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곡자 베토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어릴 적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 스물일곱 무렵 귓병으로 청력을 상실하면서 듣지 못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은 작곡가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도 위대한 작곡가이기 이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기에 깊은 절망감과 좌절감을 맛봤으며,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작성하고 급기야 죽을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위대한 작품은 그때부터 개화되기 시작했다. 1804년 교향곡 3번 ‘영웅’, 1806년 피아노소나타 23번 ‘열정’, 1808년 교향곡 5번 ‘운명’, 1809년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대작으로 평가받는 그의 곡들은 대부분 청력을 거의 손상한 이후 탄생했다.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교향곡 9번 ‘합창’은 거의 청력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이자 임종 3년 전인 1824년 작곡했다. 불안 가득한 나날 속에서 창작에 대한 그의 간절함은 극에 달했고, 죽음보다 더 깊었던 간절함은 장애조차 초월해 위대한 창조의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간절함 속에서 창조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 성경에도 등장한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세 가지 가시를 육체에 가졌던 인물이다
이제 제2기 신오순절주의가 주장하는 성령침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순절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그 어떤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신오순절주의의 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에 뜻하지 않은 약간의 교리적인 기형이 생성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양자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헐고 동시에 상호간의 성경적 연관성을 모색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교리상의 발전을 시도하기 원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요약해본다면, 신오순절주의신학의 근복적인 요소는 신자가 기독교의 봉사를 수행하고 충분한 능력을 가져다주는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풍부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회심한 이후에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즉 중생한 이후에 주어지는 제2차적인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2의 은혜를 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는 역사적으로 감리교의 성결운동으로부터 유래되어 정통적 오순절주의에 의해 계승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오순절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은 그같은 개념이 예수를 믿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 무오한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성경론에서 구별돼야 하는 세 가지 신학용어가 있다. 계시(revelation), 영감(inspiration), 조명(illustration). 계시는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자신의 피조물을 향하신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졌다(엡 3:5; 벧전 1:11~12). 영감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오류 없이 기록되도록 성경 저자들과 성경이라는 문서를 산출하시는 과정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정경 66권이 완성되면서 계시와 함께 과거에 종결되었다(벧후 1:20~21; 딤후 3:16). 조명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성령님의 역사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고전 2:9~14).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성경 이외의 그 어떤 책도 가질 수 없는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님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감화와 감독이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벧후 1:20~21). 그…
이종덕이 중심이 되어 ‘포교계’ 제출을 거부한 것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으나, 반일 민족주의적 측면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포교계’ 제출 거부는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일제에 의해 ‘포교계’ 제출이 강제되던 당시 상황에서는 항일활동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고난을 감수하면서 일제의 주요 정책을 거부한 것은 일제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행위이고, 그것은 강제 병합된 상황에서 항일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기독교회 교인들은 ‘포교계’ 제출 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박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단행한 것은 일제의 부당한 통치에 항거하는 활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30년대 신사참배 반대와 박해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보다 더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신사참배는 충성스러운 일본 국민 양성의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일본은 근대 천황제 실시 이후 국가주의 교육을 채택해, 학교 교육을 천황제를 뒷받침하는 주축으로 삼았다. 일본 학교들은 천황은 일본의 최고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이며, 신사참배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행
“신앙의 문제에서 최종적인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 개혁가들로 하여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독일 귀족들에게 고하는 글에서 신학적, 도덕적 오류를 범하는 교황보다는 근본이 비천한 자라도 성경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의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라의 말 대로 해야 했고(창 21:12), 발람은 사람도 아닌 당나귀의 말을 들어야 했다(민 22:32~33). 신앙의 최종 권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성경’과 ‘하나님’을 동의어로 사용해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신 창세기 2:24의 말씀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마 19:4~5). 바울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출애굽기 33:19의 성경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롬 9:15).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말하셨는데 바울은 “성경이 아브라함
저는 경찰선교의 첫걸음, 한국교회 미래를 짊어질 청년선교의 요람, 중앙경찰학교 충성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침례교단의 전신인 동아기독대에서 선교사님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한 할아버지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6대째 주님을 섬기고 있는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저희 집안은 목회자 집안입니다. 몇 해 전 소천하신 저의 아버지도 목사(남용건 원로목사)였고, 큰형님(남태복 원로목사), 둘째 형님(남병태 목사), 저의 큰 매형(배윤조 원로목사)이 모두 침례교단 목사이며, 저의 둘째 매형(정종학, 울릉농협조합장)은 장로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해운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원주온누리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2001년 1월부터 현재까지 중앙경찰학교 경목실장 겸 충성교회 담임목사로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충성교회는 1988년 4월 22일, 당시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목사님과 충주 지역교회 목사님들이 연합해 세운 교회입니다. 제가 부임할 당시, 예배실이 없어서 강의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주중에 경찰교육생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2009
길진경은 이날의 집회로 인해 1907년 평양의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전국에 있는 한국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보여줬다고 적었다. 나아가 길선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성령 충만임을 가르쳤고 이를 받을 수 있는 대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성신을 받는 것이 세 층이 있으니 첫째는 성신의 인도함 받고, 둘째는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셋째는 성신의 충만함을 받으니 그런즉 성신의 인도함을 받은 후에야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성신의 감동함을 받은 후에 성신의 충만함을 받나니, 성신을 충만히 받는 방식은 여섯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을 순종함이니 … 둘째는 형제자매가 마음을 합함이니 … 셋째는 겸손함이니 … 넷째는 마음이 조용함이니 … 다섯째는 주의 일을 위하여 힘쓰는 가운데 성신의 권능을 충만히 받는 것이니 … 여섯째는 간절히 기도함이니, 주 가라사대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에 박용규 교수는 길선주가 제시한 성령 충만함을 얻는 방책이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그가 지식적으로 이 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몸소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또
군선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교, 그러나 그 선교를 하는 이들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섭리 가운데 2006년 강원도 고성으로 사역을 보내신 주님! 왜? 이 먼 곳까지 나를 보내셨을까?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어떤 사역을 하라고 보내셨나? 먼저는 구성교회를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전도해 교회의 자리가 가득 찰 무렵 주님은 22사단에서 사역하시는 군 선교사 목사님의 요청으로 한 부대 교회를 맡아 이중 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지나고 보면 이 또한 주님이 하셨음을 느낍니다. 시골교회를 사역하면서 군부대교회까지 맡아서 사역하다 보니 때로는 군부대 교회로 들어가는 선교비가 시골교회 재정의 50%를 차지할 정도까지 섬기게 됐습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군부대 교회를 섬겼을까? 그렇게 섬긴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제가 군부대 교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군부대 교회야말로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소망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장병을 살려야 우리 교회가 살고 우리 교회가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시골교회 사역,
1905년 11월 19일 교단 연합 구국기도회 대한기독교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구국기도회를 공동 개최하고, 전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루 한 시간 나라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1905년 11월 1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와 기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長老會와 浸禮會와 美美會에셔 公同 聯合會를 團結야 祈天永命의 主旨로 獨一 無二 시고 全智全能신 造物主大主宰上帝耶和華케 爲國祈禱를 虔恭至誠으로 日日 設行다 其日日誦 禱 全文이 如左더라.… 祈禱時間은 每日申時(午後三時와 四時)오 祈禱文이 如左니 萬王의 王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韓國이 罪惡으로 沈淪에 드럿스 오직 하나님 밧게 빌 업사와 우리가 一時에 祈禱오니 韓國을 불샹히 녁이시 耶利 未亞와 以賽亞와 但以理의 自己나라 爲야 懇求을드르심 갓치 韓國올 救援사 全國人民으로 自己罪를 悔改고다 天國百姓이 되어 나라이하나임의 永遠 保護밧아 地球上에 獨立國이 確實케야쥬심을 耶穌의 일홈으로 비나니다.…” 위 기도문의 내용은 국가가 멸망에 처한 때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듯이, 한국 기독교인들도 회개하
폴링은 강경 출신 포목장사꾼 지병석을 전도해 1895년 여름 한강에서 침례를 베풀었고, 지병석의 권고를 받아들여 충청도로 선교지를 옮기기로 했다. 폴링은 강경과 공주에 선교 본부를 마련했고, 1896년 2월 9일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교회를 세웠다. 1896년 4월 프레더릭 스테드맨(Frederick W. Steadman), 새디 에클스(Sadie Ackles), 알마 엘머(Arma Ellmer) 등 제2진 엘라씽선교사들이 내한하여 가세했다. 서울 내자동 선교 본부는 미남감리교 선교부에 매각했고, 감리교 선교부는 그곳에서 1898년 10월 배화학당을 시작했다. 씽 집사가 1900년 사망한 후 상속인들은 선교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엘라씽선교회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1901년 4월 한국선교를 종료하고, 펜윅에게 재산과 사역을 이양했다. 1906년에 이르러 전국에 31개의 교회들이 존재했고, 교회들은 그해 10월 6일 강경교회에서 제1차 대화회(총회)를 개최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다. 대한기독교회는 교단명을 여러 차례 바꿨다. 일본이 “대한”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자, 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1933년에 ‘성별된 무리’를 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