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악보에 쉼표가 없다면 그 음악은 어떻게 될까?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사람이 괜찮을까? 듣는 사람들 역시 그 음악을 맘 편히 들을 수 있을까? 만약 땅에 휴지기가 없다면 그 땅은 어떨까? 계속 풍성한 열매로 그 땅이 그 사람들의 욕심을 채워줄 수 있을까? 만약 축구선수들에게 하프타임이 없다면 끝까지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칠 수 있을까? 혹시 그러다 끝날 즈음에 다들 들것에 실려 나가는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만약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없다면, 만약 학교에 쉬는 시간이 없다면, 만약 힘든 농사일에 허리 펴고 참 먹는 시간이 없다면…. 모두 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안식’(安息)의 한자말 의미는 ‘편히 숨 쉰다’는 뜻이다. 현대인들은 얼마나 바쁜지 편히 숨 쉴 겨를도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숨넘어갈 일만 있다. 그러므로 편히 숨 쉴 수 있는 여건을 억지로라도 만들지 않으면 진짜로 숨넘어간다. 그러니 안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쉼’은 ‘숨’을 잘 쉬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숨이 생명이니까.
‘쉼’은 일의 능률을 위해서도 절대적이다. 도끼로 장작을 패는 두 일꾼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쉬는 시간 아깝다고 계속 장작만 팬다. 하지만 한 사람은 쉴 땐 쉬어가면서 장작을 팬다. 그러니 처음엔 쉬지 않은 사람이 좀 더 속도가 빨랐으리라. 하지만 금새 지쳐 나중엔 현저히 속도가 떨어진다. 내리 칠 힘도 없거니와 도끼조차 무디어진다. 그런데 쉬면서 장작을 팬 일꾼은 처음엔 좀 속도가 느려도 뒤로 갈수록 역전된다. 그가 한 일의 양은 오후가 되어도 일정하다. 적절한 쉼을 통해 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쉬면서 도끼날도 갈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잘 아는 당신, 그런데 왜 안 쉬는가? 그러고 보면 안식도 자신감이다.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어서 못 쉰다. 자기 일할 때 남이 쉰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쉴 때 남이 일하는 것만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좀 덜 먹더라도 자신있게 살아라. 자신있게 쉬어라. 일을 하든 쉼을 갖든 매사에 자신감 가진 사람들에게 돈도, 명예도, 권세도 따라온다.
또 안식은 겸손과 배려이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교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못 쉰다. 맡길 줄 아는 사람만이 쉰다. 내가 쉬어야 남도 쉰다. 그러므로 쉼은 타인에 대한 아주 중요한 배려이다.
또 안식은 명령이다. 쉴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도 6일간의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하루는 안식하셨다. 그러면서 “너희도 안식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쉬지 않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명령불복종이다. 우리 같이 약한 사람이 쉬지 않는 건 창조질서 위반이다. 지금 몸에 무리가 왔다면 다 쉬지 않아서 생긴 병이다.
그러니 쉬고자 하는 사람을 절대로 욕하지 마라. 게으르다고 함부로 평하지도 마라. 강물은 지금도 최선을 다해 흐르고 있으니 더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건 나쁜 일이다. 차라리 일중독인 사람들을 뜯어 말려라. 안 쉬어도 괜찮다는 사람을 쉬게 해라. 안 그러면 정말 큰 일 난다.
그래서 난 다음의 두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것은 출애굽기 33장14절과 23절에 기록된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14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3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두 말씀을 합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바로 하나님의 ‘어부바’이다. “친히 가리라. 너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네가 내 등을 볼 것이다...” 정말 멋진 약속 아닌가? 이는 지치고 곤한 우리 영혼을 위해 당신의 넓은 등을 내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등에 너희가 업히면 그동안은 내가 대신 너의 걸음을 가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니 이 고마운 약속을 믿고서라도 목회자부터 꼭 안식을 결심해보기 바란다.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