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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가 만든 쾌락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안’으로 불교를 말한 것을 보면서

 

중국은 지금 그 이름답게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다. 최근에는 세계의 금을 한 손에 쥐더니 이제는 다이아몬드를 또 한 손에 움켜쥐려고 유대인과 인도인이 휘어잡던 앤트워프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 2년 만에 다이아몬드의 최대 수입국이 되며 미국을 2등으로 밀어냈다.

 

이렇게 지금 중국은 세계 경제의 한 축을 확고히 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들과 대등한 위치를 확보함으로 중국은 이제 세계가 공부하고 싶은 나라가 됐다. 하지만 빛 뒤에 어둠이 있듯이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빠른 경제성장은 했으나 이로 인하여 배금주의를 낳으면서 사회의 도덕성 상실과 각종 부정부패들로 정신적 빈곤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중국 정부는 중병에 처한 중국의 도덕성 치유를 위해 종교와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그동안 핍박하며 박해하였던 종교에 관용을 베풀면서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다.

 

그 대안 속에는 2300만 명의 신자를 가진 중국 내 기독교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함께 중국의 병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에 비해 지금 한국에서는 중국과 같은 도덕성의 상실을 심하게 겪으면서도 그것의 치유를 위한 대안에서 기독교는 배제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교회의 빛(?)이 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려는 기형적 현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웃지 못할 촌극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속이라는 단어가 심히 거부감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필요악 같은 단어를 비유로 적용해본다.

 

현상적으로 전에는 기독교에 세상이 종속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세상에 교회가 종속되어 가고 있다. 빛이 어둠을 지배하며 지워내듯이, 교회는 세상에서 복음을 통한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며 모든 분야에서 통치 아닌 통치를 해왔다. 지금도 최소한 겉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교회는 지금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상실하고 세상은 교회를 비난하며 중심에서 외곽으로 교회를 밀어내고 있다. 세상의 가치가 결코 옳지 않음에도 그 가치를 대적할 동력을 기독교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루소가 사회 개혁론에서 각각의 개인들의 의지는 타인들의 의지와 비교된다면서 언급했던 세 가지 중 하나인 타인들의 의지와 상호작용하는 의지에서 타인들의 의지를 종속시키는 의지타인들의 의지에 종속되는 의지로 굳이 비유한다면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타인들의 의지에 종속되는 의지의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불 꺼진 등불을 들고 어둠의 가치들과 함께 뒹굴며 함께 음부로 달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총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일부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미 세속화되어 있다 못해 악취는 풍긴다. 권력의 시녀, 물질의 시녀, 부도덕성의 시녀로 시류를 즐긴다. 과거 로마시대 때에 자신들의 폭력 정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각종의 신()들을 이용하며, 그들의 폭력과 타락에 저항하는 이들을 신의 뜻이라며 신의 이름으로 생명줄들을 마구 잘라 댔지만 도리어 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공포의 정권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과 정의를 외치며 그것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상에서 복음을 당당하게 외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됐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결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비록 춤 값으로 목이 수반에 담기는 모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헤롯의 부도덕함을 비난했던 침례 요한같은 것이 진정한 기독교였다.

 

예수는 그렇게 준비된 길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멀찍이 벗어났음에도 별 거리낌 없이 세상길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걷고 있다. 세상을 구원할 대안으로의 존재됨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구원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사명감마저 잃은 채로 십자가를 타고 간다. 이렇게 교회가 그 고유의 색깔을 잃어가고 있을 때, 십자가 복음을 통한 구원의 대상이었던 세상을, 구원할 대안으로 불교를 거론한 이가 있다.

 

우리에게는 모욕과 충격을 주는 발언이지만 딱히 반론할 만한 구실도 별로 없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과 믿음에 대하여,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 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쓴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유고 출생으로 오늘의 레닌들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무신론자이자 21세기 대표적인 좌파철학자로 헤겔, 마르크스,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에 기반을 둔 비판 이론가다.

 

그는 2006년 뉴욕타임즈에 무신론은 유럽의 위대한 전통이다라는 기고를 하였으며, ‘교회는 곡물 저장고나 문화의 전당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등의 말로 종교, 즉 교회 타파를 주장한 인물이다. 이런 반 기독교적인 사람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마는 그가 지금 한국에 들어와 대학 강단에 섰다는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

 

지난 달 25일 경희대학교에서 700여명의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데올로기가 만든 쾌락으로부터 벗어나는 대안으로 불교를 제시했다.

 

불교를 통하여 자본주의가 만든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있어요. 불교를 통해 자본가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인 그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쾌락을 벗어나는 대안으로 불교를 거론하는 의외성 앞에 무력해진 기독교의 슬픈 오늘을 넘어 내일을 보는 듯 해 마음의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이렇듯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흐름은 반 기독교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는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 할 수 있는 종교가 더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위험하고 불행한 생각을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역사는 언제나 둘로 양분되어 왔지만 종교다원주의라는 상품이 각광을 받는 사이 기독교의 무용론이 쑥쑥 자라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마를 정복했던 기독교가 다시 로마에 정복당하고, 로마의 세속적 가치관에 기독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되어가고 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오늘이다.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기독교에 대한 비난이 갈수록 더 드세 지겠지만 아직은 복음을 순수하게 살아내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또 되려는 그루터기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

 

더 이상 기독교 정치 집단에 의지하지 말고 각 교회와 성도들이 이전처럼 낮은 자리에서 섬김으로 복음의 빛을 드러내고 복음의 맛을 맛보게 하면서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일을 시작한다면 역사의 무대에서 또 한 번의 참된 부흥의 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만든 쾌락 등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대안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세속적 성공을 버리고 다시 복음 앞에, 십자가 앞에 서는 결단을 한다면 틀림없이 세상과 사람의 대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교회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주의 보혈로 흠뻑 젖은 십자가 앞에 교회여 다시 서자.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