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7일 한국침례신학대학교(한국침신대) 이사회는 혹독한 산고를 겪은 끝에 제15대 총장을 선출하는데 성공했다. 관련 당사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물론, 대학이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한 10년에 걸친 분란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말할 이들도 있겠지만 고통은 산술적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고통이 크기만큼 결실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을 기쁨의 결실로 바꾸는 것, 한국침신대의 생존만이 아니라 교단 전체에 비전을 제시하는 것 등의 수많은 과제가 신임 총장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 대학총장의 중요성은 총회장 몇 명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교단의 백년대계를 책임진다. 대학총장의 비전은 교단정치에 뛰어드는 이들이 제시하는 ‘청사진’ 혹은 ‘비전’과는 도무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 침례교인들이 한국사회에서 받는 평가의 가장 큰 몫의 책임은 역대 총장들이 짊어져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린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1년 동안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의 양과 무게로 평가받지 않는다.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가에 의해서도 평가되지 않는다. 그 결실 자체에 의해서, 그 결실이 얼마나 탁월하고 풍성한가에 의해 평가된다. 심지어 그 풍성한 결실 그 자체보다도 그 수확물을 얼마나 큰 돈으로 바꿨는지, 얼마나 큰 이익을 봤는지까지도 그 농부에 대한 평가가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제14대까지의 역대 총장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징벌을 면할 수 있는 이는 도대체 누가 있을까?
필자가 1990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필자에게 처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을 가르쳐주고 ‘성경’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믿음’을 보여주고 따르게 한 분이 성결교회 출신이며 확고한 ‘알미니안주의자’였기에 스스럼없이 집에서 가까운 타 교단 신학교에 입학했다. 첫 학기부터 진짜 목사가 무엇인지, 진짜 목사란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배움을 겪었다. 스승이 무엇인지, 선지동산을 똑바로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불을 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경험했다. 그런 환경에서조차 부족함을 크게 느꼈다가 1990년에 대전에서 맞딱뜨린 신학교육 현장은 ‘어이없음’ 그 자체였다. 비전도 열정도 너무 약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어느 정도로 치열하게 해야 하는지, 자신이 누구와 경쟁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 없었다. 캠퍼스의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해야 하고 누구보다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야 마땅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교수’들이다. 하지만 교수들은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기보다는 눈에 띄게 ‘정치질’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직신학 교수가 조직신학을 모르고, 역사신학 교수가 역사의식도 없고 역사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침례교회의 뿌리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했다. 학장에게는 청사진이 없었다.
필자는 지금 불쾌한 과거를 들추며 흉을 잡고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덮어둔 채 잊고 지나가면 그것으로 충분한 ‘과거’도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들추고 뜯어내고 반드시 고쳐야 하는 과거도 있다. 1990년에 처음 목동 캠퍼스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뒤에 오늘날까지 필자가 경험한 ‘침례교회’의 역사는 1990년 캠퍼스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되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든 한때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결국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바보가 되고 어리석게 인생을 망칠 뿐이다.
실패를 외면한다고 해서, 실패를 쓰레기통에 처넣는다고 해서 실패가 없어지지 않는다. 실패라는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실패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그 실패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실패를 끌어안고 과거에 매몰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행복한 미래를 열기 위해, 그 복된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돌파할 비책을 찾기 위해 돌격하는 것이다.
교단이 직면한 현실태는 과거의 결과물이고 이 결과물에서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여 미래를 만들어갈 인재를 길러낼 가장 큰 책임은 신학교 총장의 어깨 위에 놓인다. 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단 신학교라는 위상과 교육기관의 기관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주어지는 책임이다.
신임 총장은 이 책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15대 총장이 취임하는 이 시점은 14대를 거치는 동안 경험했던 세상이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앞의 어떤 세대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졌다. 어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주지 않는다. 어떤 누구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는다. 미국 남침례교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이며 가장 탁월한 교단이고 우리는 형제교단이라고 자부해봤자 미국 남침례회가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믿음의 힘으로 우리 자신이 일어서야 한다.
침례교 정신이 한국사회가 지금 맞이하고 있고 장차 맞이하게 될 현실에서도 지극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 침례교적 원리가 한국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침례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 이런 일이야 말로 우리 자신이 직접 해내야 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이런 일을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잘하는 세대여야 한다. 우리 자신보다 더 나은, 더 잘난 세대를 길러내는 책임을 진 공동체가 한국침신대고, 총장은 그 공동체 전체를 책임진 사람이다.
이 책임을 나는 ‘십자가’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는 십자가는 예수께서 짊어지셨다. 우리 앞에 놓인 피 묻은 발자국은 예수께서 채찍에 맞고 짊어지신 십자가 언덕길이다. 그 십자가로 속죄함을 받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자기부인’을 전제로 한다. ‘자기부인’을 부인하는 순간 ‘십자가’는 사라진다. 자신의 명예, 자신의 이익,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고 강화하려는 욕망에 굴복하는 순간, ‘자기부인’이 사라지고 ‘십자가’도 사라진다.
총장의 지위에 있고 그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거이 자기를 부인하고 ‘공동체’라는 십자가를 짊어진다면 주님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 공동체의 역사에서 ‘리더십’이 실패했다면 존경할만한 어른이 없다면 그것은 리더의 자리에 오른, 혹은 오르고자 하는 이들이 ‘자기부인’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자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도리에 정통해야 한다. 총장이 그 본을 보이면, 그리고 그 본을 교수들이 따르도록 한다면 신학교는 환골탈태하듯 바뀔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