별히 한국 침례신학대학교 조동선 교수님과 박홍규 교수님, 귀한 두 분이 함께 연구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귀한 열매를 내게 된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단에는 이상과 주장이 있지만, 이 이상과 주장을 좀 더 강화하고 해설하는 해설서와 같은 신앙고백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르겠지만 신앙고백서는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차후에 연구하며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보완해서 그 이후에 다시 첨삭하면 될 것입니다. 이번 115차 정기총회를 통해 이번 규약위원회가 상정하게 된 신앙고백서가 잘 채택돼서, 대내적으로는 우리 이상과 주장을 좀 더 강화하고 이해하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3,500개 모든 교회 공동체의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만약 역사 지식이 있다면, 침례교 운동이 시작될 때 신학 전통이 칼빈주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나는 1993년 남 침례신학대학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총장으로 선출됐고 교단의 모체 역할을 하는 신학교가 이 신학을 되찾는 임무를 맡았다.”(앨버트 몰라 서든뱁티스트신학교 총장) “(예정)의 논리적인 결론은 복음 전도가 불필요하게 된다. … 일반적으로, 침례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신앙, 그리스도인 삶, 제자가 될 초대를 받아들일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W. R. 이스텝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 원로교수) “만약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칼빈주의 트로이 목마 안에 숨어있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신앙과 실천들이 우리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밥 앨런 목사, 알라바바제일침례교회, Connect316 실행위원장) 논쟁은 때로는 치열하게 전개된다.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악마화하고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남겨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논쟁은 지난 역사와 현 상황을 되돌아보고 그 주체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
넓은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봤던 신성균 목사는 하루에 100리 길을 걸으며 예배를 인도했고, 교회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927년부터는 충청북도 제천구역에서 사역하면서 인근 예천구역과 경상북도 포항구역까지 순회했다. 1942년 9월 6일 경상북도 점촌에서 활동하던 신성균 목사는 일본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교단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대한 체포의 일환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이내 원산으로 압송이 됐는데, 이때 경상북도 점촌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주언 감로와 이덕상 감로도 함께 압송됐고, 이곳 헌병대 유치장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신성균 목사가 체포되었을 당시 45세로, 체포된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젊은 나이었으나, 일제의 고문에 따른 탄압과 열악한 옥중생활을 견디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되어 15일간 재판을 받았는데, 그 결과 함께 검속된 32명 중 그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노재천·장석천·박기양·백남조·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신성균
우리 교단 115차 총회 의장단 본등록이 8월 28일 끝났다. 예비등록과 동일한 후보가 등록했으며 선관위의 심사를 거쳐 기호 1번에 김선배 목사(디딤돌), 기호 2번에 최인수 목사(공도중앙)가 등록을 마치고 출사표를 던졌다. 총회장 후보들은 교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섬기겠다는 각오로 115차 정기총회 선거전까지 대의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할 것이다. 지금 대의원들은 어떤 후보가 교단을 상황과 실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문제점을 인식해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후보자들의 행적과 공과도 중요하게 볼 것이다. 그동안 교단 목회자로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또 대의원들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에 남는지 투표 당일까지 고심하고 심사숙고 할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그동안 교단은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침례교의 정체성을 지키며 교단 발전을 위해 협력과 협동의 정신을 이어왔다. 침례교회는 전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여러 목회 사역과 영적 동력, 전도 운동, 쉼 등 다양한 목회 세미나를 진행하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현안들을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
‘권서인(勸書人)으로 조선에 들어가라!’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일본 담당 총무이자, 훗날 일본 최초의 장로교회인 요코하마 제일장로교회(요코하마시로교회)의 초대 목사로 섬기게 되는 ‘헨리 루미스’의 제안을 피터스는 받아들인다. 당시 일본의 권서인은 미국 성서 공회에 소속되어 성경이나 복음서를 전하며,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돕는 사역자였다. 영어로는 Colporteur라 불리며, 이는 프랑스어 ‘col(목)’과 ‘porteur(운반한다)’에서 유래한 말로,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걸고 책을 운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권할 권(勸)’을 표기해,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경을 ‘권하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한편으론 책을 팔았다고 해서 ‘매서인(賣書人)’이라고도 불렸으나, 책을 권하는 사람인 ‘권서인’으로 불리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훗날 많은 권서인들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사역했는데, 특히 황해도 송천리(松川=소나무가 있는 냇가)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교회가 생겨났는데, 이 교회가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다. 소래교회는 조선인이 세운 조선 최초의 교회(1883년)고,
114차 총회 규약위원회가 상정한 신앙고백서 채택 여부가 이번 115차 정기총회에 주목되고 있다. 규약위원회는 침례신문에 연속 연재하며 115차 정기총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신앙고백서는 성경,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사회윤리와 가정에 이르기까지 총 18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이는 단순한 교리 요약집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침례교회가 어떠한 신앙적 입장 위에 서 있는지 밝히는 ‘교단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한 말씀”이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으로 규정한 점은, 신학적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다시금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인간 이해에 있어서도 창조 질서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고, 성별을 인간이 임의로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이는 젠더 이데올로기 논쟁이 심화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교회의 분명한 목소리로 읽힌다. 구원 교리에 관한 정리에 있어서도 침례교 신앙의 핵심을 충실히 담아냈다. 중생·칭의·성화·영화라는 구원의 전 과정을
신성균 목사(申聖均, 1897~1985) 신성균은 1897년 10월 12일 경상북도 문경군 점촌읍 점촌1리에서 신학희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5세 때(1912. 11. 26) 같은 마을에 사는 박소암의 외동딸 박음점과 결혼하여 일찍부터 가정을 꾸렸다. 1914년 1월 5일 이만기 성도가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기독교인이 됐고, 유곡교회에 출석했다. 같은 해 9월 25일 이종덕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고, 이후 성경의 진리에 빠져들기 시작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과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 개종은 가족들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박해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인내로 복음전도에만 매진하여 이를 극복해냈다. 1916년 경상북도 문경의 신원(세원)에서 개최된 제11차 대화회(총회)에서 신성균은 가정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 전도의 직분을 받았고, 단양지역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주민들로부터 상투가 잘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상투가 잘리자 단발을 한 후 짚신 감발로 전도사역을 이어갔다. 1917년 간도의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2차 대화회(총회)에서는
교단의 정기총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사안은 바로 교단의 대표를 선출하는 의장단 선거라 할 수 있다. 예비 등록을 진행하며 현재 2명의 총회장 예비 후보가 등록해 115차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홍석오 목사)의 관리․감독 아래 선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후보자에게 자신의 공약사항과 정책을 알리고 홍보하는 일은 중요한 선거 운동 중의 하나이다. 후보자는 현재 자신의 정책을 SNS나 문자로 대의원들에게 전달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아직 115차 대의원 등록이 종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예비후보들은 자신과 공식 선거운동원의 인맥을 중심으로 정책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더욱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해 예비 후보자와 선거운동원에 제공한 선거운동 지침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운동의 방향은 우리에게 필요한 숙제와 같다. 의장단 선거가 이뤄질 때마다 나타나는 고소․고발과 소송으로 겪었던 어려움들을 상기하면 보다 형평성에 맞는 총회 규약과 선관위 규정으로 선거공영제가 잘 정착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잡을 필요가 있다.그런데도 대의원들의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은 분명히 있다. 후보자들은 유권자인 대의원을 만나 다양한 교단 정
프로 골프 PGA 정회원, 2011·2012년 연속 대한민국 골프지도자 대상 수상, 24년간 SBS Golf, MBC Sports, JTBC Golf의 골프 해설과 프로그램 기획·제작, Teaching & Coaching 관련 방송 메인 MC, 900여 편의 방송 기획·제작 등 내 이름 앞에 붙은 화려한 경력이다. 이런 성장을 이루기까지 늘 나의 힘이 된 것은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었다. ‘엄마 사랑해’라는 말 한 번 못 한 11살 때,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없는 외로움과 가난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신문 배달을 했고, 방학에는 연탄공장에서 일을 했다. 힘들 때마다 ‘우리 욱휴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하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밤새워 공부해 중·고등학교 때는 장학금을 받으며 반장과 학생회장을 했고, 꿈꾸던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여러 장학금과 과외교사로 대학 시절에 대기업 임원 월급 2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그때 과외를 하던 제자와 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함께 유학을 가든지 헤어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지난 8월 7일, 여의도 총회빌딩 대예배실에서 드려진 침례교사회봉사단 설립 감사예배는 단순한 조직 출범을 넘어, 복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자리였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에 자원한 사람들”(롬 12:15)이란 설교 제목처럼, 침례교사회봉사단의 설립은 고통받는 이웃의 눈물에 교단이 공동체로 응답하겠다는 신앙의 선언이었다. 이날 예배에서는 총회 산하 사회봉사단이 정식 기관으로 발족했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침례교회가 단지 설교와 성례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을 섬기는 사역에도 한 축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특히 단장 한덕진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돼, 기아와 빈곤, 소외의 자리로 나아가겠다”고 선포했고, 이욥 총회장은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교단이 공적으로 인정한 봉사단체가 하나의 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침례교회의 사회적 책임 의식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교단 산하 공식 기구로 ‘사회봉사단’을 설립한 것은 다른 교단에서도 흔치 않은 전례다. 가톨릭에는 교구 차원의 복지기관들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존재하지만, 개신교 안에서는 한교봉을 제외하면 대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은 지 80주년이 되는 광복절이다. 이 날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회복을 함께 기억하며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과 미래를 성찰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와 침례교회는 광복절을 맞아 시대적 사명을 되새기며 복음의 빛으로 사회를 섬겨야 할 책임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광복은 단지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의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생명과 자유, 정의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뜻한다. 침례교회는 ‘성경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전통 위에 서 있다. 일제 강점기의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순수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신앙 공동체를 지켜온 신앙 선배들의 믿음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특히 침례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시대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고, 교단의 주요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감내했다. 교단은 한때 폐쇄되고, 주요 재산이 몰수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두울수록 교회는 더욱 빛이 돼야 한다”는 신념 아래,
백남조 목사는 평소 동료들로부터 “꼬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요 진리에 관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공과 사가 분명했고,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었다. 본 교단의 교규집 제13조 벌칙 43조에 “교역자 및 교우 중 성경에 교유된 점에 배이된 중대실태 또는 위반행위가 있을 경우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교훈과 같이 개인적으로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치 않을 경우는 2~3명 교우를 위원으로 하여 권고토록 하고 또 이에도 불순종할 경우에는 개교회에 있어서 공개 권고토록 하고 그 때도 개선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44조에 벌칙의 종류는 출교, 정권, 권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단의 교칙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규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 교회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고려하지 않고 단호히 시행했다. 이와 같이 올바른 법집행을 통해 교단 행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올바로 잡히는데 크
1955년 8월 20일,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출범한 ‘침례회보’는 오늘의 ‘침례신문’으로 이어지며 정확히 70년의 세월을 걸어왔다. 단순히 하나의 언론이 70년간 존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귀중하지만, 침례신문은 그 이상으로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앙과 정체성, 복음적 사명을 함께 짊어지며 호흡해 온 교단 언론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교단의 공식 기관지로서 침례신문은 창간 이래 지금까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침례교회의 복음적 가치와 정체성을 지켜왔다.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선교 중심’이라는 신학적 좌표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그 방향을 바로잡아온 언론이었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교단과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진리의 나침반으로 사명을 감당해온 지난 시간은 단순한 연대기 이상의 ‘믿음의 유산’이 됐다. 침례신문은 70년 동안 수많은 기자들과 제작진의 헌신을 통해, 교단과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해왔다. 수많은 기사들은 단지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때론 기쁨을 나누고, 때론 고통을 위로하며, 공동체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담아냈다. 이러한 축적된 기록들은 단지 과거의 아카이브가 아닌, 한국 침례교회의 정체성과
백남조 목사(1875-1950) 백남조는 1875년 6월 9일 경상북도 영일군 송라면 광천리에서 백운락의 4남 1년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비요 한학자였던 그는 일찍이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으나 반일사상가라는 명분으로 축출당해 귀국했다. 고향에서 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던 중에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받아 영일 군청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35세 때(1910) 대한기독교회의 한 순회 전도인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이후 복음 전도에만 전념했다. 1912년 개최된 제7차 대화회(총회)에서 전도 직분을 받아 강원도 울진, 울도(울릉도), 경상북도 예천, 포항지역에 전도사역을 했으며, 특히 허담이 울진구역 총찰로 임명되자 그가 맡고 있던 원우학교를 백남조 전도가 위임받아 관리했다. 순회 전도에 전념하던 그는 1919년 간도 종성동에서 개최된 제14차 대화회(총회)에서 김재형, 김영진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충청북도 예천과 제천지역으로 파송을 받아 순회 사역을 했다. 1924년 강원도 울진에서 개최된 제19차 대화회(총회)는 백남조 목사를 울진, 울도(울릉도), 포항지역으로 파송했고, 1925년 원산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