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산문화예술회관에서 KBS교향악단의 연주로 이 음악을 들었다. 지나가는 음악으로야 가끔 흘려들은 적은 있어도 직접 눈앞의 바이올린 소리로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그날 연주의 하이라이트는 한 시간 분량의 리스트의 ‘파우스트’였다. 그 역시 곡도 연주도 너무나 장엄하고 멋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 오히려 내겐 그 짧은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10분도 안되는 그 연주가 더 진하게 남아 있다. 왜일까?
물론 그것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빗 김(David Kim)의 연주여서이기도 하다. 동양인 최초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악장자리를 15년째 꿰차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 재미교포. 더구나 그 자리는 지난 100년간 유태인들만 차지했단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세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고, 각종 콩쿨을 다 휩쓴 실력자라 해도 그 기득권을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현재 미국의 유수한 연주자들을 다 모아놓은 ‘All-Star Orchestra’의 악장까지 겸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그래서인가?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의 연주는 뭔가 달랐다. 현란함을 능가하는 충실한 기본기부터 느껴졌다. 멜로디는 정확했고 리듬은 견고했으며, 선율은 빈틈 없고 소리엔 밀도가 있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듣는 이의 마음을 깊히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이것이 그가 든 바이올린이 350년된 수십억짜리였기 때문만도 아니었을 게다. 물론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지금도 해마다 한국을 방문하여 받은 은사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한다. 그래서 그 얼굴엔 온화함이 충만했을 게다. 그의 리더십 또한 포용과 배려심으로 뭉쳐있었을 게다. 어떤 찬사에도 홀리지 않는 겸손도 가졌을 게다. 그 믿음으로 객지에서의 피부색 다른 설움도 잘 극복해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주가 내게 각인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날의 곡목이 ‘우울한 세레나데’였다는 점이다. 물론 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세계를 잘 모른다. 연구해 본 바도 없다. 하지만 그날 난 분명히 느꼈다. 그것은 바로 ‘간절히 불러도 도대체 답이 없는 슬픔’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세레나데’(Serenade)란, 사랑하는 이의 창밖에 서서 애인을 부르며 들려주는 노래이자 연주이다. 따라서 세레나데는 애틋하고 아름다우며 강렬하고 진실하며 밝고 따뜻하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는 좀 아니었다. 많이 우울했다. 슬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후에 조사해서 안 사실이지만, 이 곡의 부제 또한 ‘무정한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란다. 그러니 아무리 불러도 창 열어 사랑을 받아주긴 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야속한 그대를 향해 기약 없이 바친 노래였던 것이다. 밖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말거나, 추위에 떨거나 말거나 그 방안의 여인은 불까지 꺼버렸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곡은 중간부분의 열정과는 달리 결말은 푹 꺼지듯 마무리했으리라. 그렇다면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는 왜 그랬을까? 더구나 이 곡은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한참 잘 나가던 35살 때 쓴 것인데…. 그렇다면 혹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정 주어 사랑하는 모든 대상(애인, 돈, 명예, 권세 등)에 대한 본질적 불안함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건 아닐까? 왜? 그딴 것들은 정말 안정적이지 못하니까. 정작 내가 필요할 땐 창 열어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난 이 음악을 더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목사다운 생각도 했는지 모른다. 왜?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아니시니까. 혼자 부르는 우울한 세레나데로 두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니까.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는 약속을 늘 지키셨으니까.
이제 막 금요기도회를 앞둔 시간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우리의 세레나데에 창 열고 응답하실 주님을 기대한다. 절대로 창 닫고 모른척 할 분이 아니심을 믿는다. 이 믿음 갖고 오늘밤도 난 뜨겁고도 간절히 주를 부를 것이다.
김종훈 목사 / 오산교회