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왕이 신하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한 부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을 가져오라 이르고, 또 한 부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랬더니 그들은 몇 날을 헤매다 ‘사람의 혀’를 똑같이 들고 돌아왔는데, 그것을 본 왕은 모두 큰 상을 내렸고, 왜 같은 것을 가져왔는지 이유는 묻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성당의 신부가 성찬식 때 잔을 깬 아이를 야단쳤더니 그는 정말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35년간 유고슬라비아를 전제 통치했던 티토(Josip Broz Tito)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신부가 아이를 격려했더니 세계 카톨릭계의 최고의 지성인 훌톤 쉰 대주교(Bishop Fulton Sheen)가 됐다.
역시 말의 파괴력은 포탄보다 치명적인 것 같다. 사람을 살인하지 않고서도 죽이며, 가정을 파괴시키고 마음을 부수며 삶을 좌초시킨다. 하지만 반대로 말은 불협화음을 바로 잡는 피아노 조율사이며,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화장실이며, 숨어있는 거대한 능력도 찾아내는 전파탐지기이기도 하다. 사람을 끄는 자석이며, 따뜻하게 하는 난로이며, 배부르게 하는 빵이다. 말이 죽이고 말이 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은 마땅히 살리는 입이 돼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이 그 안에 살아계시며,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 읽는 존재들이 아닌가?
물론 말 자체는 나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자유로 영혼을 죽여도 된다는 자유는 없다. 이는 술을 마신 사람이 차를 운전해선 안 되는 이유와 같다. 칼을 들고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내 돈으로 술 마시고 내가 산 차를 몰아도 그것은 타인을 다치게 하고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역시, 사과를 깍겠다는 의도일지라도 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산다면 버려야 한다. 그 일로 승무원을 나무란다면 무식한 승객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말로서 남을 상처 주는 자유까지 보장해 주어선 안된다. 칼을 뺏고, 총을 뺏고, 면허증을 뺏듯이 말도 뺏어야 한다. 국민에겐 알 권리가 있다며 죄다 말해주는 언론. 너무 피곤하다. 그런 얘긴 알고 싶지도 않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에 백성들 마음만 더 우울하다.
언젠가 유치원 아이들이 게임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한다” “멋쟁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옷 입는다” “예쁜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반찬”…. 그러고 난 뒤 다음 말이 무엇이던가? “죽었니? 살았니?”라는 질문이다.
물론 그 질문이 꼭 그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질문이 꼭 내게 하는 것처럼 들렸을까? 특히 설교를 업(業)으로 삼고 사는 내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을까?
“김종훈 목사야 뭐하니?” “설교합니다” “무슨 설교?” “예수님 사랑” “죽었니 살았니?” “너의 그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영혼이 죽었니 살았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도 사람들의 영혼을 살려내기는 커녕 죽이고 있다면 어떻게 내가 목사일수 있겠는가?
그 게임에서 마지막 질문을 받은 아이가 “살았다!”고 외치는 순간, 술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케 되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내게도 묻고 있다. “죽었니 살았니?” “네가 오늘 하루 종일 내뱉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영혼이 죽었니 살았니?”
그렇다면 과연 오늘,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눈 이들은 나로 인해 “살았다!” 외치며 그 눌렸던 영혼이 자유케 되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자. 깊이 생각해 보자.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